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근무하고 있는 대안학교에서 우연히 <수학의 정석 공통수학1> 책을 만났습니다. 신학기 신규 구입 도서 목록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교 시절에 만났던 수학의 정석과는 표지가 다르지만 그래도 추억의 그 정석은 아직도 기억에 남았네요. 당시 대구 시내 남산동 헌책방에서 정경진의 <수학의 완성> 책을 싸게 사서 집으로 돌아와 밤늦게까지 풀고 또 풀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세상의 수학 참고서 중에는 <수학의 완성>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시외버스가 하루에 몇 차례 다니지 않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교 연합고사를 치러 대구고등학교에 배정되면서 제 인생에 진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시내버스가 참 신기했고 곳곳 분식점에 앉아 있는 학생들도, 시내 영화관이 많다는 것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진짜 신기했습니다. 대명동에 있는 대구고등학교 일과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대구역까지 걸어서 시내 동성로를 지나며 구경도 했습니다. 친구들이 저와 함께 걸으면서
"니 진짜 신기하나. 우린 이해가 안 되네. 그라고 니 촌 출신이라서 그카나. 진짜 잘 걷네."
라고 하면서 제 얼굴을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더군요. 그 시절 열일곱 그때가 참 그립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시의 공부 수준은 시골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저는 고교 입학 연합고사를 치르고 겨울 방학 그 긴긴 시간을 집안일 도우면서 교과서나 가끔 펼치며 한가하게 보냈더랬습니다. 당시 도시 연합고사 합격한 학생 수도 몇 명 안 되었기 때문에 제 딴에는 으스대는 마음도 내재해 있었지요. 시골 중학교에선 그렇게 공부해도 무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매월 월례고사를 치렀는데 3월 첫 시험에서부터 충격적인 결과를 받았습니다. 우리 반이 62명인가로 기억하는데 세상에 거의 최하위 수준의 성적이었고, 특히 수학은 거의 빵점에 가까웠습니다.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수학 시험 시간 내내 문제를 풀 엄두도 못 내고 말았습니다. 교과서 문제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문제일까. 왜 내가 손도 못 대고 그렇게 처참한 성적을 받았을까 고민하면서 달려 간 곳이 남산동 헌책방이었고, 당시 들렀던 책방 주인께서 씩 웃으시면서
"어이, 학생 수학 선생들이라고 무슨 재주로 문제 만든다 카더노. 다 문제집에서 요리 조리 빼끼가 살짝이 바꿔서 출제한다 아이가. 요거 가져가서 범위에 있는 문제는 다 풀어보만 4월달 시험엔 좋은 결과가 나올 끼다. 한번 해 봐라."
라고 권유하였습니다. 그렇게 구입한 책이 정경진의 <수학의 완성>이었습니다. 당연히 <수학 정석>은 몰랐지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꼬박 밤을 새워 <수학의 완성>을 풀었습니다. 학교 수업 진도가 나간 범위의 문제는 복습 차원이라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는데, 아직 배우지 않은 부분은 뒤의 해설을 보면서 외우다시피 하게 되었습니다. 수학을 공부하는 최고의 비결을 나 혼자 알고 있는 듯이 <수학의 완성>을 풀고 또 풀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화장실에 얼른 다녀와서 또 풀었습니다. 그러자 주위 아이들이 저를 보면서 정말 신기해하였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다면서 말입니다.
기다리던 4월 월례고사 수학 시간이었습니다. 3월보다는 많이 올랐지만 그래도 수학 점수가 불만이었습니다. 90점 이상을 받아야 만족할 텐데 70점대였기에 말입니다. 그때 어느 친구가 말했습니다.
"야~ 이번에 수학 문제는 '정석' 끝 부분 문제를 그대로 빼낐더라. 느그들 다른 거는 보지 말고 정석 중에 제일 뒤에 있는 문제를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 내가 알려 주이까네 느그들 좋은 점수 나오면 그냥 있으면 안 된다 알았제."
'뭐라고 수학 정석이라 캤나. 그런 참고서도 있다꼬.'
그날 수업 마치자마자 다시 남산동 헌책방 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학 정석> 있느냐고 물으니까 그 사장님 빙긋이 웃으면서 금방 내놓으셨습니다. 제가 올 것으로 미리 알고나 있으신 듯이. 대구 시내 고등학생들이 대부분 이 코스를 거쳐갔다면서 말이지요. 수학의 완성에서 수학 정석으로 그리고 정석을 사가지고 가면 또 와서 <이기현의 기본종합영어>를 사러온다고까지 말해 줍니다. 그 말을 듣고 수학 정석에 이기현의 기본종합영어도 한꺼번에 구입하였습니다. 다른 친구들 따라 가야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공부를 하게 되어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헌책방은 당연히 사라졌고 사장님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요.
고등학교 1학년 3월 월례고사에서 충격적인 성적을 받고 한 달만에 헌책방 사장님의 충고로 수학 성적을 올렸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시기를 놓쳤다면 내 평생 후회하면서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헌책방 사장님의 도 통한 듯한 표정도 그립습니다. 허름한 헌책방 깊은 곳에서 책을 고르는 학생들에게 참으로 친절했었지요. 이기현의 기본종합영어는 제 고향 시골마을 달성군 논공면 위천1동 우나리에서 대구 서부정류장 일명 성당 주차장 오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대부분 읽었던 것 같습니다.
버스 안에서 책을 보며 좋지 않다는 주위 사람들의 주의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읽고 외웠습니다. 당시 영어 문제는 또 여기서 상당히 많이 출제된다는 것을 알았던 영향도 컸지요. 월례고사가 시작되고 문제지가 책상 위에 배포될 때 수학은 정석에서 영어는 기본종합영어에서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을 알았을 때 저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쾌감 가득한 소리를 질렀었지요. 왜 이런 참고서 그대로 베꼈냐고 항의는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 아이들 수학의 정석 책을 보니 제 인생에서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 열일곱 고1때가 새록새록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