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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13. 2023

이런 자리 한번 더 해 주이소

코로나로 4년 만에 함께 모인 아파트 주민들 경로잔치

"우째 잘 지냈나. 이래 보이 참 좋다. 어디 아픈 데는? 아~들도 잘 지내제?" 


아파트 내 65세 이상 어르신 대상으로 경로잔치가 열렸습니다. 코로나로 4년 만입니다. 도시에 와서 33년 만에 같은 아파트 주민들 경로잔치에 처음 참여했습니다. 아파트 동대표회의 일원으로 이 행사를 보조했지요. 부녀회원들 몇 분이서 하루 전날 밤늦게까지 정성껏 마련하고 당일 날 노인정에서 불고기를 열심히 구워 내놓았습니다. 몇 년 만에 이 행사를 추진한다고 지난 달 대표자회의에서 결정했을 때 요즘 다들 먹고 살기도 괜찮은데 쭈글시럽게 생각해서 몇 분이나 참가할까 생각했습니다. 


저야 동대표자회의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되어 어떻게 진행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초청하는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내 몰라라 하고 외면할 일이 아니라 지켜보았습니다. 통장님 전화가 몇 번이나 왔습니다. 동대표회의 전체 회장님이 당일 포항에 출장가셔서 대신 꼭 참석해서 주민들 앞에서 인사말씀 하셔야 한다고. 그리고 찬조도 꼭 부탁드린다고. 찬조는 말을 듣자마자 곧장 흰 봉투에 적절한 금액을 넣어서 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리직원께 전해드렸습니다. 하지만 행사 당일 주민들 앞에 서서 무슨 인사말을 해야 하는지 난감했습니다. 65세 이상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7~80대는 되어야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고, 이분들 앞에서 제가 무슨 말로 인사를 해야 하는지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낮 12시에 시작한다고 공지되었지만 시간이 다 되어 가도 대여섯 분만 와 계시고, 음식을 준비하는 부녀회원들 7분에 경비원 관리식 직원 외부 초대 손님 그리고 동대표자회의 멤버 몇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듯합니다. 자리에 앉을 분보다 옆에서 준비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통장님은 조바심을 냅니다. 


"코로나로 몇 년 안 했다고 사람들이 이렇게나 안 오네. 우짜노. 저 많은 음식을 남기야 하는데, 요즘 노인일자리 사업에 많이 가신다고 이렇게 빠졌을까."


그래서 제가 살짝 위로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오실 겁니다. 12시 딱 되어 오기도 좀 그렇고 해서 천천히 들어오시지 않을까요. 통장님과 음식을 준비하신 분들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많이 오실 겁니다."


통장님이 그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하는 표정을 보입니다. 저라고 무슨 확신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괜히 조바심 내기에 안심시켜드리려 했을 뿐이지요. 다행히도 조금 있으니 한꺼번에 몰려들어 긴 좌석에 2줄로 마주 앉은 자리가 꽉 찼습니다. 노모를 모시고 오신 아드님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 아드님도 60대 후반으로 보이니 노모는 90대 같습니다. 그리고 오신 분들이 서로 서로 얼굴을 아는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이 점이 신기했습니다. 도시 아파트 생활에서 주민들끼리 이렇게 서로 얼굴을 알고 있었을까 하고요. 각자의 주거 공간에서 가족들끼리만 대화하는 상황에서 이웃이라고 해야 같은 라인 엘리베이터에서 오가다 만나면 인사를 하는 정도의 사람들만 안면이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동대표회의 회장님 대신에 인사말을 간단히 하고 이번에 새로 오신 소장님도 소개해 드렸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늘 건강하시란 덕담과 함께 식사를 하시기 시작합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밥이 가득 담긴 공기들과 국그릇을 각 자리에 옮기는데 열심히 보조하였습니다. 미리 놓아둔 음식들에 밥과 국이 모두 들어가자 감사 인사말이 곳곳에서 나오면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은 낯선 얼굴인데 가끔 가다 우리 라인 주민께서 제 손을 덥석 잡고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아이고, 우리 선생님이 거기에 딱 서~가 있으이 참말로 보기 좋네. 사모님은 코로나로 몇 년 고생하고 있다는데 요새 괜찮은교. 우짜든동 이렇게 준비해주이 잘 무~께요. 고맙심더."


평소에도 오이, 가지, 호박 등을 비롯한 각종 채소를 우리집 현관문 손잡이에 몰래 걸어놓고 가셨습니다. 처음엔 누가 그랬는지 몰랐지요. 그래서 이건 누가 잘못 가져다 둔 것이라 여겼고, 아이들에게도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면 찾아갈 것이라고 말해서 하루 정도 그렇게 걸려 있었습니다. 다음 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저에게 자신이 그렇게 해놓았으니 맛있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저희는 시골에서 오신 곡식을 전하고 그분들은 시골 농장에서 가져온 채소들을 보내옵니다. 사위가 부산대학교 교수님인 것을 자랑하시면서 하루 하루 즐겁게 살아가시더군요. 그분도 오늘 여기에 오셨는데, 입성도 좋았습니다. 저도 반갑게 인사하며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역시 양념 불고기는 인기가 많습니다. 각 테이블에서 리필을 계속 요청합니다. 부엌 싱크대에서 한 분이 열심히 고기를 구워냅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잔치 분위기가 납니다. 예전에는 인근 유명 식당에 가서 단체 식사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부녀회에서 직접 준비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정말 수고 많으셨지요. 


 그간 못 만난 아쉬움을 이 자리에서 모두 풀어놓으려는 것처럼 정말 환한 미소와 함께 정겨운 이야기들이 테이블 위를 떠다닙니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을 줄 몰랐습니다. 부족한 음식을 요청하면 우리 몇이서 갖다 드립니다. 


그중 한 분께서

"이렇게 좋은데 이런 자리 한번 더 해주이소."


이 행사 전에는 무슨 무료 급식 현장 같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냥 밥 한 그릇 무료로 먹기 위해서 후딱 먹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런데 이번에 오신 분들이 어디 밥 한 그릇 못 먹어 오신 것이 결코 아니더군요. 그야말로 지역공동체 일원으로 따뜻한 대화의 광장에 모여 정겨운 식사 자리가 되었습니다. 밥은 천천히 먹고 하고픈 말을 먼저 전하느라 바쁩니다. 서로 서로 반갑게 손잡고 인사를 나누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대부분 그 자리에 남아 담소를 나눕니다. 웃음꽃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도시 공간 그것도 아파트 같은 개인주의적 사고가 팽배한 곳에서 서로 서로 대화를 나눌 기회도 뜻도 없이 날마다 바쁘게 살아가기에 서로 무슨 정겨운 대화를 나눌까 생각한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번에 참석하신 대부분이 아파트 처음 들어섰을 때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웬만한 친척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는 경비원들이 한번 오면 10년 이상 근무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외부 용역 업체에서 직원을 뽑으면 길어야 2년 짧으면 1년 아니 6개월마다 강제로 교체되는 경우도 많고 그 과정에서 문제점도 꽤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파트는 주민들 대표가 직접 직원을 고용하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 분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경비원도, 청소원도 관리실 소장 이하 직원들도 주민들과 그야알로 가족처럼 정을 나눕니다. 


동대표자회의에서 관리소장과 기술주임 등 직원을 직접 면접하여 뽑았습니다. 이번 신임 소장님은 면접 당시에 제가 부탁했지요. 


"다른 곳에도 좋은 데가 많겠지만, 소장님 우리가 놓치기 정말 아까우니 웬만하면 여기서 근무해주이소. 이건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닙니다. 꼭 여기서 근무해주이소. 아시겠지요."


그렇게 관리소장이 오셔서 주민들께 친절하고 아파트 일에 성실하여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주민들도 소장을 만나면, "우리 소장님, 우리 소장님"하면서 살갑게 대합니다. 덩달아 관리소장을 잘 뽑았다고 저를 볼 때마다 고마워하십니다. 저 혼자 한 것이 아닌데도 회장님을 비롯한 대표들도 옆에 함께 했는데도 저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아마도 이번 소장님께 제가 한 부탁이 소문난 모양입니다. 


주민들이 정도 많아서 그런지 경비실에 음식을 전하면서 경비원들께 감사 인사를 하는 일도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 와서 근무하시는 분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과 그분들의 관계도 매우 따뜻하지요. 경비원도 청소하시는 분도 70대가 네 분이나 계십니다. 작년 동대표회의에서 70대는 그만 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 얼렁뚱땅 의결이 되면서 경비원을 새로 뽑기로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저도 동대표회의에 들어오기 전에 의결한 사항이라 저간의 사정을 몰랐지요. 그런데 당시 소장님께서 정년을 앞두고 오래 근무한 노령의 경비원을 해고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는지 미적미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저에게 사정을 설명하셨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집에 보내시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했습니다. 여기 아파트 주민들 상당수가 고령화된 상태이고 경비원은 처음부터 근무하였기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이 경비원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건강하신데 나이가 많다고 내보내는 것이 영 짠해서 욕을 얻어먹을 요랑하고 지금껏 미뤄 왔습니다."


굳이 저를 찾아 이런 말을 한 것은 제가 나이 많은 경비원을 절대 내보내지 않을 확신이 있어셔였겠지요. 그렇다고 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 대표자들을 설득했습니다. 


"나이가 젊다고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들을 나이가 많다고 내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 열심히 일하고 그러니 주민들도 저분들 근무하는 날 밤에 음식을 경비실에 많이 두고 가시더군요. 지금 갑자기 해고해서 집으로 돌아가면 코로나 이 시국에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저 나이에 재취업은 불가능합니다. 얼마나 서운해 하시겠습니까. 이전 회의에서 의결한 것은 마땅히 존증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아파트에서 헌신해 온 분들을 해고하면 지역에 소문이 금방 납니다. 우리 동네에 대한 이미지 실추는 클 겁니다. 아파트 가격은 이미지에도 영향을 많이 받지요."


어쩌면 제가 이곳에 와서 대표자들이든 주민이든 이렇게 긴 연설처럼 말한 것은 처음입니다. 물론 회의 이전에 우리 라인에 계신 나이 많으신 선배님들께 조언도 구했습니다. 대부분 제 의견에 동조하더군요. 그중에 피끓는 00선배님은 


"만약에 경비원들을 주민 동의도 받지 않고 내보낸다면 내가 당장 회의에 가서 대표들을 가만 안 둘 거요. 나이 많다고 그 사람들 내보낸다꼬. 즈그는 나이 안 묵나. 나이 묵고 나이 이야기하면 얼마나 서러운지 모르는가베.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을 왜 집에 보낼라꼬 그라는지 모르겠네. 그 월급 받아 나이 많은 할마이하고 재미나게 살고, 손주들 용돈 주고 행복하게 해줄 낀데. 절대 안 된다 카소."



동대표자 회의에 참석하시는 분들 몇에게 사전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회의 의결에 붙인 결과 압도적으로 '경비원 해고 불가'가 나왔지요. 의결하는 날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경비실에 함게 모인 경비원들이 이미 소식을 들었는지 크게 인사를 합니다. 아이고 그건 제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습니다. 경비원 한 분께서


"있다 아입니꺼. 내가 지금 나이가 70 넘어 여기 일하는 거만 해도 참말로 고마운 일입니더. 주민들께 진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란데 갑자기 나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몇 달 동안 밤에 잠이 안 와서 매일 약 먹고 잠 잔다 아입니꺼. 이번에 이렇게 해주이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자 그런 걱정 하시지 말고 열심히 하십시오. 무엇보다 본인이 건강해야 이 일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인자부터 그런 이야기 잘 안 나올 껍니다. 아프지 마시고, 약 안 먹고 편하게 주무시이소."라고 달랬지요.



아파트 분위기가 다른 곳과는 많이 다릅니다. 주민들 성격도 순하고 민원도 거의 들어오지 않습니다. 관리소 직원에 대한 주민들 만족도도 높습니다. 아파트 view는 바닷가라 전국 최고 절대 청정구역이지요. 주민들이 아침 출근 시간에 밝게 인사를 나눕니다. 이웃에게 친절한 분위기가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오신 어르신들의 반응도 너무 좋습니다. 부녀회원들께서 수고를 많이 하셔서 다들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아파트라면 경로잔치를 5월 8일 어버이날 즈음에 딱 한번 할 것이 아니라 여건이 마련된다면 횟수를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추신: 이 아파트에 온 지 12년 만에 주민들 앞에서 처음 노래도 한 곡 하고 얼른 도망갔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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