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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단 Aug 17. 2016

바다, 하와이

침선수필

밖에서 부드러운 천둥이 울린다.  

웅성웅성, 우르르르, 부글부글, 이런 소리들을 모두 합친 듯한 풍부한 소리가 들려왔다.  늦게까지 잠들어 있다가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아까까지 부드럽게 들리던 그 소리가 갑자기 확 커지더니 내 온몸을 스쳐 지나서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러더니 방안은 파도소리로 꽉 차 버렸다.  커튼이 휘날리지도, 머리카락 한 올 날리지 않았지만 난 바람을 마음껏 느끼고 즐길 수 있었다.  내 눈으로 바다가 들어왔다.  


지도를 펼쳤다.  

하와이에서 가장 큰 섬인 오하우를 둘러싼 해안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몇 가지 유명 관광지의 표시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관광지에 대한 짧은 소개 글들을 읽어 본 뒤 나는 배가 타고 싶어 졌다. 버스를 타고 알라모아나 부두로 갔다.  매어 있는 배들을 왼편에 두고  부둣가를 따라 배마다 차례로 번호가 있다. 아파트 경비실 같은 작은 사무실들이 번호마다 각각 있고 창문 앞에 내건 칠판에는 그날 그 배의 행선지와 시간이 적혀 있다.  하나씩 읽으면서 계속 걸어 내려간다.  열두 번째에서 멈춰 서서 칠판을 읽어본다.  “바다거북과 함께 수영을, 점심 제공.”이라고 쓰여 있다.  표를 끊었다.  출발시간이 조금 남아 아직 승선이 안 된다고 한다.  그동안 무얼 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배 앞의 부두 가장자리에 바다를 향해 앉았다.  발 밑으로 찰싹거리는 바다에선 찬 바람이 올라오고,  등 뒤의 아스팔트에선 뜨거운 기운이 불어와 몸에 부딪친다.   갑자기 진저리가 쳐져 벌떡 일어났다.


‘뿌우우.’

한 선원이 커다란 소라를 불어 뱃고동 소리를 내고 배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바다로 나가자 엔진을 끄고 돛을 모두 펼치니 곧 바람이 배를 힘차게 떠민다.  돛들이 찢어질 듯 팽팽해지고 배는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구릿빛 상체를 드러낸 선원들은 밧줄을 맸다 풀었다 하면서 맨발로 뛰어다닌다.  십여 년쯤 전에 유행했던 노래가 흘러나온다.  경쾌하다.  키를 잡은 선장의 입담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바닷물이 뿜어져 올라온다.  모두들 난간으로 몰려간다.  커다란 꼬리지느러미가 물속으로 풍덩 들어간다.  고래가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바다 한가운데에 배를 멈춘다.  저 멀리 해안선이 아득하게 가물거린다.  묵직해 보이는 추를 매단 커다란 고무 매트리스가 바다에 던져졌다.  매트리스는 그대로 바다 한가운데에 고정되어 떠있는 작은 섬이 되었다.  배의 난간에서 바다까지 고무 미끄럼틀이 설치되었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승객들은 모두 어린애들이 되었다.  

미끄럼을 타고 바다로 풍덩, 고무 매트리스 섬까지 헤엄쳐가 섬에 상륙하기도 하고 바닷속으로 잠수해 스노클링을 하기도 한다.  이제 선원들도 대부분 바닷속으로 들어가 안전사고에 대비해 대기하고 있다.  바다로 미끄럼질 쳐서 들어갔다.  배에서 내려다볼 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파도가 높다.  물속에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금방 힘들어져서  고무 매트리스 섬에 올라가 누웠다.  바람은 물을 흔들고 그 물에 반짝이며 태양도 흔들린다.  눈을 감았다.  파도에 따라서 몸이 흔들린다.  그냥 그대로 내 맡긴다.   또 환호성이 들려 눈을 뜬다.  커다란 바다거북이다.  바로 옆에서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바다거북과 함께 수영을’은 빈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저렇게 큰 거북이라니.  용기를 내 바닷속으로 잠수한다.  몇 번 자맥질을 한 뒤에야  물속에서 거북을 본다.  유유하게 그러나 빨리 헤엄치고 있는 이 큰 동물을 멀찌감치 놓치고 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거북이 아쉽긴 하지만 따라갈 엄두는 못 낸다.  어찌나 힘이 들던지 고무 섬으로 올라와 말 그대로 뻗어버린다.  다시 배로 돌아갈 힘도 나질 않는데  다른 사람들은 계속 거북을 따라 자맥질을 한다.  그 거북에게 새끼가 딸려 있고 아마 거북이 사라진 그  깊은 곳에 집이 있을 거라고 한다.  몇몇은 그곳까지 따라갈 기세로 큰소리를 낸다.  넓고 푸른 바닷속에 살고 있는 이 짐승은 아마도 달갑지가 않을 것이다.  커다란 배를 끌고 와 바닷속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풍덩풍덩 시끄럽게 구는 사람들이.  새끼를 이끌고서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궁리를 할 것이다. 따뜻한 햇빛이 너무 그리워지면  그때서야 물 위로 나올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와이키키에 나갔다.

하와이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답게 많은 인파로 붐빈다. 겨우 몇 발짝 건너로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다닥다닥 누워있다.  해변에 앉아 있다가 나도 바다거북처럼 사람들이 지겨워졌다.  해변에 있는 영업소로 가서 덮개가 열리는 차를 한대 빌린다.  갈대 돗자리와 책 한 권, 물 한 병을 달랑 싣고서 출발한다. 지도에 나와 있는 해안 도로에 마음을 둔다.  차의 뚜껑을 열고 달린다.  동쪽을 향해 방향을 정하니  오른쪽으로 내내 바다가 따라온다.  콧등과 어깨가 금방 따가워진다.  지도에 나온 유명한 해변들은 그냥 계속해서 지나친다.  해변의 야자나무 사이로 백사장이 나타난다.  햇빛에 반사된 눈부신 모래밭엔 지붕 달린 오렌지색 탑이 홀로 서 있다.  인명 구조원이 한 명 그 안에 앉아 있고 몇몇 커플들만이 이름 없는 해변을 지키고 있다.  야자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는다. 하늘보다도 더 푸른 바다가 흰 거품을 쉴 새 없이 만드는 것을 보며 한참을 앉아 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다.  시간이 갈수록 바다는 그 색이 진해진다.  점점 진해지더니 마침내 검게 된다.  물결에 반사된 하얀 햇빛과 함께, 하얀 백사장과 함께 흑백 사진처럼 보인다.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는다.  눈을 뗄 수도, 깜박거릴 수도 없다.  내 마음으로 바다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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