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군이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 중 아무도 못 한 걸 육군 병장 노 병장이 한 세대 전에 해냈구만.
우히히히
1부. 먹이 사슬
2부. 견공
3부. 위기
4부. 진짜 사나이
- 먹이 사슬 -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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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군가? 진짜 사나이?
멍멍멍.
입대 후 15개월 되니 일병 계급장을 떼고 상병을 달아준다. 그러고 나서 병장들이 떼로 우르르 우르르 제대하고 3개월 되니 소대원 36명인가 중에서 내 위로 병 고참은 문 병장과 강 병장 두 명뿐.
'핫핫, 18개월 만에 이제사 군대 복이 따르는군.'
고참 둘을 따로 모신다.
"저 하는 거 마음에 드십니까?"
"잘하고 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쫄따구들을 이끌어도 되겠습니까? 두 분은 제가 알아서 잘 모시겠습니다. 바라는 게 있습니까?"
"그렇게 하자. 몸성히 제대하고 싶을 뿐이다."
"그거야 당연히 그럴 겁니다. 혹시 애들한테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직접 말고 저한테 따로 말해주십시오. 지휘는 한 명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게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말해 주십시오."
"그러지"
"그럼 합의한 겁니다. 저는 두 분 몸성히 제대할 때까지 잘 모십니다. 대신 두 분은 제게 쫄따구를 맡기는 겁니다. 혹 마음에 안 들면 제게 말하고 애들한테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편하고 골치 안 썩고 몸 다칠 일 없으니 좋을 겁니다."
"좋아 그렇게 하자. 노 상병."
구 상병 한 명과 하사 넷 중 둘은 동기다. 동기는 신병 훈련소 때부터 나를 훤히 알고 나의 든든한 지원자다. 짬밥이 많아 나보다 고참인 하사 둘만 따로 부른다.
"내가 나서서 지금까지 문제 있었습니까?"
"없었지."
"그럼 앞으로도 문제없을 겁니다."
하사는 계급이 높아도 계급 대우 못 받고 짬밥이 많아도 고참 대우 못 받는다. 병 고참과 하사는 서로 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긴 말이 필요 없다.
그렇게 쫄따구 전원은 내가 책임지고, 책임지는 만큼 당연히 권리를 갖게 된다.
왕고참 되면 군인다운 군인, 수없이 불렀던 군가처럼 진짜 사나이가 되고 싶었다.
그걸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꼭 하고 싶었던 일이 하나 있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앞에서부터 김 병장, 강 병장, 주인공 (세 번째 군복 입고 사진기 바라보는 이)
왼쪽 주인공, 구 상병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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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해야 할 일은 구타 완전 금지다.
1. 폭력은 살인을 부른다.
철책을 사이에 두고 적과 마주 보는 지오피에선 실탄, 수류탄을 병사에게 지급한다. 침투하는 적을 괴멸하고 방어하라고. 헌데 자신과 전우를 겨누어 총을 갈기고 수류탄을 던진다. 대개 여자 문제나 가정 문제 둘 중 하나다.
구타가 뇌관이 된다.
지오피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산봉우리에서 소대 단위로 생활하며 외출도 면회도 안 되는 고립된 지역이다. 순번이 정해진 휴가는 복무 기간 중 15일씩 세 번이어서 한 번 다녀오면 다음 휴가는 일 년을 기다리는 감옥 같은 곳이다. 중대한 개인 사정이 있으면 긴밀히 상담하고 품어줘도 부족한데 허구한 날 조팬다.
산 꼭대기맞죠?ㅎㅎ. 우에서 네 번째가 주인공. 사랑하는 쫄따구들
소초 막사. 봉우리 하나에 소대 하나씩.
어떤 녀석은 사랑하는 여자가 느닷없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 휴가 전에는 놈팽이가 누구인지, 선을 넘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다. 휴가 가봤자 갈 데까지 간 걸 확인할 뿐이다. 부대로 복귀하면 발가벗은 연놈이 뒹구는 모습이 아른거려 눈깔이 뒤집힌다. 그래도 매일 초소에 이인 일조로 야간 경계근무에 투입되는 건 거를 수 없다. 사정을 말할 기분이 아니고 그럴 만한 상대도 아닌 고참은 밤새 우두커니 보초 서기가 지겨우니까 애인 벌써 얘기한 거 또 하고 또 하라고 시킨다. 안 따르면 기합 주고 그래도 안 하면 매로 족친다.
다른 녀석은 집안이 파산해 풍비박산이라 휴가 나가 봐야 한숨뿐이고 제대해도 희망이 절벽이다. 그래도 서열 중간으로서 소대의 군기를 담당하는 사 인조 네 명의 식기 당번은 개인 사정 구분 없이 사흘이 멀다 하고 집합시켜 조진다. 식기 당번은 그 위 고참이, 그 고참은 또 그 위 고참이 조진다. 굴비 다발, 줄줄이 사탕으로 엮여 있다. 재수 없으면 병장 되어서도 고참이 수두룩해서 제대 전까지 기를 못 편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지는 전우인 줄 알았는데 구타와 구타 속에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철천지 원수가 된다.
'에이 씨팔, 이렇게 살면 뭐하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고 희망이 없는 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소총 세워 턱 밑에 대고 방아쇠 당기면 그나마 양반이다. 때린 놈 겨냥해서 쏴 죽이고 지도 같이 죽으면 성깔 좀 있는 거고, 다 뒤지라고 내무반서 무차별 난사하거나 수류탄 까서 던지는 건 헤까닥 한 거다. 잊을 만하면 예서 탕 자살했다, 제서 탕탕 죽이고서 지도 죽었다는 말이 들린다. 사단 경계인 바로 옆 소초에서는 내무반에 수류탄 까 넣어 쾅 터뜨리고 소총을 자동으로 돌리고 드르륵 갈겨 다섯인가 죽였다. 사나이로 태어나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산다는 군대에서 허망하게 죽는다.
조직적, 일상적, 습관적, 악질적인 구타에 비추면 지오피 모든 소초, 초소마다 총기 사고가 매달 한두 번씩 일어나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이런 상황을 직접 겪었거나 들어서 아는 부모는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루기는커녕 제발 몸만 다치지 않고 집에 돌아오기를 빌고 또 빈다. 자식 군대 보낸 게 자랑 아닌 죄가 된다.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어서 돈 있고 빽 있는 부모는 자식 군대 안 보낸 게 능력이 된다.
2. 폭력은 영혼을 핍박한다.
구타는 육체뿐 아니라 정신을 구타한다. 구타에 굴복했다는 자괴감은 자존감을 능욕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실종되고 오직 채찍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는 서커스의 동물로 전락한다. 동물이 되기 싫어 인간임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육신에 방아쇠를 당기는 순수한 영혼도 있다.
구타는 창군 이래 없어진 적이 없다. 훈련소에 입소하면서부터 조교에게 맞으면서 구타를 몸으로 배우고, 자대 가서 고참한테 터지면서 익히고, 제대하기 전에 받은 만큼 학습한 대로 쫄따구에게 앙갚음한다. 구타의 악순환이다.
군에서 구타로 죽은 자는 수없이 많다. 알려지는 건 빙산의 일각. 철저히 은폐한다. 뇌가 깨지고 피를 쏟아도 병원마저 보내지 않는다. 그러면 드러나니까. 병원에 보내져 죽어도 부모 형제는 구타가 원인이란 걸 알 수 없다. 사인에 구타사란 없으니까. 군 병원도 한통속이니까.
군에선 명령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정당하다면. 명령 불복종은 영창 가고, 전시에는 최고 즉결 처형일 만큼 군법은 엄격하다. 육군 참모총장은 일반 명령 제37호로 구타하지 말라 한다. 그 명령은 수시로 떨어지고 그때마다 바로잡기를 청하여 적어내는 소원수리를 하라고 한다. 그러나 구타가 없어진 적은 없다.
군 수뇌부터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의지는커녕 구타를 악용한다. 진급에 목숨 걸고, 진급엔 사고가 쥐약이니 사고는 철저히 은폐한다. 은폐에는 입막음이, 입막음에는 공포가, 공포에는 구타만 한 게 없으니까. 수없이 반복되는 일반 명령 37호 구타 금지가 씨도 안 먹히는 근원은 직업 군인 진급의 먹이 사슬에 있다. 사슬의 고리를 구타가 단단히 얽어 매고 있는 것이다.
하급자에 대한 구타는 때로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하급자에게 구타, 동료에게 선심으로 조직을 장악하고 위로 대드는 자가 있다. 무자비한 폭력에 길들여진 조직은 당장의 매가 두렵지 나중의 군법은 남의 일이다.
최대 최악은 군 최고 통수권자에 대한 항명, 즉 쿠데타다. 그리곤 국민을 구타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강제 징집해 군에 가두어 패고, 정보기관에 끌고 가 밀실에서 고문하고, 종내는 백주 대낮에 시민에게 무차별 총질해 살상한다. 심지어 어린 학생, 임산부까지.
구타로 지탱하는 군은 명이 서는 군을 이길 수 없다. 명을 세우는 제일의 순서는 구타를 포함하는 모든 폭력의 금지이다. 언어폭력, 성폭력, 동성 폭력...
이러하니 나는 폭력을 극히 혐오한다.
나보다 짬밥 적은 병사들을 다 모아 놓고 명령한다.
"오늘부터 구타 완전 금지다. 군의 명령이자 내 명령이다. 문제가 하나 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덤비는 거다. 구타가 없고 군법은 머니 정당한 명에 불복종하면 힘센 놈, 성질 더러운 놈이 왕 된다. 이건 군대가 아니라 깡패 집단보다도 못한 콩가루 집안에 당나라 군대다. 위계질서가 무너지면 구타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누구든 예외 없이 자연 고참이 되니 쫄따구에게 당하기 싫으면 본인부터 지켜야 한다.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절대 대들지 말라. 위계질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식기 당번 넷을 남으라 해서 다시 당부한다. 넷 중 최고참 한 명을 다시 남으라 하여 신신당부한다. 허나, 구타의 뿌리는 깊었다. 구체적인 행동 강령이 필요했다. 다시 명령한다.
"구타는 은밀히 불러내어 집합을 시켜서 발생하니 집합을 금지한다. 열외 일 명 없이 다수이건 일대일이건 집합 절대 금지다. 누구든 상급자와 하급자 간에 직접 해결은 안 된다. 문제가 있다면 내게 보고하라. 누구든 어기면 그토록 구타를 갈망하니 죽기 직전까지 내가 직접 팬다. 그리고 나와 그놈은 일반 명령 37호 구타 금지를 어겼고 이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니 자진해서 내가 위에 보고한다. 그리고 나란히 영창 간다."
이렇게 최전방 철책 지오피 소대에 구타 전면 금지의 서곡이 울려 퍼졌다.
- 견공 -
예외가 있었다.
내가 단체로 집합을 시켰다. 은밀하게 아니고 공개적으로, 야밤이 아니고 대낮에. 막사 뒤쪽 구 부 능선에 두 사람이 다닐 정도로 좁다란 길이 있다. 산 봉우리를 뒤로 두고 내가 앞에 서고 쫄따구들을 좌로부터 입대 일자 순으로 일렬로 세운다. 에프엠대로 제식 훈련한다.
"차렷. 열중쉬어. 차렷"
제일 쫄따구부터 호명하여 내 앞에 정면으로 세운다.
"최 이병"
"예, 이병 최 이병!"
"앞으로 반 보", "우로 십 보", "좌로 반 보"
메모해 둔 일 중 잘한 건 칭찬하고 과는 지적한다. 간략하게. 주로 상급자에 대한 태도, 언행 등 구타 금지로 인해 무너질 수 있는 위계질서와 관련된 거다.
과가 있다면,
"오른쪽 가슴을 주먹으로 한 대 칠 거다. 가슴에 힘을 준다! 알았나?"
"예!"
"가슴 준비됐나?"
"준비됐습니다!"
"가슴에 힘줘!"
주먹으로 가슴팍을 한 대 세게 친다. 그리고 역순으로 제자리. 모두 다 하는 데 삼십 분 족히 걸린다.
다 끝나고 마지막으로,
"미안하다. 구타 금지, 집합 금지시키고 내가 어겼다. 벌칙이다. 전원 뒤로 돌아!"
뒤로 돌면 탁 트인다. 동쪽이다. 발아래로 축구장 대여섯은 됨직한 평원이 내려다 보인다. 사단 구역이 온통 산악 지대인데 유독 이곳만 너르다. 들판은 관목과 수풀로 무성하고, 들판의 중앙으로 북에서 남으로 시냇물이 흐른다. 일급수에서 볼 수 있는 꺽지가 서식한다. 내를 사이에 두고 두 개 사단이 동서로 나뉘어 있다. 들판 너머로 멀리 이웃 사단의 첫 번째 소초가 자리한 산봉우리가 보인다. 우리 측 초소로 이어지는 소롯길을 따라 바로 우측에 녹슨 철조망이 정강이 높이로 두 줄 쳐져 있다. 위쪽 철조망에는 흰색 바탕에 빨간 페인트로 쓴 미확인 지뢰지대 표지판이 걸려 있어 절대 철조망을 넘으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표지판은 역삼각형의 책 반만 한 크기에 소총 두어 개 간격으로 하나씩 들판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어진다. 들판에서는 잊을 만하면 쾅 또 잊을 만하면 쾅 지뢰가 한 발씩 터진다. 사람 대신 멧돼지나 노루가 밟아서 나는 소리로 이곳이 육이오 전쟁 때 군사와 군량의 주요한 이동로였음을 들려준다. 들판과 내와 산은 북이든 남이든 누구도 타 넘지 못하도록 두 길 반 높이 철책으로 반 동강이가 나있어 이곳이 여전히 민족 분단의 슬픈 현장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눈앞에 펼쳐진 평화의 전경에 일순간 집합임을 잊지 않는 병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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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 내 목소리가 정적을 깬다.
"전방을 향해 노 상병 개새끼다 우렁찬 목소리로 삼 회 발사!"
이게 무슨 상황? 감히 고참에게 개새끼? 아무도 입을 떼지 못한다.
"내가 집합했고 내가 구타했다. 내가 어겼으니 벌칙이다. 전방을 향해 노 상병 개새끼 힘찬 목소리로 삼 회 발사!"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좋아. 끝까지 안 하면 해산은 없다. 누구든 구타하는 놈은 개새끼다. 다시 기회를 주겠다. 전방을 향해 노 상병 개새끼다 우렁찬 목소리로 삼 회 발사!"
한두 녀석이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댄다.
"노 상병 개새끼다."
"뭐야. 다들 중식 굶었나? 왜 이렇게 소리가 작아"
주저주저할 때는 솔선수범이 특효. 내가 시범을 보인다.
있는 대로 악을 써서,
"노 상병 개새끼다! 노 상병 개새끼다! 노 상병 개새끼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하는 거다. 다 함께 노 상병 개새끼다 삼 회 발사!"
몇 녀석이 가세해서 좀 더 크게 외친다.
"노 상병 개새끼다."
"이래서 전방에 산에서 소리가 들리겠나? 더 크게 다 함께 노 상병 개새끼다 삼 회 발사!"
먼저 해 본 녀석은 이제는 자신 있게 크게, 처음 따라한 녀석은 작게,
"노 상병 개새끼다."
"내 목소리보다 작다! 다시!"
이제서야 다들 제대로,
"노 상병 개새끼다!. 노 상병 개새끼다!. 노 상병 개새끼다!"
"더 크게! 전방에 산이 메아리치게 "
"노 상병 개새끼다!. 노 상병 개새끼다!. 노 상병 개새끼다!"
"좋아. 이렇게 하는 거다. 마지막이다. 노상병 개새끼다 삼 회 발사!"
"노 상병 개새끼다!. 노 상병 개새끼다!. 노 상병 개새끼다!"
"아주 마음에 든다. 해산!"
이렇게 나는 개새끼가 되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다음 달에는 이 주에 한 번, 다음 달부터는 달에 한 번 개새끼가 되었다. 몇 달 지나니 가슴팍을 더 이상 때릴 일이 없어졌다. 반년 후 더 이상 집합도 필요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를 마지막으로 소대에서 구타가 완전히 사라졌다. 당연히 병사들 간에 위계질서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 위기 -
신참 소대장이 문제였다. 소대장은 훈련을 마치고 갓 부임했다. 게다가 새로 생긴 학사장교 1기생인가다. 대학 4년을 마치면 달아 주는 소위라 ROTC처럼 사전에 군 관련 정보가 없다.
나는 위로 두 명 고참이 제대하고 병장으로 진급해 서열 1위로 실제 왕고참이 되었다. 임무는 전에 경계 근무에서 상황병으로 바뀌었다. 상황병은 소초 막사 내에 반 평 크기 상황실에서 근무한다. 딸딸이라고 하는 군대 전화기로 상급 부대의 명령을 하달받아 소대장, 선임하사에게 전달하고, 경계 근무 나가는 병사들에게 실탄, 수류탄, 크레모아 지급, 회수하고 탄약고를 관리한다.
전임 소대장과 선임 하사는 구타 금지를 눈 감아 주는 것으로 호응했다. 기실 호응이랄 거도 없다. 구타가 지휘관이 보는 데서 벌어지는 건 아니니까. 구타 금지면 총기 사고의 위험이 훨씬 덜하니까. 지휘관도 가장 바라는 게 총기 사고가 없는 거니까. 그 소대장이 제대하고 신참 소대장이 부임했다. 소대장은 장교 훈련소에서 배웠는가 군기를 잡는다고 하사 넷은 빼고 병사 전원을 소초상황실 창 바로 옆 공터에 집합시켰다. 한 명씩 엎드려뻗쳐하고 빠따 중 가장 단단하고 묵직한 야전 침대용 버팀목으로 다섯 대씩 내리쳤다. 그리곤 상황실로 와서 나를 찾는다.
상황실에서 근무 중인 주인공. 창 귀퉁이 보이죠? 바로 밖이 구타 장소.
"야, 노 병장. 넌 왜 안 나와?"
"상황병으로 근무 중입니다.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책임지실 겁니까?"
"이 자식이 나오라면 나오지 무슨 말이 많아. 나와."
난 소대장과 비슷한 나이여서 그의 자식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육군 병장 노 병장이다. 병장은 나이롱뽕으로 단 게 아니다. 꼬박 2년 하루하루를 맞고 또 맞고 또 맞으며 단 병장 계급이다. 집합 장소가 상황실 바로 옆이라 막사 출입문만 열어 두면 전화벨 소리를 들을 수는 있다. 굳이 따지자면 근무지 이탈은 아니다.
나가니 이번엔 엎드려뻗치란다.
"소대장님, 방금 소대원들 구타한 거 아십니까? 이젠 저까지 빠따 치려는 겁니까?"
"잔말 말고 엎드려 임마."
임마는 이놈아의 줄임말. 난 놈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육군 병장 노 병장이다. 삼시 세끼 짬밥을 2,000번 이상 먹으며 참고 또 참고 또 참아야 달아 주는 계급이다.
허나, 말이 안 통한다. 설마 나까지 치랴? 아직은 기합인지 구타인지 모르는 명령이니 일단 엎드린다. 바로 허벅다리 뒷부분에서 전기가 번쩍.
뜨아아악.
날 빠따 치다니, 것도 왕고참을. 이럴 수는 없다. 옛날 군대도 왕고참은 안 건드린다. 것도 쫄따구들 전부 다 보는 앞에서, 것도 엎드려뻗쳐 놓고, 것도 갓 부임한 신참 소위가, 것도 임무 수행 중인 상황병을 끌어내서, 것도 제일 아픈 허벅다리 뒤쪽을. 빵빵한 엉덩이 살 겨냥해야지 어딜 치는 거야. 때릴 줄 모르니 잘못하면 허리를 치겠군. 무엇보다도 너무 아프다. 맞아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상병 단 이후 처음이니 거의 일 년 만이다. 이등병 때 병장 넷에게 집단 폭행당해서 후방 병원까지 구급차로 실려간 적도 있을 정도여서 매에는 이골이 났지만 오랜만이라 그런가 아파도 너무 아프다.
벌떡 일어서며,
"에이 씨팔, 왜 때려. 때려도 되는 겁니까? 좋습니다. 나도 오늘부터 다시 애들 팰랍니다. 그래도 되는 거죠? 누군 팰 줄 몰라서 안 패는 줄 압니까? 내가 맞은 거 다 참고 겨우 구타 없는 소대 만들어 놨더니 소대원 다 모아 놓고 한꺼번에 패는 겁니까. 나도 똑같이 따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상황실로 냅다 들어가 버렸다. 지난날 군에 온 날부터 수없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었던 구타의 악몽이 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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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때리는 게 아니다.
주먹과 단단한 몽둥이로 얼굴뿐 아니라 대갈통을 수십 번 집중 난타해 온통 퉁퉁 부풀어 올라 머리 크기가 두 배로 커져 호빵맨과 똑같이 변신한다. 사회에서 멀쩡한 청년이 신병 교육대에서 조교에게 찍혀서 고문관 되는 일은 흔하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걸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고문관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고문관이 공포 분위기 조성용으로 이리 맞는다. 주먹을 날리다 쓰러지면 군홧발로 머리, 배를 사정없이 걷어찬다. 필요하면 집단으로.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이는 이리 죽도록 맞는다.
단체로 집합시켜 엉덩이 빠따를 치다 허리를 내리쳐 척추가 어긋난다.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치다 귀뽕새기에 맞아 고막이 터진다. 때리는 방법을 모르는 고참이거나 맞다가 아파서 피하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다. 추운 겨울 칠흑같이 어두운 야밤에 부동자세로 일렬로 줄 세우고 주먹을 휘두른다.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고 앞니가 정통으로 맞으면 똑 부러지기도 한다. 병사라면 집합을 피할 길은 없다.
소대가 단체로 한여름 뙤약볕에 십 키로 구보하다 누구라도 한 명 처지면 소대장은 낙오한다며 소총 개머리판으로 가슴팍을 찍는다. 그게 두려워 이를 악물고 참고 뛰다가 입에 거품을 물고 실신한다. 체력이 약하거나 병약한 이가 그러하다.
심지어 때리지 않고 때린다. 훈련소 마치고 처음 자대 가면 첫 한 달은 일절 때리지 않는다. 일도 안 시키고 이상한 교육에 치중한다. 첫 교육은 암기다. 손바닥만 한 쪽지를 준다. 고참은 예수와 동기 동창이고 성모 마리아의 기둥서방이며 석가모니와 동문수학했고 마호메트보다 한 끗발 높으며 공자와 어쩌구 누구와 저쩌구 깨알같이 쓰여 있고 제법 길다. 달달 외우라 한다. 장난이 아니다. 일주일 세끼 밥 꼬박 다 먹고 불침번도 경계 근무도 안 서고 이거만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일과 중 무엇이든 궁금해서 왜요?라고 되물으면 고참은 왜요는 일본 담요가 왜요란다. 군대는 까다라고. 물을 때는 까, 답할 때는 다로 끝내야 한다고 점잖게 타이른다. 석가모니와 동기 동창으로 잘못 외든 일본 담요든 정작 두들겨 맞은 건 내 바로 위 군번이다. 교육을 잘못시켰다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고의 병법이듯 때리지 않고 구타에 길들이기야말로 최고의 구타 기법이다. 나로 인해 나와 가장 가까운 이가 구타당하고, 그와 나에게 나에 대한 구타에 정당한 명분을 부여한다. 이렇게 자대 가면 초장부터 심리적으로 구타에 종속된다. 이러하니 구타의 경우와 방법과 악질성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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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쩌나.
신참 소대장 한 명 때문에 구타 완전 금지의 공든 탑이 무너졌다. 그렇다고 소대장 따라서 구타의 악령을 되살릴 수는 없다. 밤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취사장에 가서 취사병에게 이른다.
"오늘 아침부터 소대장 밥은 반만 담아라. 구타하는 자에게 반도 아깝다."
최전방은 한 개 소대가 수 백 미터 산봉우리 위에 막사를 짓고 생활한다. 막사 부근에 취사장을 두어 소대 단위로 밥하고 국과 반찬을 조리해서 먹는다. 부식 트럭은 주에 한 번, 피엑스 트럭은 달에 한 번 온다. 산 저 아래 계곡에 난 길에 차를 세운다. 그전에 병사 서너 명이 차출되어 산을 내려가 차를 기다린다. 트럭이 도착하면 먹거리를 내리고 등짐 져서 땀 뻘뻘 흘리며 몇 번이고 쉬어 가며 힘겹게 산 꼭대기까지 올린다. 소대장이 배 고프면 직접 등짐 지고 올라와 직접 밥 해 먹으면 된다.
소초 막사에서 근처 취사장 가는 길. 김 일병 (식기 당번 4인 중 고참)과 오른쪽 주인공
산 반대편 아래 끝에서 쌀가마니를 하나씩 어깨에 메고 오른다. 높이 같고 경사 비슷.
식기 당번 (난닝구 넷). 거드는 쫄따구 셋. 그리고 주인공 (껴안긴 이).
연이어 식기 당번 넷을 따로 불러서 지시한다.
"전 소대원은 오늘부터 소대장이 초소 순찰 시 소대장에게 경례를 하지 마라. 구타하는 자에게 존경은 없다."
소대장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는 경계 초소를 순찰하는 거고 병사는 소대장이 순찰 시 경례하도록 되어 있다. 소대장이 경례받고 싶으면 경례하라고 명령할 수는 있다.
일주일 후 소대장이 나를 보잔다.
소초 막사 내부에 사람 둘이 스쳐 지나갈 정도 통로를 사이에 두고 소대장실과 상황실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엎어지면이 아니라 반쯤 엎어지다 말고 코 닿을 거리다. 그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지난 일주일 소대장은 많은 생각이 있었으리라.
감히 소대장에게 대들다니. 구타 금지야 일반 명령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밥을 반으로 줄여? 경례도 못하게? 군법회의? 자신도 구타 금지 일반 명령 37호 위반으로 군법회의? 영창 갔다 복귀하면? 도로 원점? 총으로 쏴 죽여? 거꾸로 녀석이 총으로 쏘는 건 아닐까? 지휘관으로서 무능한 걸까? 그나저나 배가 너무 고프다. 피엑스 차는 언제 오지? 취사병을 불러서 밥을 더 달라고 할까? 그럼 밥 더 줄까? 경례하라고 명령할까? 그럼 경례할까?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을 거다.
나 또한 소대장과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총과 관련해서 나는 소대장을 쏠 생각이 추호도 없다. 허나 초병은 다르다. 달 없는 그믐날에 별빛마저 구름에 가린 밤이면 일 미터 눈앞에 누가 서 있어도 모른다. 그래서 암구호는 필수. 순찰할 때 초병의 암구호에 답하지 못하면 쏴도 된다. 즉시 사살이 적과 마주친 초병의 임무다. 암구호를 대더라도 나쁜 마음먹으면 쏘고 나서 암구호를 안 대서 간첩인 줄 알고 쏜 거라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그게 겁나서 간첩에게 뻔히 노출되어 금기인데도 후라쉬를 켠 채 순찰 도는 간부도 있다. 걱정되는 건 구타 금지가 완전 정착되어 이제는 구타가 부당하다는 거, 매 맞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알게 된 쫄따구들이다. 끔찍한 구타 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할 리는 없을 터, 누가 언제 방아쇠를 당길지 아무도 모른다. 하나가 없어지면 전체가 평화로운 대의명분까지 생겼다. 방금 지오피에 부임한 신참 소대장이 이런 예민한 부분까지 알 턱이 없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다만 소대장과 달리 나는 구타 금지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 여차하면 영창 갈 각오였다. 마음 한 켠에선 굳이 이렇게까지 밀어붙여야 하나, 병 서열 일위로서 편하게 왕고참 대우받다 제대하면 그만인데, 소대장과 사바사바 적당히 지내면 그만인데, 남들은 다 그러는데. 잠깐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다. 아니다. 흔들리면 안 된다. 구타의 폐해에 대해 너무 잘 알지 않나. 자살, 살상, 은폐, 세습, 먹이 사슬.... 여기서 밀리면 구타 즉시 부활, 아니 이미 부활했다. 아니다 절대 안 된다. 군 생활이 한참 남은 쫄따구들,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해서 삼 년을 꼬박 버텨야 하는 소대장을 위해서도 이건 아니다.
"왜 부르는 겁니까? 또 패게요?"
"할 말이 있다. 내 방으로 가자."
함께 소대장실에 들어간다. 소대장은 커피를 타서 내놓는다. 저번처럼 험악한 분위기로 갈 거는 아니다.
"무슨 일입니까?"
"화해하고 싶다. 노 병장과 소대원들과 잘 지내고 싶다."
"저도 소대원도 소대장님과 잘 지내고 싶습니다. 진심입니까?"
"그렇다."
"구타는요?"
"앞으로 구타는 없다."
"진심입니까?"
"진심이다."
"알겠습니다."
지휘관과 병 왕고참 사이에 배식량이니 경례니 뭐니 구차하게 이런 말은 필요 없다. 소대 현안과 개인사로 대화를 나누며 뜨악했던 관계를 대한의 남아답게 청산한다.
소대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취사병과 식기 당번에게 원상복구를 지시했다. 소대를 억누르던 긴장은 즉시 소멸되고 소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활기가 넘쳤다.
악의 근원인 구타를 때려잡을 수만 있다면 못 할 건 없다.
- 진짜 사나이 -
이렇게 반드시 해야 할 일 하나가 구타 완전 금지였다면 꼭 하고 싶은 일 하나는 즐거운 내무반을 만드는 거였다.
최전방은 지오피 철책과 후방 지역 훼바를 일 년 단위로 교대 근무한다. 훼바에서는 일과가 끝나면 석식을 먹고 담배 한 대 피고 나면 7시다. 점호 준비를 시작하는 9시까지 두 시간은 자유 시간이다. 정확히는 자유롭게 군기를 잡는 시간이다. 점호가 끝나고 10시 취침 후 11시경 잠을 깨워 집합을 시키기도 하지만 주로 군기 잡는 시간은 석식 이후다. 매일은 아니나 집합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할 정도. 하지만 자유 시간은 군기 잡는 시간이 결코 아니다. 말 그대로 각자 자유로이 보내는 시간. 허나 내무반에서 자유로이 지내는 문화가 전무했다. 놀아 봐야 놀 줄 알고 쉬어 봐야 시간을 보낼 줄 아는 법인데 입대 후 언제 마음 편히 놀거나 쉰 기억이 있나?
전역자가 있으면 환송 회식을 꼭 한다. 술이 있는 회식은 금요일 밤이다. 신던 군화에 소주 부어 돌아가며 먹이고 침상이 부서져라 몸 솟구쳐 내려오며 두 발로 쾅쾅 발 구르며 고함치고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 다음 날 어김없이 망가진 침상을 못질, 톱질해 수리할 정도. 군화주 안 마시고 침상 안 때려 부수면 군기 빠졌다고 한다. 회식 끝나면 그 바로 윗 군번은 반드시 집합당한다. 일요일에는 축구. 하는 자만 맨날 하고 그마저 하기 싫어도 아파도 뛰어야 하니 고역이다. 응원조를 차출하니 억지로 사역이다. 중대 대 중대는 게임 아닌 전투고 대대 대표전은 전쟁이다. 축구하다 무릎에 십자 인대 파열된 자가 어디 한둘이던가. 다 단체로 하는 거다.
지오피에서 처음 자유 시간 두 시간 줘 보니 개인적으로 편지 쓰기 정도야 하지만 매일 두 시간 편지만 쓸 수는 없는 노릇.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청히 있거나, 연실 담배나 피워 대거나, 동기끼리만 모여서 소곤대거나 다들 귀한 시간을 허비한다.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내린다. 매일 오후 기상 후 두 시간은 무조건 전원 다 둘 중 하나 선택하라.
1. 바둑이나 장기를 두라. 모르면 배워라.
2. 독서하라.
허나 이 또한 쉽지 않았다. 고양이 목에 누가 먼저 방울을 달 거냐 서로 눈치를 본다.
그래, 이것도 솔선수범하자.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대 말이 있다.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안 되는 걸 어떻게 되게 하나. 그러니 군화주 먹이고 구타하고 쿠데타 일으키는 거다. 솔선수범은 이와 확연히 다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에서 공격 앞으로 명령하고 안 따르는 자에게 뒤에서 권총 쏴대는 게 아니고, 소대장이 소총 들고 먼저 앞장서서 공격 앞으로 외치는 게 솔선수범이다. 전시가 아니니 그 정도는 안 되지만 견공도 되어 봤고, 영창 갈 각오에다가 총 맞을 생각까지 했는데 놀고 쉬는 거야 누워서 떡 먹기지.
소대 막내 최 이병이 바둑 삼 급. 다들 보라고 매일 자유 시간에 일부러 막내와 바둑을 두었다. 헌데 며칠 후 최 이병이 쭈볏쭈볏 바둑 두기를 꺼린다. 캐물으니 주저주저하면서 식기 당번한테 혼났단다. 니가 지금 바둑 둘 군번이냐고.
즉시 식기 당번 넷을 불렀다. 다시 한번 자유 시간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 그리고 명령한다.
"너희들부터 솔선수범해서 바둑 둬라. 그래야 따라 한다."
"바둑 둘 줄 모릅니다"
넷 다 이구동성이다.
"반항하는 거냐?"
"정말 둘 줄 모릅니다."
"잘 됐네 그럼. 최 이병한테 배우면 되겠네. 뭐든 배워두면 쓸 데가 있다."
"예, 알겠습니다."
둘은 바둑을 배우기로 한다.
"저는 장기 둘 줄 아니 장기로 하겠습니다"
둘은 장기를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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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또 있었다. 소대에 바둑판이 한 개뿐. 휴가자 복귀 시 떡 한 시루 해오는 대신에 앞뒤로 장기판 겸용 바둑판을 사 오라고 했다. 떡보다 돈도 덜 든다. 두 달만에 열 개로 늘었다.
막내 최 이병은 바둑 사범이 되었고 자유 시간에는 최고수로서 학교 선생님처럼 뒷짐 지고 다녔다.
7급인 선임 하사는 군 생활 이십여 년에 이등병, 것도 막내와 둔다는 게 체면 깎이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한동안 꺼렸다. 하지만 바둑에 계급장 달렸나, 어디 가면 고수가 쉽게 두어 주나, 최 이병에게 한 판만 두자고 조르는 처지가 되었다.
바둑을 모르는 소대장도 낙 없는 건 마찬가지. 한동안 소대원들 바둑을 옆에서 지켜보더니 어느 날 슬그머니 바둑 책을 사 가지고 배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 소대는 매일이 즐거운 내무반이 되었다.
나도 득 봤다. 내 바둑 수준은 집 많으면 이긴다, 번갈아 둔다, 축, 패 등 기본 정도. 막내가 내게 아홉 점 깔으란다. 연속으로 두 판 이기면 치수 조정, 즉 한 점 줄이거나 더 깔거나. 두어 보니 역시 급이 다르다.
그래도 매일 서너 판 두니 9, 8, 7, 6, 5, 4점에서 3점까지 금새 내려간다. 어렵지 않다. 이전 판에서 상수에게 당한 수를 내가 먼저 두면 된다. 두 점 까니 엎치락뒤치락 지는 때가 많다. 제대를 앞두고 소대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 선임 하사가 처음으로 한 판 두잔다. 오잉, 웬 일?
"왜요? 바둑 수 줄어든다고 그렇게 빼시더만요."
내일이면 여기를 완전히 떠나고 일주일 후면 사회인이니 연습 삼아 까다를 버리고 왜요, 요를 연습 중이다.
"오늘이 노 병장과 마지막 날이니 기념으로 딱 한 판만 둬 준다.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보고도 싶고. 세 점 깔아."
"예? 세 점이요? 최 삼 급하고 세 점 깔고 이겼어요. 그러니 제가 6급은 되는 겁니다. 선임 하사님은 7급 아닙니까? 두 점 까시는 건 그러니까 그냥 맞두시죠. 대신 선임 하사님이 흑 잡으세요."
"그럼 안 둬."
"알았어요. 제가 흑 잡을 테니 맞두지요."
"세 점 안 깔면 안 둔다니까."
"에이, 그건 심하구요. 두 점 깔게요. 대신 누구든 두 판 연속으로 이기면 한 점씩 조정하는 겁니다."
이렇게 시작한 바둑을 두 판 연속으로 이긴다. 이젠 맞수. 딱 한 판만 하자던 그가 열 받아서 오히려 더 두자고 안달이다. 내가 다시 두 판을 연달아 이기니 선임 하사가 흑을 쥐어야 한다. 분해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승패에 집착하니 내가 다시 두 판 연달아 승.
"두 점 까시죠."
"에이, 안 둬."
"왜요? 한 판은 이기셔야죠?"
"관둬."
선임 하사는 깔고 두는 건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그만두었다. 속으로 한 판 져줄 걸 살짝 후회. 그래도 이게 어딘가? 군대 와서 바둑이 6급으로 오르다니.
이렇게 구타 완전 금지와 즐거운 내무반이 정착되면서 소대원은 잔뜩 화난 얼굴, 겁먹어 꼬랑지 감춘 똥개처럼 비굴한 몸짓을 하나둘 버리기 시작했다. 활짝 웃으며 보무당당 어깨를 폈고 자신의 개성을 드러냈다. 쫄따구들은 감히 왕고참인 내게도 말을 건넸다. 어떤 녀석은 겁대가리 상실하고 툭하면 달려들어 나를 껴안으며 뜨거운 가슴으로 정을 나누어 주었다. 겨우내 땡땡 언 얼음을 녹이는 봄바람이 전체 병사들뿐만 아니라 하사, 선임 하사, 소대장까지 감싸 안았다. 우리 소대는 화기애애하고 활기찬 소대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내가 군에서 남들과 다르게 한 일이 하나 있다면 구타 없는 소대를 만들었다는 거다.
창군 이래 최초일 거다.
내가 군에서 남들과 다르게 보람 있는 일이 하나 있다면 매일이 즐거운 내무반을 만들었다는 거다.
전군 유일할 거다.
이렇게 육군 병장 노 병장과 소대원은 이등병부터 소대장까지 전원이 진짜 사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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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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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활짝 웃는 소대원들. 우측 앞 선임하사. 양손 든 주인공. 센터 모자 쓴 이 소대장.
크리스마스 회식 노래하는 주인공. 아마 장밋빛 스카프. 가짜 아닌 진짜 소총 M16.
후기
내 아래로 열외 일 명 없이 집합!
쫄따구들아, 동기들아, 그때 그 시절 청춘이 그립구나.
벌써 환갑이 가깝다. 36년 만에 얼굴 함 보자.
가매기 삼거리로 오시게.
세대 통역
에프엠대로 : 정해진 대로 엄격하게.
빠따를 치다 : 야구 배트처럼 기다란 방망이로 사람을 엎드려 놓고 엉덩이를 내리치다.
식기 당번 : 소대에서 매 끼니 배식과 식기 세척을 담당한다. 서열 중간쯤인 상병이나 일병 네 명이 짬밥 순으로 구성. 고참의 지시를 받아 쫄따구 군기를 잡는 역할을 수행한다. 선택 아닌 필수 코스로서 누구나 거쳐야 한다. 열외가 간혹 있다. 심한 고문관이거나 왕따다. 넷은 소대의 허리다.
단,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지 하나도 기억할 필요 없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고 행동을 규범 하니까. 악한 이가 악한 말하고 악한 말하면 악한 사람 되고, 선한 이는 선한 말하고 선한 말하면 선한 사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