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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칼럼] "진정한 경청은 삶을 치유한다"

by 길엽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그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화려한 말솜씨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도 있고,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는 이도 있지만, 정작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가장 그리운 사람은 다른 유형이다. 바로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진정한 경청이란 무엇인가


말을 잘 들어준다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진정한 경청은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고, 그 속에 담긴 진심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상대방이 표현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살피며,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다. 이런 사람 앞에서는 평소에 꽁꽁 숨겨두었던 속마음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하기를 요구받는다. SNS에서는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직장에서는 의견을 표현하며, 인간관계에서는 자신을 어필해야 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천천히 들어주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대화는 각자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평행선을 그리거나,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경험담을 꺼내놓는 식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진짜 들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특별하다.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막의 여행자처럼, 갈증을 해소하는 시원함이 밀려온다. 그 사람 앞에서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도 보일 수 있고, 실수와 약점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듣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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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청취자가 갖는 특별한 능력들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우선 그들은 조급하지 않다. 상대방이 말을 더듬거리거나 주저할 때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준다. 때로는 침묵조차 대화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또한 그들은 해결책을 성급하게 제시하려 들지 않는다.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조언이 아니라 공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또한 뛰어난 감정적 지능을 갖고 있다. 말하는 이의 표정과 목소리 톤, 몸짓에서 진짜 감정을 읽어낸다. "괜찮다"고 말하지만 괜찮지 않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별일 아니다"라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상처받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준다.


무엇보다 이들은 비밀을 지킬 줄 안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지만,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털어놓은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진정한 청취자는 이런 신뢰의 소중함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왜 들어주는 사람을 찾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이토록 간절히 찾는 걸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그런데 진정한 연결은 표면적인 대화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면의 깊은 곳까지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 그곳에서 비로소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또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머릿속을 맴도는 복잡한 생각들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들은 정리되기 시작한다. 혼란스러웠던 감정들이 언어라는 옷을 입으면서 명확해진다. 이 과정에서 듣는 사람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판단하지 않는 따뜻한 시선 하나만으로도 말하는 사람은 큰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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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보면,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서 인기가 많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어떨까. 항상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도 고민이 있고, 힘든 순간이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항상 든든한 사람'으로만 기억하며, 그들의 연약함은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관계로


진정한 관계는 주고받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누군가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면, 우리도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 그것이 건강한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소통의 방식도 변했다. 메신저와 소셜미디어로 언제든 연락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깊은 대화는 더 어려워졌다. 짧은 메시지와 이모티콘으로는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기 힘들다. 얼굴을 마주보고 나누는 진솔한 대화의 가치가 더욱 소중해진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들은 때로 자신을 희생하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들어주려 한다. 하지만 건강한 관계에서는 역할이 때로 바뀌어야 한다. 오늘은 내가 들어주고, 내일은 상대방이 들어준다. 이런 자연스러운 순환이 있어야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실제로 심리학 연구들을 보면, 일방향적인 소통은 장기적으로 둘 다에게 해롭다는 것이 밝혀져 있다. 항상 듣기만 하는 사람은 감정적 소진을 경험하게 되고, 항상 말하기만 하는 사람은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지기 쉽다. 진정한 친밀감은 서로의 취약성을 나눌 때 생겨난다.



경청이 가져다주는 치유의 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진 치유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경청 치료'라고 부르기도 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경험만으로도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히 문제가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는다는 느낌 때문이다.


특히 현대인들이 겪는 외로움과 고립감에 경청은 특효약과 같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물리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진심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찾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청취자를 만나는 것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아이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부모나 교사가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반대로 아이의 말을 자주 끊거나 무시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자란 아이는 자존감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 경청은 그 자체로 사랑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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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사가 부하직원의 의견을 끝까지 들어주는 문화가 있는 조직은 창의성과 생산성이 높다. 구성원들이 자신의 아이디어가 존중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반면 일방적인 지시만 있고 소통이 부족한 조직은 침체되기 마련이다.



디지털 시대의 경청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일상화된 시대에 경청은 더욱 어려운 기술이 되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상대방이 말하는 도중에 알림이 오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화면으로 향한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경청은 거의 불가능하다.


온라인 소통이 주가 되면서 비언어적 소통의 중요성도 더욱 부각되고 있다. 표정, 목소리 톤, 몸짓 등은 말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하지만 텍스트 메시지나 화상통화로는 이런 미묘한 신호들을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깊은 공감대 형성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읽씹'(읽고도 답장하지 않음)이나 '안읽씹'(메시지를 읽지도 않음) 같은 새로운 소통 방식이 생겨났다. 이는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일수록 face-to-face 소통에서의 경청 능력을 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 이유다.


하지만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인공지능 상담사나 챗봇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함과 공감은 대체하기 어렵다. 기계는 정보를 처리하고 답변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이해와 위로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일상에서 실천하는 경청의 기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더 나은 청취자가 될 수 있을까. 먼저 '듣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휴대폰을 멀리 두고, TV를 끄고, 다른 일을 멈추는 것부터 시작한다. 몸을 상대방 쪽으로 돌리고,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등의 비언어적 신호로 관심을 표현한다.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설령 할 말이 있어도 일단 끝까지 들어본다. 그리고 성급하게 조언하려 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원한다. "힘들었겠다", "그럴 만했다" 같은 간단한 공감의 말이 긴 조언보다 더 큰 위로가 된다.


질문하는 기술도 중요하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보다는 "그때 기분이 어땠어?"라고 묻는 것이 더 깊은 대화로 이어진다. 사실보다는 감정에 초점을 맞춘 질문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 솔직하게 마음을 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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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형식적으로 듣는 척하는 것은 금세 들통난다. 진짜로 관심을 갖고, 진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도 마음을 열고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존재감'이다."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해주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존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고, 내 감정과 생각이 가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세상은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진짜 필요한 것은 들어주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든든한 사람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말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되지만, 듣는 것은 평생에 걸쳐 배워야 할 기술이다. 그리고 그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분명 더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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