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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18. 2023

요우티아오[油條]

간신 진회(秦檜)와 충신 악비(岳飛)에 얽힌 이야기

진회(秦檜)


음식을 통해서 현실 정치를 풍자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방영된 드라마 ‘정도전’에 성계탕, 성계국이 언급된 적이 있다. 드라마 중에 백성들이 '성계탕'을 즐긴다는 것을 알고 이성계가 눈물을 쏟는 장면이 있었다. 자신을 비웃는 민초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보다 역성혁명의 와중에서 불가피하게 자신이 제거한 정적들을 떠올리며 지난 날에 대한 회한을 깊이 드러냈다. 잔인한 역사적 배경과 달리 이성계 역을 맡았던 유동근의 감정 이입 연기가 널리 회자되었다. 당시 드라마 '정도전'에서 나온 성계탕은 당시 백성들의 한스런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무당들이 굿을 하며 제물로 바치는 통돼지를 사용하는데 굿이 끝나면 이를 난자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질겅질겅 씹어먹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먹는 고기를 성계육(成桂肉)이라 한다는데, 왜 하필이면 그렇게 부를까? 성계육은 말 그대로 이성계 고기라는 뜻이다. 최영 장군은 무속인들 사이에 신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이성계는 무속인들을 포함한 민중들 사이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성혁명에 따른 왕조 교체기에 최영은 고려를 지키는 충신의 이미지로 자리매김했고,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최영을 축출하였다. 백성들 사이에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최영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한 반면에,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연 이성계에 대한 반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역사란 사관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최영과 이성계에 대한 시각은 어느 한 가지로 단정지을 수 없다. 더욱이 각 인물의 처신에 대해 단정적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는 선이고, 누구는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판단은 역사 해석에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상황이나 배경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최영과 이성계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이 퍼져 있었다. 쓰러져 가는 나라 고려를 유지하기 위해 충성을 다한 최영과 고려 왕조를 엎어버리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을 살상한 이성계에 대해 당시 백성들의 관점이 명확하게 흑백논리로 갈라진다. 하지만 오늘의 시각에서 보자면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상황 논리에 맞게 처신한 인물로도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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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이성계에 대한 반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성계육, 성계탕과 정반대로 이성계를 칭송하는 용어도 있었으니, 바로 쌀밥을 뜻하는 이밥이다. 젊은 세대들은 이 용어를 들어 본 적이 별로 없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 생전에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1392년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면서 조세와 토지 개혁을 전격적으로 실시하였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나 그 세력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전 정권의 제도를 개혁하여 민중들에게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앞설 수밖에 없다. 오랜 역사적 교훈을 생각해 보면,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중들의 배고픔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실제로 전제군주 정치체제에서 왕족이나 귀족들로 대변되는 권력층, 지배층은 노동, 병역이나 세금 부담은 전혀 지지 않고 엄청난 토지를 독점하여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다. 실제로 고려 말기 귀족들이 사전을 대거 보유하면서 국가의 역량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들이 토지를 대거 겸병하면서 불쌍한 민초들의 삶은 너무나 피폐하였다. 화(禍)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민초들의 삶을 고달프게 한 것이 비단 토지 문제뿐이랴! 국가 내외적인 상황이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는데, 특히 왜구의 출몰에 따른 피해 또한 심대하였으니 백성들의 황폐한 삶은 오죽 했겠는가. 심지어 관리들에게 주는 봉급마저 연기해야 할 정도로 고려의 재정은 극심하게 어려웠다.           



이성계가 이끄는 요동 정벌군이 위화도 회군을 통해 대세를 장악하여, 반대 세력의 거두이자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최영을 처형하고 국권을 휘어잡았다. 이때 이성계 일파의 신진사대부들이 민심을 돌리기 위해 급히 마련한 것이 전제(田制)의 개편이었다. 전제 개혁을 통해 직접 농사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는 정책을 펼친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과전법을 시행하자 많은 농토가 소작농에게 돌아갔다.  


         

토지 개혁을 통해 백성들이 이전에는 구경도 하지 못했던 쌀밥을 먹게 되었으니.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 대한 고마움이 컸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말이 바로 ‘이밥’! 이씨의 밥, 즉 이성계가 내려준 밥이라고 쌀밥을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커피 한 잔이 쌀 한 되보다 가격이 비싼 현대 사회의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산업화 시절에 또는 그 이전에 근대화 과정에서 보릿고개를 겪어 본 세대들은 쌀의 중요성을 깊이 실감한다. 쌀가마니만 집안에 들여놓아도 그냥 배부르다고 하지 않았던가. 필자는 요즘도 마트에 가서 쌀을 사오거나, 시골에서 쌀 가마니가 오면 쌀을 보기만 해도 풍요로움을 느낀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지난한 세월에 쌀이 주는 존재감이 그 얼마나 컸던가. 실제로 배고픔에 시달린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쌀밥 마음껏 먹는 것이 평생 소원일 만큼 삶의 과정이 팍팍하였으니, 이성계가 확보해준 쌀밥이라니 얼마나 기뻤을까. 백성들의 입장에선 어떤 세력이 권력을 잡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직 백성들 자신들의 삶에 배고픔이 없다면 누가 권력을 잡든 상관없었다. 그만큼 백성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였다. 그런데 이성계 덕으로 쌀을 볼 수 있었다니 이런 용어가 충분히 등장할 만하지 않은가. 물론 조선왕조가 대대로 그렇게 백성들의 속을 깊이 헤아리는 정치를 지속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층이 다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짓을 서슴지 않았음에랴!      

    

요우티아오[油條]          


고려를 멸망시키고 고려 유신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주역이 이성계였다. 그 이성계에 대한 반발 심리가 반영되어 백성들 사이에서 성계탕, 성계육, 성계국이란 말이 등장하였듯이, 중국의 요우티아오의 유래는 남송 시절의 간신 진회(秦檜)와 연결되어 유래하였다. 사람들은 ‘회(檜)’라는 글자를 꺼려, 지금도 이름을 지을 때에 이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진회라는 이름에 대해 중국인들의 반감이 어느 정도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중국 서민들이 아침 식사로 즐겨먹는 ‘요우티아오’는 길게 두 가닥으로 반죽된 밀가루를 길쭉하게 떼어내 기름에 튀겨서 만든 면 음식이다. 저장성 항저우에서 기원된 음식으로 주로 아침에 먹는다. 중국 여행객들이 노점상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간식용 먹거리이다. 이것을 광둥성 사람들은 여우자귀[油炸鬼]라고 하고 북방 쪽에서는 과즈[果子]라고 하기도 한다. 진회를 증오하여 한 때 ‘요우티아오[油條]’를 ‘요우짜휘[油炸檜]’로도 불렸다고 한다. 진회의 이름 중에서 회(檜)를 교묘하게 요리 이름에 붙여서 간신 진회에 대한 증오감과 분노의 심정을 반영하였다.    


       

요우짜휘[油炸檜]를 풀어보자면 ‘기름에 튀길 회(檜)’가 된다. 우리네 사회에서도 무엇에 튀겨 죽일 놈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극단적인 분노에는 튀긴다는 말이 우리나 중국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었는가 보다. 진회가 누구인가! 중국 남송 시대 재상이었던 진회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주화파의 거두로서 갖가지 술책을 부린 끝에 강경한 주전파 악비(岳飛) 부자를 살해하였다. 우리도 조선 인조 시절에 남한산성에서 주화파와 주전파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결국은 청태종의 말발굽 아래 인조가 참으로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다.


 인조가 당상에 있는 청태종을 받들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바닥에 찧는 삼배구고(三拜九叩)의 예를 올리면서 우리 한민족 5천년 역사에 유례없는 굴욕을 당했다. 그래도 주화파가 주전파를 제거하는 비열한 술책을 획책하진 않았다. 악비 같은 충성스런 무장을 교활한 방법으로 제거한 사례는 적어도 없었다. 그렇다고 인조 당시의 우리 집권층이 훌륭한 정책을 펼치거나 현명한 처신을 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악비가 살해된 린안(臨安)은 오늘날 항저우에 해당하는데, 린안의 시후(西湖) 일대에서 진회 부부의 모형을 밀가루 반죽으로 만들어 기름에 튀겼다. 특히 부부의 목을 비틀어 팔팔 끓는 기름에 튀겨 죽이는 평형(烹刑)을 흉내내면서 원한을 풀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만들어진 요리가 ‘요우티아오’라고 한다. ‘요우티아오’는 진회의 악행에 불만을 가진 일반 민중이 밀가루로 만든 진회의 인형을 뜨거운 기름에 튀겨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하려고 했던 데서 탄생하였다.       


    

비록 아무런 힘이 없던 백성들이라도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악비를, 탁월한 영웅 악비 그 충신을 아주 비열하게 제거한 간신 진회의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힘없는 민중들이 그렇게 진회에 대한 한풀이를 한다고 해서 역사적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진회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그저 단순한 한풀이에 끝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권모술수로 충신을 잔인하게 죽게 한 진회에 대한 민중들의 평가는 엄중하였다.      


      

악비와 진회  


        

진회가 왜 이렇게 민중의 원성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을까. 남송 시기에 유명했던 민족영웅 악비와 희대의 간신 진회에 얽힌 이야기다. 충신 악비는 남송 초기에 침략국 금나라 여진족 군대에 대항해 싸웠다. 장군의 신분이었지만 학문으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던 악비는 후세에 저서 『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을 남겼다. 그의 시호는 충무(忠武)이고,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았다가 뒤에 충무로 개정되었으며, 1204년 왕으로 추존되어 악왕(鄂王)이 되었다. 시호에서 느낄 수 있듯이 충성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송나라 사람이지만 명나라 이후 대대로 중국 정통 한족의 정신적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엄한 교육 밑에 자랐으며, 용기와 지력이 뛰어났다. 병법에 능란했던 악비는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상승장군 악비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구릉이 많은 남방 특유의 지형을 활용하여 기마병 중심의 여진군을 격파하여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가 거느린 '악가군'은 정병으로 용맹했다. 당시 금나라에서는  

    

                           "산을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무너뜨리기는 힘들다.“     

                                                              難撼山易, 撼嶽家軍難     


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악가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제국 송나라를 괴멸시킬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금나라의 평가가 이러하였으니, 악비의 군대의 전투 능력은 실로 대단했다. 


         

무엇보다 악비가 인솔하는 ‘악가군’은 개인이 조직한 군대였음에도, 중앙 정부의 정규군인 관군을 훨씬 뛰어넘는 조직력과 엄격한 규율, 전투력을 갖췄다. 오랜 기간 동안 정부나 국가적 차원에서 국방을 위해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반복하여 역량을 키운 정부군보다 민간의 비정규군이 대부분 허술하다. 하지만 악비의 군대는 모든 면에서 정부 관군보다 뛰어난 전투력을 소유하여 숱한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전장(戰場)에서 엄격한 규율이 정말 중요하다. 이렇게 엄정한 군율 아래 뛰어난 조직력을 갖춘 악비의 군대는 전투력 또한 탁월했고, 그의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면서 북방의 신흥 강국 금나라에 강력하게 대항할 수 있었다. 악비는 금나라의 군신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악비의 군대가 용맹한데다가 지휘관인 악비의 전술 전략도 뛰어났다. 전장에서 민심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 데도 유능하였다. 특히  

         

                           “얼어 죽더라도 민가를 훼손하지 말라. 굶어죽더라도 노략질하지 말라.”      

                                                                 凍死不拆屋,餓死不擄掠     


는 악비 군대의 철칙이었다. 이러한 엄정한 군율은 자연스럽게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악비는 송 왕조 부흥의 새로운 희망으로 부각되었다. 악가군에 비해 당시 송나라 정규군은 부정과 비리로 얼룩져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악비의 군대가 없었다면 허약한 송나라가 신흥강국 금나라에 일찌감치 망했을 것이다. 아무리 군사의 수가 많다 해도 내부적으로 지도자의 정신이 허약하고, 부정과 비리가 판치게 되면 전력이 형편없이 떨어지게 된다. 그만큼 지휘관의 용기, 정의감, 군 내부의 기강 등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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