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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10. 2023

"야~야 지금 가면 또 언제 올 낀데"

군복무 첫 휴가 복귀 때 어머니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군복무 시절 첫 휴가를 맞아 새벽부터 시작된 고향행은 참으로 멀고도 멀었습니다. 강원도 고성군 최전방에서 출발한 휴가는 제 인생에서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1982년 6월 22일 입대하여 그 다음해 3월 중순에 첫휴가를 나왔으니 9개월만이었지요. 전날부터 소대 고참들이 제 휴가복을 얼마나 정성껏 다렸는지 모릅니다. 전국 8도에서 모인 병사들이라 모두 정겹지만 특히 제 고향 대구 출신 고참이 유난히 살갑게 대해주었습니다. 평소 제 성격이 무던한 편이라 소대 내에서도 두루 두루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바로 위 고참이었던 강원도 평창 사람 박석흠 일병은 강원도 사람 특유의 순박하고 온순한 성품으로 과묵하면서도 정겨웠고, 저와 평소에도 대화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한번도 저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분 선에서 위 고참들이 준 고통을 온몸으로 막은 것 같습니다. 


대구 출신 고참이 휴가복을 한번 다리고 옷걸이에 걸어놓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좌로 우로 살펴 봅니다. 


"이거 암만 봐도 영 아이네. 안 되겠다. 다시 내리라. 그래도 고향 쫄따구가 첫휴가를 간다는데 이렇게 보내가 되겠나. 다시 내리 바라. 그라고 워카 함 보자. 워카는 누가 딲았노 그만하믄 괜찬켔다. "


그렇게 휴가복을 다시 내려 정교하게 날을 세웁니다 다리미가 그날 밤 정신없이 왕복운동을 하였습니다. 첫휴가를 앞둔 밤은 늦게까지 정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휴가를 가지만 다른 병사들은 야간 근무를 들어가야 합니다. 동부전선 까치봉 최전방엔 3월에도 날씨가 상당히 춥습니다. 그 추운 야외에서 밤새 온몸으로 북풍한설을 맞아야 하는 고통을 알고 있기에 휴가 기간에 벗어날 수 있음에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의 힘든 생활에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했지요. 야간 근무 초소에 들어가면서 실탄과 수류탄 대검 그리고 소총까지 완전무장한 채 야전잠바 속에는 갖가지 동상방지 옷들을 겹겹으로 입었습니다. 걸어가는데도 뒤뚱뒤뚱합니다. 3월이라 해도 눈이 많이 옵니다. 최전방 근무 사연을 적으려면 그야말로 책 몇 권도 가능할 정도입니다. <중략>


밤새 거의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부식추진용 트럭에 휴가복장으로 올라탑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 달려나옵니다. 새벽 기운이 싸늘합니다. 휴가간다는 마음에 추위도 느끼지 못하고 가슴은 온통 고향으로 가 있습니다. 민간인 통제구역을 벗어나는 곳에 위병소가 있는데, 우리 부대에서 파견나간 병사들이라 얼굴이 낯익었지요. 김 상병이 트럭 안을 살피면서,


"휴가가는 느그들, 잘 갔다온네이. 씰데없이 돌아댕기다 사고치지 말고 알았어?"


"예!!! 전~~~진!!" 부식 트럭에 앉은 휴가병들이 그 자리에서 크게 답하며 내립니다. 부대 구호가 '전진'입니다. 드넓은 부대 연병장에 뚜렷하게 쓰인  "전진할 땅은 무한대, 물러설 땅은 한 치도 없다."가 지금도 눈에 보입니다. 


위병소에 개인화기와 장비를 맡기고 본격적으로 민간인 지역으로 들어서면서 휴가길이 시작됩니다. 고속버스에 오르자마자 헌병들이 올라와 검색하지만 최전방에서 내려온 우리 일행이 불쌍했는지. 그냥 눈짓만 하고 지나갑니다. 밤새 아무리 휴가복과 워카를 다듬었다 해도 검게 그을린 얼굴색마저 숨길 수는 없었지요. 



속초고속버스터미날에서 먹은 돼지국밥은 세상에서 최고 맛이 좋았습니다.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군입대 후 9개월 만에 나온 민간인 지역이라는 해방감이 우리를 그냥 행복하게 만들었지요. 소줏잔을 나누는 일행들 표정은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일단 서울 강남 마장동 고속버스 터미널까지는 함께 갑니다. 그곳에서 전국 각지로 흩어집니다. 다시 동대구역으로 가서 시내버스를 타고 대구 서부터미날 일명 성당주차장에서 다시 고령이나 현풍행 시외버스에 오릅니다. 24km니 30분 정도만 달리면 되지요. 드디어 진짜 고향 땅에 들어섭니다. 내 고향 달성은 공기조차 달랐습니다. 이른 봄바람이 차가울 만한데, 고향 달성의 봄바람은 그냥 따뜻했습니다. 시골에서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시내 연합고사에 합격하여 대구고등학교로 진학하고 1학년 때는 통학하고, 2학년부터는 하숙하면서 그렇게 숱하게 다녔던 이 길입니다. 


월배 화원 옥포 논공 그렇게 드디어 내 고향 땅 논공면 위천1동 우나리에 내렸습니다. 캄캄한 방입니다. 새벽에 출발하여 겨우 겨우 밤늦게 고향 마을에 도착한 것입니다. 고향 마을은 고즈넉했지요. 내 마음은 뛸 듯이 기쁜데 고향 마을은 참으로 조용하기만 했지요. 시골은 불이 빨리 꺼집니다. 그래서 마을 전체가 고요에 젖어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제 두 팔이 크다면 마을 전체를 확 끌어안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고향 마을에 드디어 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마을 아재 아지매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 집에 가서도 저녁밥을 함께 먹어도 이상하지 않았지요. 






9개월 전 입대하던 날 동구밖 이길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새벽길을 걸었는데, 지금 이렇게 휴가를 왔네요. 입대 당시를 떠올립니다. 6.25때 아버지께서 육군 중사로 5년 근무하여 집에 계신 어머니께선 날마나 애를 태웠지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아버지는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앞서 걸으시고 어머니는 반 울음 소리 "으으으응~~~" 가득한 채 제 손과 허리를 꽉 잡았습니다. 저도 어머니 어깨를 왼 팔로 감싸안았습니다. 우리집 형제 3남매 중에 유난히 저를 좋아라 하셨지요. 학교 학예회나 운동회도 형이나 여동생보다 저를 우선으로 하셨지요. 형과 여동생은 분명 서운했을 터지만, 저는 그때 정말 좋았습니다. 운동회 하던 날 어머니를 모시고 교장실로 교무실을 돌면서 선생님들께 인사를 나누게 했지요. 


"교장 선생님, 우리 엄마입니더."

"아이고 멀리까지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들이 공부도 잘 하고 효자라 카더이 이렇게 오시니 좋지요. 야~야 니도 앞으로 지금처럼 어머니께 잘 해드려야 한다. 말 안 해도 니가 비미히 알아서 할 끼지만."


그리고 교무실에 가서 대부분 선생님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샘예! 우리 엄마입니더. 운동회 한다꼬 오셨심더."

어머니는 쑥스러워하시면서도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여동생 담임 선생님께서 저쯤에서 달려와 어머니두 손을 꼭 잡고 인사를 하셨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가 공부 잘 한다고 지 동생 담임은 안 보고 갈라 캤심니꺼. 우쨌든동 잘 오셨습니더. 늘 건강하이소."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께서 운동회를 보러 오시는 목적이 제 운동 실력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특별히 잘난 아들도 아닌데 앞장세우는 것이 내심 좋았던 모양입니다. 학교 운동회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도 저랑 딱 둘이서 나란히 서서 비포장길을 따라 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서녘 하늘 쪽에서 길게 내려오는 저녁노을이 어머니 얼굴에도 발갛게 곱게 내려 앉았고, 따뜻한 미소로 저를 바라보는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남았는데 이젠 그냥 추억의 세계가 되었네요. 


학예회 하던 날은 교실 앞쪽에 책상과 의자를 4열인가 5열인가 배열하여 우리반 전원이 키를 고려하여 위치를 적당히 잡고 올라서서 '고향의 봄'을 비롯하여 동요를 몇 곡 합창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교실 한 가운데에 담임 선생님과 나란히 앉으셔서 흐뭇하게 우리를 바라보셨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만 바라보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다른 어머니들은 대부분 교실 뒤에 서 계셨는데, 제 어머니만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공부를 조금 잘 했고, 반 임원이어서 그랬겠지요. 어머니는 마치고 집에 갈 때 그렇게 선생님과 나란히 앉은 사실을 정말 자랑스러워하시며 저에게 고맙다고 했지요. 


저도 노래를 부르면서 어머니만 바라바았고, 그 짧은 순간에도 어머니와 눈을 맞추고 노래를 같이 불렀습니다. 다른 어머니들은 그래도 좀 비싸게 보이는 옷을 화려하게 입고 온 듯한데, 제 어머니는 주황색 단벌 한복을 입고 오셨지요. 하도 많이 입어서 옷 솔기 곳곳이 헤어진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께선 무슨 특별한 날에는 반드시 그 옷을 입고 집을 나섰지요. 대학 입학식 날에는 외가 이모네 식구들을 대거 대동하고 대학 캠퍼슨를 낡은 주황색 한복을 입고서 거닐었던 날들 추억으로 살아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그래도 어머니 실망시키지 않고 기쁘게 해드리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상장이나 임원 임명장 등 무엇이든 받아오면 어머니께선 글자도 모르시지만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학교에서 3km 여  떨어진 비포장 하교길을 거의 쉬지 않고 달려 어머니께 갖다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상장을 받으시고 저를 꼭 안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다음에도 더 열심히 해서 받아오겠노라 다짐했었지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일은 뭐든 잘 해드리고 싶었고, 어머니가 싫다 하면 반드시 따르겠노라 마음 먹었습니다. 



제가 갓 태어났을 때 젖이 모자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너무 약해서 일어서다 쿡 쓰러지고 한 것이 늘 어머니 당신의 가슴에 못이 박혔다는 말도 떠오릅니다. 자라면서 뭐든 잘 먹고 하더니 갑자기 중학교 3학년 때 17cm가 크던 시절 제 키가 쑥쑥 올라가는 것을 실감하기도 했지요. 제가 키가 크고 들일을 잘 하니까 어머니가 정말 신기해 했습니다. 하기야 중학교 3학년 봄 때는 지게에 쟁기를 지우고 우리집 암소를 끌고 가서 1300평 논을 이틀인가 사흘 내내 갈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하지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소와 둘이서 논밭 흙덩이를 파넘겼습니다.


군대는 제가 가는데 실제는 어머니가 가는 듯합니다. 


"엄마, 다 가는 군대 뭐 그리 걱정한다꼬 우노. 괜찮다. 첫 휴가 금방 온다. 그라고 엄마 걱정 안 하도록 잘 하고 오께. 내 클 때부터 엄마 말 잘 듣고 했다. 아이가."


"알지, 니 한번도 내말 싫다 한 거 없지. 내가 뭐라 카믄 머든 잘 했다 아이가. 동네 사람들도 니가 내한테 그리 잘 한 거 다 안다. 그란데 니는 군대를 뭐 그리 멀리 가노. 다른 아~들은 모다 요 앞에 부대에 가는데 말이다. 강원도까지 우예 가노.으으으으~응~."


새벽 들에 나서는 아재들이 뭐라 뭐라 해도 어머니는 일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평소엔 아재들의 인사에 어머니가 그 몇 배로 답하시는데 오늘은 전혀 아재들을 보지도 않습니다. 오직 제 허리를 통째로 끌어안은채 매달려 오다시피 걸어오면서 자그마한 울음 소리만 참고 있습니다. 정작 저는 괜찮은데 어머니가 곁에서 그렇게 우시면서 걸으니 제 마음도 울컥해집니다. 아침 첫 시외버스가 오자 운전수가 가지 못하게 문을 잡은 채 한참이나 저를 보면서 우시던 어머니가 결국 문을 닫고 내립니다. 운전수는 가야 한다 하고 어머니는 문을 열어 놓은 채 문턱에 서 있으니. 결국  차는 출발하고 어머니는 뛰어오시다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시며 통곡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시외버스 뒷 좌석에 올라 바라본 장면이 생생합니다. 바닥에 앉아 온 어깨를 흔들며 손을 휘젓는 어머니 크게 우시던 그 얼굴이 바로 제 곁에 와 있는 듯합니다. 


동구밖 길게 난 길이 눈에 익었기에 어두워도 잘 걸어갑니다. 스물 두 살 군입대 전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걸었고, 어릴 때 동네 아이들과 몰려 다니며 뛰어놀았던 골목길입니다. 요긴 논공띠기 집, 새터너머 띠기 집, 상동 띠기 집, 칠용 형님 집, 기열 형님 집, 상출 형님 집 골목을 한번 돌면 언제나 반겨줄 듯한 기원  형님과 형수님 댁.......  기원 형수님은 당대 최고의 미인이셨습니다. 시집오던 날 마을에 꽃이 피었다고 동네 사람들이 그 미모를 인정받았지요. 지금 현재도 살아 계시는데 70대 중반이신데도 미모는 여전합니다. 제가 군에 간 사이에 아버지께서 새집을 지어 원래 살던 곳에서 동네 좀더 안쪽으로 옮겼기에 좀더 걸어야 합니다. 그 정도는 가뿐하게 걷지요. 새동네 담장들을 차례 차례로 보다가 드디어 우리집 대문에 들어섭니다. 


집 곳곳이 불이 환하게 켜져 있습니다. 새집이라 깨끗하네요. 


"전~~~~~진! 어머니 저 휴가 왔습니다."


안방 문이 우당탕 양 옆으로 열립니다. 문이 부서지는 듯합니다. 어머니 문을 열어젖힌 채 맨발로 마루를 지나 마당으로 내려섭니다. 그리고 달려와서 제 허리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어머니는 제 허리를 세게 끌어안고 얼굴을 제 가슴에 댄 체 한참이나 우셨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업고 한 바퀴 돌았습니다. 이번에는 제 목을 꼭 끌어안고 다시는 내려 놓지 않을 듯합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내려놓자 이번엔 왼손을 잡고는 마당에서 안방으로 마루를 올라 섭니다. 군 입대 당시 61kg이었던 체중이 74kg이 되고 규칙적인 군 생활로 몸이 탄탄해진 것을 보시더니 어머니께서 정말 신기해사면서도 좋아하셨지요. 


제가 군에 간 사이에 새로 지은 ㄱ자 집 형태가 눈에 들어옵니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기다렸다면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타박을 주시면서 제 손을 잡고 마루로 올라서게 합니다. 아버지, 숙부님, 형, 여동생까지 안방에 모여 앉았다가 저를 반겨주십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큰절하고 둘러앉았습니다. 제가 절을 올리니 아버지는 약간 고개를 숙여 손길로 제 짧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먼길 오느라 고생 많이 했제."라고 위로하시고, 어머니는 맞절처럼 저와 거의 같이 고개를 깊이 숙입니다. 절이 끝나자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시며 바로 제 곁으로 바짝 다가 앉았습니다. 얼굴엔 웃다가 울다가 눈물 자욱이 그렁 그렁 맺힌 듯합니다. 그리고 제 곁에 딱 붙어 앉아 제 두 손을 잡고 놓질 않으십니다. 


"야~ 야, 어디 몸은 아픈데 없고, 괜찮고 오는 길에 아무 일 없었나. 휴가 오는 기 뭐 그리 시간이 마이 걸리노. 느그 아부지가 아래 너머 논공 돌끼장에 가가 거~서 제일 큰 사과 한 마대 안 사왔나. 야~야 제일 큰 거 하나 도고, 야~가 먼길 온다고 배가 고플 낀데 빨리 깎아조야지. 그라고 있제, 니 온다꼬 우리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부대에서 쫌 일찍 안 보내주고. 거 부대 대장들도 참 희안타이." 


어머니 하시고 싶은 말씀이 정말 많으셨나 봅니다. 


그렇게 첫휴가 첫날밤 늦게까지 우리 시골집 안방 불이 휘황하게 켜져 있었고, 가족들의 담소가 남 너머로 마을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지요. 그렇게 13박 14일 휴가 기간을 시작합니다. 3월이니 들판에 비닐하우스에 토마토가 자라고 있을 때입니다. 휴가라고 어딜 놀러다녀오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지만 휴가 기간 내내 집에서 농사를 도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 다니면서도 집안 농삿일을 많이 도와서 그렇게 일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지요. 특히 보리밭 맬 때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호미로 풀을 하나 하나씩 뽑으면서 제가 아는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하는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하셨습니다. 어떨 때는 제 이야기를 듣다 말고 한참 제 얼굴을 쳐다 봅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아이고, 야~야, 니는 내 아들이지만 우예 이리 똑똑한가 싶어서. 난 학교 문 앞에도 몬 가봤는데, 니는 우예 이럐 마이 아노 그기 신기해서.' 휴가 기간 딱 하루 대학을 찾아가 지도교수님과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학 북문 근처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다시 돌아와 나머지 기간도 집안일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그렇게 휴가가 끝나고 내일이면 복귀해야 하는 날이 왔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소대원들이 먹게끔 떡을 가득 담아 방 한 쪽에 보자기로 싸두었습니다. 제대하면 제가 사용할 작은 방에 두꺼운 이불을 펼쳐놓고 제가 잠깐 누웠는데,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주무시지 않고 제 곁에 앉아 계셨지요. 휴가비를 많이 받아왔는데도 어머니는 휴가비 몇 배나 되는 큰돈을 주셨습니다. 가는 길에 배 곯지 말고 사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먹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잠 좀 자거라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안방으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간 어머니가 잠을 못 주무실 것 같아서 제가 어머니 손을 잡고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건너가는데, 어머니가 천천히 가자고 손을 잡고 잡아 당깁니다. 마루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가 봅니다. 하지만 3월이라 마루도 차가웠지요. 그렇게 안방으로 함께 들어가서 아버지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버지는 미소 띤 얼굴로 그냥 저를 바라보고만 계셨고 주로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괜찮나' 가 그날 밤 몇 번 나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돌아와 제 방 이불에 앉았는데, 어머니께서 또 들어오셨습니다. 그렇게 새벽까지 어머니는 제 곁에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지요. 


그렇게 눈 좀 붙인다고 잠에 들었는데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마당 쪽에 물을 내리는 소리가 납니다. 어머니께서 아침밥을 하시는가 봅니다. 비몽사몽간에 이불 속에 누워 있는데, 어느 새 어머니께서 제방에 들어오셔서 이불 맡에 앉아 제 손을 꼭 잡고 내려다 보십니다. 제 이마와 어머니 얼굴이 붙을 듯 가깝습니다.


"엄마, 와 무슨 일 있나. 어디 아픈 거 아이가. 누가 머라 카드나. 걱정이라도 있나."


"언지! 그런 거 없다. 니가 걱정이지. 내사 무슨 걱정 있겠노. 지금 니 자태 앉아 항쿤에 있으이 이렇게 좋은데 부대 다시 가야 한다 아이가. 그기 난 딱 싫다. 야~야, 그나저나 이번에 가믄 또 언제 올 낀데."



*5월 8일 어버이날이라고 우리집 아이들 3남매가 참으로 오랜만에 모여 완전체가 되던 날, 저와 아내에게 용돈과 선물을 주기에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서럽도록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한번이라도 기적이 일어나 고향 마을 안방에 어머니께서 방문을 절반쯤 열어놓고 저를 기다리신다면 마당이라도 꿇고 엎드려 큰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삶에서 한번도 잔소리 하지 않으시고 늘 따뜻한 미소로만 대해주시던 우리 어머니. 안방에서 마주 앉아 어머니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생전 그렇게나 저를 아껴주셨던 어머니 모습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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