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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단 Aug 17. 2016

남쪽 창에 거는 비단 발

손바느질로 만든 그림

집을 옮길 때마다 남쪽에 창이 있는 가장 밝은 방을

내 작업실로 정한다.

등을 켜지 않고 자연광 아래서 바느질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집의 남쪽에 정원이 있으면 좋겠지만

남쪽에 길을 면하고 있을 수도 있고 해서

그 남쪽 창에 블라인드는 필수이다.

밝은 창가에 커다란 테이블 몇 개를 붙여 놓고

원단 장을 정리하고

테이블 위에 내가 좋아하는 도구들을 늘어놓고 나면

이제 새 작업실에서 바느질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남쪽 창에는 푸른색 커튼이 제격이라

청색 계통의 비단 조각들로

쌈솔 발을 만들어 걸었다.

'푸른색' 하면 마음에 떠오르는,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이미지를

조각조각 이어서 만들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남쪽 바다에서 온 이미지여서,

그래서 제목은 From the Sea.


여름에 어울리는 푸른 발이지만

대부분의 바느질은 겨울에 스키장에서 했다.

푸른 비단천을 조각으로 잘라

작은 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남편과 아들이 보드를 타는 동안

스키장 카페에 앉아서

붉은 비단실로 조각을 이었다.

완성된 발은 내 남쪽 창에 걸려,

한여름 땡볕을 서늘하게 막아주고

창가에 앉아 바느질하는 동안

나에게 푸른빛을 베풀었다.


해가 잘 드는 창에 걸어두고

두어 해 여름을 함께 지내며

그 서늘했던 푸른빛이 조금씩 조금씩 바래는 걸

함께했다.

매일 창가에 앉아 색색의 비단을 만지는 동안

연한 하늘색으로

붉은 실 바늘땀은 반짝이는 흰색으로

빛이 바래고 색이 빠져갔다.


처음에 만들었던 그 색이 아니어도

그 말끔하고 선명했던 색이 아니어도

해를 받은 앞면과 뒷면의 색이 달라졌어도

싫어지지 않는다.

빛바랜 그 뒷면이 시간과 햇살을 가득 품고 있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억센 볕과 시간들에 퇴색되고 약해지면서

그 꿈같았던 푸른빛이 유연해지는 것,

시간을 쓰면서

햇살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기에

창에 걸린 푸른 발을 바라보면서

슬프게 인정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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