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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17. 2024

인생을 즐긴다는 것

대학동기들이 포항 구룡포에서 만나 하룻밤 보내며

스물다섯 살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하자마자 동기들이 모임을 만들어 이제 40년이 가까워집니다. 매년 여름방학, 겨울방학 2회 정기적으로 만나오다가 최근에는 자녀들 혼사를 맞은 동기를 중심으로 그가 사는 곳에 1박을 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혼주는 당일 저녁 숙소를 찾아와 동기들과 어울려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되지요. 제 출판 기념일이 지난 2월 24일 토요일 부산 시내 코모도 호텔에서 열렸을 때도 대학동기들이 거의 대부분 참석하고 그날 인근 호텔에서 1박 했더랬습니다. 그렇게 긴 긴 세월 만나고 있지만 사소한 언쟁 한번 없이 지금껏 지내왔습니다. 가끔은 논쟁 같은 토론을 할 경우도 있지만 같이 한 동기들이 논쟁을 들으면서 각자의 시각에서 좋은 방안을 제시할 뿐이지 지나치게 격렬한 분위기로 들어가거나 서로의 감정을 상할 정도로 함부로 발언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동기 한 명이 주위의 모임들 사례를 들면서 이 모임이 오래 유지하고 날이 갈수록 더욱 돈독해지는 이유가 뭘까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동기들이 모두 순수한 마음으로 모임에 참여한다든지, 전공 특성 덕분, 그리고 1980대라는 민주화 운동 기간의 특수성을 들기도 했습니다. 동기들의 이런저런 의견을 들으면서도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기들 참 순수하고 착합니다. 대학 시절 학교에서 30km 여 떨어진 제 시골집에 모두들 농사를 도우러 왔던 일도 떠오릅니다. 경운기에 모두 올라타고 물을 실어 놓은 논으로 가서 다 같이 모심기를 하였습니다. 도시에서 성장한 한 친구는 난생처음 모심기를 한 터라 나중에 친구들이 돌아가고 난 뒤 그 친구가 심은 곳은 모가 떠올라서 달밤에 형과 둘이 다시 모를 심었던 기억도 생각납니다. 시골 마을에 대학생들이 몰려왔다고 신기해하던 마을 아주머니, 아재들이 저녁 식사 시간 우리 집 마당 앞 담장 너머 바라보던 날도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저녁 식사에 반주까지 곁들여 기분이 고조되어서 누군가의 선창으로 다 같이 유행가를 르기도 했지요. 그 많은 음식을 마련하느라 고생하신 형수님들 당시는 참으로 꽃같이 이쁘셨는데, 이젠 80을 목전에 둔 할머니들이 되셨네요. 어머니가 진두 지휘하면서 아들의 친구들 저녁 식사를 풍성하게 준비하셨던 형수님들, 아주머니들의 그 정성이 자꾸만 그립습니다. 우리 집 수박 농사나 모심기 등에는 몇 번이나 몰려와 도와주었고, 교수님들은 적당하게 휴강을 해주셨습니다. 마을에 있던 순박한 여자 후배들이 우리 친구들을 몰래 훔쳐보기도 했지요. 그 모든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포항 구룡포에서 여름밤을 보내며 담소를 나누면서 근황을 주고받았고, 자녀들의 상황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대체로 건강한 편이라 그것도 우리들 복이라 생각한 시간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몇 박스나 먹고 밤을 던 친구들도 이젠 60대 본격적인 노년 세대가 되어 버려서 밤이 깊어 가도 술병이 열 손가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주량은 줄고 하고픈 말은 많아지는 나이가 된 모양입니다. 밤 12시가 되니 굳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각자 잠자리로 들어갑니다. 저도 낮에 운전을 많이 한 탓으로 피곤했습니다. 깊이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동기 하나가 감탄 어린 한 마디를 합니다. 누운 그 자리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귀한 장면을 본 것은 태어나고 처음이랍니다. 저도 그 말을 듣고 비스듬히 하늘을 보고 바다를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워낙 잠이 많기 때문에 눈을 온전히 뜨기 어려웠지요.


참! 가만히 생각하니 '인생을 즐긴다.'는 의미가 무엇일까가 떠오릅니다. 밤늦게 토론, 담소를 나눌 때 제 곁에 있는 친구가 문득 그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자신의 고향 친구들과 오랜 세월 모임을 하고 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이제 이 나이에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다소 식상하면서도 가벼운 한 마디를 했답니다. 제 옆에 있던 친구는 그의 고향 친구들의 인생을 즐긴다는 것은 '술과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면서 말이지요. 실제로 만나면 그렇게 술과 여자를 인생의 즐거움으로 들었지만 정작 우리 친구는 그런 술자리가 너무나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놓습니다. '인생의 즐거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도 다양할까요. 워낙 좋은 말이라 대부분의 생각이 비슷할 줄 알았다면 저의 생각 부족 탓일까요. 그래서 저도 이제 '인생의 즐거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봅니다.


좀더 시간이 흘러가서 진짜 진짜 노년 세대가 된다면 그때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끊고 정말 고즈넉한 시골 마을로 낙향하여 독서와 저술 활동을 하면서 이 세상 마무리를 하는 것이 저의 '인생 즐거움'입니다. 독서도 그리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제 삶에 유일한 즐거움이자 특기라고 여기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조용한 시골 마을 새벽 일찍 일어나 곱고 부드럽게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홀로 걷다가 수양버들 사이로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물고기들은 세상 시름 잊은 채 유영하는 것을 내려다 보는 순간을 떠올립니다. 세상사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이제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진짜 의미 없는 행동이지요. 그냥 넉넉한 마음으로 누구든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듯합니다. 하루 한 끼만 먹어도 특별히 먹고 싶은 것이 생각나지 않는 그런 시골 생활을 꿈꾸어 봅니다. 어느 지인은 시골에 들어가면 병원도 없어서 한번 몸이 아프면 정말 힘들 것 같다며 그냥 편한 도시에서 살 것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낙향할 때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기에 병원에 가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려 합니다. 하늘이 부르면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제 발로 그냥 가려 합니다. 아둥바둥 살겠다고 해 봤자 100년도 못 살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생에 집착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그때는 '인생의 즐거움'이 뭘까 미리 생각도 해봅니다. 도대체 인생의 즐거움이 뭘까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어느 개인도 그 사람의 젊은 시절, 노년 세대 등 나이에 따라 다르겠지요. 또한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더 살다 보면 또 다른 인생의 즐거움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의 '인생의 즐거움'은 책읽기와 글쓰기 입니다. 그렇게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면 시내에 나가 지인들과 만나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젊은 날처럼 폭음하고 다음 날까지 숙취에 고생하는 그런 술 마시기는 결코 아닙니다. 한 잔을 나누어도 그냥 미소가 번져 가는 사람들과 둘러 앉아 우리네 인생을 놓고 가볍게 아주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술자리 그런 것 말입니다.


여름 날 저녁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귓가를 스쳐가고 초록빛 나뭇잎이 탐스럽게 흔들리면 저녁놀 발갛게 품은 들판을 바라보며 막걸리 잔을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런 시름 걱정 없이 그냥 술을 나눌 수 있는 지인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지금 제 인생의 행복, 즐거움입니다. 그렇게 저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도 오래 오래 제 곁에 있어주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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