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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도

by 길엽

공휴일이 끼어 긴 연휴처럼 느껴지는 날들입니다. 일요일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 어제 읽다 만 책을 펼칩니다. 지금 이 나이에 저의 취미이자 특기는 '독서'가 된 것 같습니다. 취미는 설득력이 있는데, 특기까진 너무 나간 것일까요. 제 자신은 독서가 취미도 되고 특기도 된다고 여깁니다. 누군가 저에게 그 정도 독서 경험으로 무슨 특기라고 지적하면 단번에 수긍하고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나겠습니다. 그래도 책 읽는 것이 요즘에 가장 만만하고 편한 일입니다. 게다가 아내나 아이들이 책상 앞으로 오가다가 제가 요청하든 하지 않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건네 주면 금상첨화가 됩니다.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책 외에는 특별히 뭔가 쟁취하거나 갖고 싶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가끔 시내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몇 권 고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아내 생각이 나서 서점 바로 앞의 '설빙' 가게에 가서 아내가 좋아하는 인절미 설빙을 사가지고 옵니다. 버스 안에서 산 책 한 권을 펼쳐 잠시 읽기도 합니다. 요새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정말 드뭅니다. 예전과 달리 버스 안에서 책을 펼치기가 영 쑥스러울 정도입니다.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스마트 폰에 깊이 파묻혀 정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 모두 동시에 그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지요. 지하철 안에서 승객들 모습을 보면 앉은 사람이라 선 사람이나 모두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고 스마트폰 세상에 깊이 깊이 들어가 나올 줄을 모릅니다. 저도 가끔 그 속에 들어가 카톡, 브런치 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등에 매몰되기도 합니다. 솔직히 그 세계가 재미가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다른 사람 보고 뭐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나이 들어 보니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어디에 구속되는 일도 없고, 시간에 쫓기는 경우도 없는 그런 나이가 되었습니다. 책을 읽든 어딘가로 걸어가든 돌아오는 길에 책을 사든, 아내가 좋아하는 설빙을 사든 하다 못해 세상 사람들이 우려하는 스마트폰 중독도 그냥 괜찮은 삶이 되었습니다. 물론 무언가에 중독이 된다는 말이 부정적인 뉘앙스가 가득하기에 조금은 조심해야 하겠지요. 요 며칠간은 일부러 서양역사나 철학 관련 책을 잡았습니다. 아무래도 동양고전에 익숙한 탓이라 서양고전 책을 집는 것이 낯설긴 합니다만 억지로 읽고 있습니다. 호메로스 저, 천병희 역<오딧세우스>을 읽어나가면서 처음엔 길고 복잡한 인명 때문에 몇 번이나 내려놓으려 하다가 넘어가곤 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에는 오딧세우스가 본격적으로 서사구조에 등장하고 그의 할동이 구체적으로 나와서 처음보다는 한결 잘 읽어 나갑니다. 처음 도전하게 되어 스스로 만족, 희열에 빠지기도 합니다. 소위 '자뻑'인 셈이지요.


몇 장 읽다가 유튜브에 들어가 '오딧세우스'관련 동영상을 찾아 시청하기도 합니다. 강대진 연구가가 많이 언급되네요. 그분 특유의 억양과 말투가 재미있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짧은 동영상을 보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옵니다. 오후엔 책을 조금 덮고 집을 나섰지요. 마음 속으로 대문의 저 장면처럼 전원 속의 들길을 걸어가고 싶지만 지금은 도시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집 주위를 걸었습니다. 산도 보이고 바다고 눈에 들어옵니다. 어쩌다 낯익은 얼굴들이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길가에 나뭇가지가 긴 겨울을 밀어내고 봄날 꽃망울을 터뜨리겨고 온힘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맞이하는 새 봄은 정말 기대가 됩니다. 더 이상 나이 먹기 전에 진짜 봄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지인들과 석양이 내리는 벚꽃나무 아래 평상에 둘러 앉아 고장 특산의 막걸리라도 내놓고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이번엔 제가 모을 테니 당연히 술값이야 안주 값이야 제가 내놓아야 하겠지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제 삶에 크고 작은 은혜를 주신 분들에게 보답하는 보은(報恩)하는 자리가 되겠네요. 그런 자리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지인은 제 계획을 듣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는 꼭 참여할 테니 절대 빼지 말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그분도 포함이지요.


어린 시절 시골 마을에서 모내기를 할 때 마을 사람들이 한 집씩 돌아가며 품앗이를 했습니다. 오늘은 새터띠기 논에 모두 모여 흥겨운 모내기 노래를 부르면서 하루 종일 모내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집에선 일꾼들 대접하는 식사를 아주 풍성하고도 맛있게 준비하였지요. 그래서 모내기 기간엔 아이들이 저녁 식사를 많이 기다립니다. 낮에 부모님이 남의 논에서 하루 종일 뼈빠지게 모내기 하느라 고생한 것은 모르고 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데리고 요리 솜씨 탁월한 정학 아지매 집에 데려가 맛난 음식을 가득 가득 챙겨 먹이던 때가 뚜렷하게 기억납니다. 저와 여동생은 정말 맛있게 먹었었지요. 시골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반찬이 나오면 아예 우리 남매를 꽉 끌어안고 떠다 먹이다시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 먹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다음 날 또 어딘가 모내기 품앗이 가려고 준비하다가 밤늦게 주무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모내기 할 때 들판에 다들 퍼질러 앉아 풍성한 점심 식사를 하면 지나가던 길손도 앉혀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길손 누구나 자리에 앉으면 차별없이 대접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모내기하는 집의 올해 농사가 풍년이 될 것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대학생 즈음에 듣게 되었지요. 이젠 기계로 모내기를 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리운 풍경은 낯설은 장면이 되었습니다. 또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하루 종일 허리를 숙여가면서 모내기 할 사람이 없기도 하지요. 요즘 모내기 하는 곳을 보면 이양기가 지나가면 기계가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모내기를 조금 하면 되더군요.


아주 오래 전의 추억에 젖었다가 다시 지금 현재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와 읽다 만 책을 다시 읽어 갑니다. 오딧세우스가 돌아오지 못한 상태에서 아들이 찾으러 가는 장면을 보니 코끝이 시큰해집니다. 천륜인 부자간이지만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실종된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 책을 다 읽으면 그 내용을 서평이나 독후감처럼 여기에 기록을 남길까 합니다. 책을 읽든 외출하든 걸어가든 무언가를 사가지고 오든 때론 지인들을 불러 맛난 음식을 나눠먹으며 담소를 나눌 기회를 만들든 그냥 아무 생각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맡기는 삶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돈이 많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어떤 책에서 본 사실인데 평생 쓰는 돈 가운데 대부분은 생애 마지막에 가장 많이 들어간다네요. 그만큼 건강한 몸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또 누군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가 평소에 건강을 위해 열심히 운동하는 것은 잘 죽기 위해서라고. 투병 생활이 길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환자 본인이나 주위 가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기니까 열심히 운동하여 건강하게 지내다가 극히 짧은 투병 기간으로 이 생애를 마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즐거운 연휴 끝에 이런 삭막하고 살벌한 내용을 언급하기가 좀 그렇지만 그럴수록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까 합니다. 삶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꿀불견이지만 잘 죽기 위해서 건강 유지를 위한 운동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깊이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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