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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16. 2024

그냥 그냥 사는 것은 참을 수가 없어요

고2 남학생의 인생 설계 이야기

 대안학교 학생들은 일반학교 학생들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학교 생활에 임합니다. 아침 등교 시간을 명확하게 지켜 단 1분이라도 지각하면 곤란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요. 실제로 일반 학교의 빡빡한 일정에 적응하지 못해 견딜 수가 없어서 대안학교로 온 경우도 많지요. 그렇다고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별로 없네요. 선생님들과 사이도 비교적 우호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전담 선생님들과 저는 처한 상황이 달라서 제가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도 싶습니다. 젊은 전담 선생님들은 이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하루 종일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 저만 속편한 말을 하는 것 같아 죄스럽지요.


가끔 교실에서 1:1로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학교에서 정년 퇴직한 저 같은 경우 세대 차이가 워낙 커서 깊은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래도 전담하시는 젊은 선생님들과 가끔 옥신각신하긴 해도 저보다는 훨씬 편한 상대이지요. 가끔 아이들과 1:1 대화를 하는 저와 달리 전담 선생님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 일거수 일투족을 챙기려면 엄청나게 피곤하고 그것들 모두가 스트레스가 되겠지요. 그래서 일과가 마치는 시간에 선생님들의 얼굴을 보면 피로가 그냥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은 고2 남학생과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학생은 특이하게도 다방면에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고, 정말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합니다. 독학으로 터득한 피아노 실력부터 헬쓰장 아르바이트, 혼자 익힌 드로잉도 대단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 게획을 또래 학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더군요. 고2 현재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현금이 9천 만원이라는 것에 제가 놀랐습니다. 1천만 원은 이미 청약저축에 넣어두었다고 합니다. 그만한 거금을 어떻게 모얐느냐고 물어보니까 주식, 코인 투자 그리고 아르바이트 등 순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모았다는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더군요. 일반 인문계 고교를 다니다가 대안학교로 올 때는 어머니께서 정말 실망을 많이 하셨는데, 요즘엔 이 학생이 너무나 행복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한 시름 놓은 듯한 표정을 지으신다고 합니다.


내후년 대학에 들어가면 우선 승용차를 구입하고 그때까지 모은 돈에 대출까지 해서 자신의 주택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들려주네요. PT 아르바이트를 장기간 한 영향인지 몸관리도 아주 빼어납니다. 무엇보다 늘 웃으면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 참 보기 좋습니다. 저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러더군요.


"저는 그냥 그냥 사는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 자신이 인생을 제대로 설계하여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처음엔 실망하셨는데, 요새는 저를 보고 '참 행복하게 보이네.'라고 슬쩍 한마디 하시더군요. 그 말씀이 진심이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제 마음을 많이 이해해 주시는 편입니다."


점심 시간에 강당에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독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니 정말 멋지더군요. 그래세 제가 엄지척하니까 이 학생 표정도 환해집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저렇게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청춘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2 열여덟 청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나요. 앞으로 살다 보면 지금까지처럼 순탄한 일만 있지는 않겠지요. 역경도 맞이할 수 있겠지요. 설령 힘든 일이 생겨도 잘 이겨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학생의 어머니께서 '요즘 참 행복하게 보이네'에 덧붙여 '그렇게 살면 나중에 고생할 낀데'라고도 하셨다기에 저도 한마디 했습니다.


"00야 난 네 어머니 말씀과는 생각이 좀 다르다. 지금 네 나이에 행복하면 나중에도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나이 들어서나 지금이나  늘 행복해야 한다. 특히 미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는 것은 진짜 어리석다고 본다. 젊은 날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을 많이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물론 그 말의 진정한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젊은 날 고생을 사서한다고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훗날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젊은 날 고생을 사서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00가 행복한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중에도 더욱 행복할 것 같다. 어머니께서도 부모로서 걱정하시는 차원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00의 지금 생활은 정말 보기 좋다."


물론 제 생각 다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 등의 말로 젊은 세대를 훈계하려는 것에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런 것은 세상 살기 팍팍한 MZ 세대 그 아래 10대들까지에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전형적인 꼰대 투의 훈계에 해당하거든요. 차라리 힘들게 사는 젊은 세대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마음 가짐을 갖는 것이 훨씬 필요한 것 같습니다. 불필요한 간섭이나 지시, 훈계보다 가급적 그들 입장에 서서 경청해주고 이해하는 태도가 젊은 세대들에게 삶의 의욕을 갖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노인 복지도 중요하지만 더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세대들의 삶에 대한 의지가 사그라지지 않도록 기성세대의 배려와 존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나아가 위의 고2 학생처럼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실행하는 적극적이 자세도 더 많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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