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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19. 2023

진짜 시골에 가서 살고 싶어요?

30년 가까이 몸담은 모임 선배회원들과 둘러앉았습니다. 변함없이 제 곁에서 넉넉한 미소로 저를 도와준 사람들이라 소홀히 할 수 없었지요. 가끔 시간이 나면 번개를 쳐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시내 허름한 식당에서 만나곤 했습니다. 비오는 날이면 '빈대떡과 막걸리'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했지요. 여자 선배님 한 분이 슬쩍 물어옵니다. 


"진짜 시골에 가서 살고 싶어요? 언제든지 기회가 온다면 갈 거에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인데 시골 꿈은 접고 여기서 우리들과 이렇게 재미나게 보내면 안 될까요. 만구 우리 욕심인가.ㅎㅎ. 사모님 몸도 좋지 않은데 시골에 가면 더 안 좋을 텐데."


함께 있던 여러 선배님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 대답을 기다립니다. 


"집사람이 저렇게 아픈 상태에서 저 혼자 살겠다고 시골에 홀로 들어가는 것은 진짜 무책임한 거지요. 그럴 리는 없고요. 조용한 시골에 들어가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아예 끊고 그렇게 살다가 가고 싶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제 생각과 꿈이 그렇더라도 그냥 내지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답하니 함께 자리한 선배님들이 갑자기 환한 모습을 보입니다. 모임에 오시면 나이가 많아서 인제 그만 와야 되겠다고 하시는 선배님들이 가끔 보입니다. 70대가 80대가 되니까 회원들 눈치가 보이는가 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럴 때마다 곁으로 가서 잔에 소주를 따르며

"형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누굴 보고 이 모임을 끌고 가시는지 뻔히 아시면서,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하십니까. 만약 그런 이유로 안 오시면 저도 당장 그만둘 터이니 그리 아세요. 그러니까 앞으로 제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 하기 없기입니다. 알았지요? 누군 나이 안 먹나요? 그런 거 생각지 말고 건강에 유의하셔서 우리 후배들에게 지금처럼 멋진 모습 보여 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 선배님 씩 웃으며 제 말대로 하겠노라 하십니다. 실제로 이 선배님은 올해 나이가 82세인데 요즘도 자전거를 하루에 몇 시간씩 타실 정도로 장딴지가 단단합니다. 모임에 오시면 별 말씀은 없으시지만 우리 후배들에게 늘 귀감이 되어 주시며 결정적인 순간에 모임을 위해서 도움을 많이 주셨지요. 한 달에 한번 모여 월례회를 하고 저녁 식사를 먹으니 웬만한 친척보다, 가족들보다 더 자주 만난다고 하십니다. 아마 실제로 가족들도 그렇게 매월 만나는 것이 쉽지 않겠지요. 


정기 모임이 아닌 번개 모임하는 날을 더 좋아하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젊은 회원들 앞에서 말이라도 좀 하려 하면 신경이 많이 쓰이는가 봅니다. 하고픈 말은 분명 많을 텐데 말 많다고 싫어할까 염려했겠지요. 이렇게 번개모임 핑계로 자리를 만들면 소수 인원에다가 상대적으로 동년배들이 모인 자리라 더욱 편안해 하십니다. 번개 모임을 해도 말씀이 별로 없으신 분도 계시지만 유난히 말씀이 많으신 선배도 계십니다. 이분은 말씀을 많이 하셔놓고선,


"오늘도 내가 눈치없이 말 많이 해서 미안하니 저녁 밥값은 내가 낼게요.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라고 하더라만 오늘은 내가 입도 열고 지갑도 열까 하니 너무 뭐라 하지 마소. 집에 가면 93세 노모랑 둘이 생활하니 누구랑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벽보고 사는 느낌이니 이해해 주소. 알았지요. 이렇게라도 말을 하고 집에 가야 그나마 좀 풀리고 살 것도 같으니 이해 바랍니다.~~~"


이 선배님은 젊은 날 정부 관련 대형공사 건설본부장을 역임한 에리트 출신입니다. 그러니 세상사 아는 것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정기 월례회 모임이 되면 젊은 회원 눈치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번개 모임을 하면 편하게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번개 모임을 많이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제가 다른 일이 자꾸 생겨 바쁘더군요. 도시에 있으면 이런 저런 일로 바쁘게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더욱 시골로 들어가 은거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요.


아내 건강 상황이 이런 상태라면 당분간 시골 생활에 대한 저의 생각은 접어야 하겠지요. 당장 제 할 일은 아내를 케어하는 것이니까요. 꿈과 같은 시골 생활은 안 한다고 해서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선배님들은 모임에 오실 때마다 저를 보고 온다는 말을 많이 하십니다. 제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재주'라면 높은 연령의 노후 세대에 대해 살갑게 대하고 그분들의 말씀을 잘 들어주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얼굴에서 환한 웃음이 나올 수 있도록 말할 기회를 충분히 드리지요. 그건 자신있는 일이고 재주라면 재주가 되겠지요. 

"진짜 시골에 가서 살고 싶어요?"는 매년 한두 번씩 듣습니다. 저도 본격적인 노후가 되면서 그 기회가 점점 사라져 가는 느낌이 듭니다. 가끔 시골길을 달리다가 괜찮은 터가 나오면 저기에 어떻게 집을 지어 전원도서관을 지었으면 하는 꿈을 꿉니다. 차박(車泊)할 수 있는 공간을 2천 평 정도 마련하고, 전원 도서관에 숙박도 할 수 있도록 별채도 만들고 말이지요. 전국에서 '책읽기'를 좋아하는 실버세대들이 이곳에 와서 하룻밤 숙박하며 책이야기기와 함께 인근 전원에서 현지 할머니들이 직접 농사지은 채소들로 저녁 식사를 편안히 한 다음에 보름달 밤 시골길 걷기를 비롯한 호숫가 보트 타기, 파전과 막걸리 마시기, 추억 나누기 담소 시간 등등을 할 수 있었으면 하지요. 


이렇게 된다면 시골에 들어가도 은거는커녕 오히려 도시보다 훨씬 바쁘게 생활할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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