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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10. 2024

추억을 따라서

유튜브 동영상을 보다가 우연히 아주 오래 전 TV 방송 <우정의 무대, 그리우 내 어머니 레전드>를 시청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남성 중 군복무를 했던 사람은 누구나 그 심정을 충분히 느끼실 겁니다. 설령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 해도 후방에서 멀리 군대까지 아들을 찾아 온 어머니의 얼굴을 TV에서 보게 되면 애틋한 마음은 깊이 이해할 수 있겠지요. 제가 근무하던 당시에는 30개월이 만기였고, 근무지가 강원도 고성 최전방 철책 GOP라서 부모님이 부대를 면회오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부대 이동이 있어서 예비대에 오면 면회가 가능했지만 제 고향 땅 달성군 논공면 위천1동 우나리에서 최전방까지 오려면 당일로도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고향이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정말 컸습니다. 저녁에 손발을 씻고 식사를 할 때면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라도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저녁밥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많이 빌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가를 와서 가족들을 만나고 며칠 뒤에 홀로 추억공간 낙동강 변으로 나와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벙어리 사공이 있던 나루터도 가보고, 열일곱 추억이 서린 긴 강둑 위로 말없이 걸었습니다. 강 건너 강마을 풍경도 눈에 들어오고 외로이  떠 있는 조각배도 주인 허락없이 타보기도 했었지요. 또래 친구들이 다들 입대한 터라 마을엔 친구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추억 공간을 홀로 걷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오랜만에 휴가 온 아들에게 특식 먹인다고 아침부터 준비한 닭요리를 내놓습니다. 휴가 올 때마다 바쁜 농사철이었는데 가족들 모두 저를 둘러싸고 앉았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형도 여동생 모두 저에게만 많이 먹으라고 권유하였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선 제 바로 옆에 앉아 흡사 어린아이 대하듯 음식을 제 그릇이나 접시에 올려 놓으면서 자꾸만 권하셨지요. 61kg으로 입대한 지 10개월 만에 75kg이 되어 첫 휴가를 왔는데도 제 몸이 약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닭다리 하나를 들고 제 손을 꼭 잡아 먹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드셔야 제가 먹겠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굳이 제가 먼저 먹기를 강요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젓가락으로 살짝 드시는 것을 보고 제가 맛있게 먹기 시작합니다. 어릴 때부터 제가 무슨 음식이든 잘 먹어서 어머니가 좋아하셨습니다. 


"야야, 니는 뭘 해 줘도 잘 먹어서 나중에 복 많이 받을 끼다. 느그 마누래 누가 될지 모르지만 음식하는 것도 편할 끼고. 잘 묵으이 참 보기 좋다."


그렇게 휴가를 딱 세 번밖에 오지 못했고, 전역 2개월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세상을 버리셨으니 그때 함께 한 식사시 시간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시간이 되었던 것이지요. 당시에 슬퍼도 그냥 그냥 넘길 수 있었는데 세월이 갈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가득 커져갔습니다. 살아 생전에 효도를 다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이제 한(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결혼, 3남매, 현직 등의 비교적 평탄한 생활을 하면서 긴 세월 보내다가 이젠 진짜 노년세대가 되어 지난 날을 돌아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접한 "우정의 무대, 그리운 어머니"를 보면서 저도 눈물이 나더군요. 어느 병사가 '뒤에 계시는 분은 제 어머니가 아닙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 군에 오기 10일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이렇게 나왔습니다.'라는 멘트에 진행자 이상용 씨도 그날 오신 다른 병사의 어머니도 무엇보다 수많은 병사들 대부분 눈물을 훔치더군요. 저도 그랬습니다.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가 뵙고 싶었습니다. 


우리집 아이들도 3남매고 저도 3남매 중 차남인데 어머니께선 유독 저를 좋아하시고 아껴주셨습니다. 어린 제가 실감할 수 있을 만큼 어머니께서 편애를 하셨던 것이지요. 여동생도 언젠가 저에게 그렇게 말하더군요. 


"엄마는 오직 작은오빠 바라기로 평생 살았지요. 난 그기 섭섭했지만, 그래도 작은 오빠가 한번도 나한테 뭐라 하지 않고 챙겨 주었기에 섭섭한 감정이 크지 않았을 뿐이지만. 엄마가 진짜 작은 오빠 좋아했고, 오빠가 어딜 갔다가 집에 온다 하면 아침부터 오빠만 기다렸다 아이가."


휴가를 오던 날도 부대 복귀할 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앉으시면 큰절을 올렸습니다. 집안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이해를 잘 하지 못하더군요. 저희 큰아들은 심지어 입대하던 날도 휑하니 집 현관을 떠나며 '다녀오겠습니다.'만 남기고 갔습니다. 요즘 시대 분위기가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날 저와 아내는 안방에 나란히 앉아 큰아들이 큰절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조금 당황했습니다.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보니 온통 지난 날을 회상하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돌아보면 힘든 시절도 모두 추억의 하나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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