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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27. 2023

다른 사람에게 유난히 엄격하고

아파트 동대표자회의에 매월 참석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합니다. 아파트에 73세 되시는 경비원 분이 계시는데 주민들이 이분을 정말 아끼고 사랑합니다. 워낙 오래 근무하셔서 주민들이 펀안해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파트 경비 일에 최선을 다하셔서 신망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 경비실에 앉아 그분과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잠시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면 주민들이 과일, 떡, 음료수, 과자, 빵 등 다양한 먹을 거리를 들고 옵니다. 


아파트가 바닷가로 VIEW가 좋고 공기 맑은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30년 전에 처음 분양받아 오신 분들이 매우 많으십니다. 물론 세월이 그 정도 흘렀으니 연령대는 많이 높아졌지요. 명절 때가 되면 아파트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보다 이 아파트로 돌아오는 사람이 훨씬 많아 주차장이 미어 터집니다. 그러면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인근 학교 주차장을 이용하기도 하지요. 설 추석 명절엔 사람들이 북적대어 명절 분위기 물씬 풍깁니다. 


평소에도 주민들끼리 친하고 정겹게 인사를 나눕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새로 이사를 오는 젊은 부부들도 기존 주민들과 동화되어 살갑게 대합니다. 아파트 분위기가 좋아서 주민들의 표정도 밝고 환합니다. 관리사무 소장을 비롯한 여러 직원들이나 경비원들이 한번 계약하면 좀처럼 나가시지 않습니다. 10년 넘어 근무하는 것이 관례가 되다시피 합니다. 용역회사에 의뢰하여 뽑지 않고 아파트 주민대표자회의에서 직접 면접하여 채용하는데, 아파트 주민들의 성향을 미리 알고 지원하였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용역회사를 통해 채용하면 2년마다 무조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그분들의 애로도 들었습니다. 우리 아파트는 그런 일이 없지요. 본인의 몸이 불편하거나 사정이 생겨 그만둘 경우를 제외하곤 주민들이 경비원을 내보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동대표자희의에 참석하여 회의 진행 사회를 보는데, 유독 대표자 한 분께서 경비원의 연령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더군요.


"우리 아파트 경비원들 정년 이후 촉탁으로 6개월마다 한 번씩 계약하는데, 이것을 언제까지 할 겁니까. 일반 회사에서는 정년이 되면 사정없이 그냥 짤라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뽑습니다. 일 잘 한다 아니다 따지지 말고 우리 아파트에서도 나이가 들면 내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70세가 넘어가면 일을 잘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저는 이번에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65세 정년 적용하고, 촉탁 1년만 아니 2년 정도만 추가 기한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또 그 문제를 들고 나오느냐는 표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중재했습니다. 개인의 의견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연말 회의 때 한번쯤은 고민해보자고 했습니다. 다른 대표자들도 이 자리이에서 논란이 되는 개인 의견은 가급적 제기하지 않고 연말에 다시 생각하는 것 좋다고 동의하셨습니다. 개인 의견이라고 무시하면 ㅗ곤란하기도 하고. 회의 때마다 그 문제를 제기하는 그분도 좀 그렇고 해서 일단 연말까지 논의를 유보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연말에 가도 다시 언급하면 결국 표결해야 합니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신 그분도 알고 보니 70세가 넘은 상태에서 다른 아파트에서 청소 일을 하고 계시더군요.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70세가 넘어 일하고 있으면서 유독 우리 아파트 경비원들 나이를 입에 올리며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하니 보기 좋지 않았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개인적으로 대표자들 몇 분에게 전화를 돌렸습니다. 연말에 가면 이 문제를 제기할 텐데 어떤 생각이시냐고 말입니다. 한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 잘 하고 있는 사람을 나이가 많다고 인정도 없이 짤라야 한다는 그 대표님이 참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분 자기도 70 넘은 나이에 다른 아파트에서 일하면서 왜 그리 모질게 말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전 절대 반대입니다. 저렇게 일 잘하는 경비원이 어디 있던가요? 사람들에게 정말 싹싹하고 친절하잖아요. 특히 어린 아이를 보면 꼭 자기 손주처럼 돌봐주시는 것이 정말 고마운 사람인데 어딜 내 보네요. 나이가 적은 사람이라고 일 안 하면 어쩔 거예요? 전 반대합니다." 


그 외 몇 분도 비슷한 처지로 답하더군요. 연말에 가면 표결할 것 같은데 주민들의 신망을 온몸에 받고 있는 그 경비원을 내보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더군요. 저도 물론 이렇게 신망이 큰 경비원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내보내는 것은 절대 반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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