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농꾼은 능숙했어. 모종판을 물통에 담갔어. 장방형 방석 크기. 뿌리를 넉넉히 적셨어. 아가들 빼곡. 100개? 옆에 반쯤 빈 판. 8×16=128개.실계곡 옆으로 열댓 줄 밭고랑. 좌로 가지런하다가 우로 갈수록 배가 불렀어. 전날 농군이 서울 동문회 일 보러 간 사이 농부가 도와준다고 트랙터로 갈아놓았다고. 매병이라도 빚은 듯, 난의 잎이라도 친 듯 곡선은 이웃의 정 담뿍 담아 부드러웠지. 농꾼은 접은 장우산 닮은 모종기 들고, 내게 종묘판을 들라고. 양손으로 아래를 받치니까 이렇게 라며 시범. 한 손으로 끝을 잡아 늘어뜨리고 다른 손으로 모종 하나를 뽑아 모종기에 위로 넣으라고. 모종기를 수직으로 땅에 쿡 찌르고 나는 같은 배 128 쌍둥이 중 젤 구석 아가 하나를 뽑아 둥근 입으로 넣었어. 두 번째 삶의 출발점으로 쑥 내려가면 농꾼은 모종기를 쑥 뽑고는 잘 살아보라며 북을 돋아 주었어. 50센티 가량 띄워 하나씩. 금새 익숙. 아무것 아닌 일. 헌데 300여 평 고랑을 다 하자면 지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가리파재 기담. 아부지, 엄마 초보 농사 시절 이야기. 시베리아 은사시나무가 쑥갓 된 사연 1부로 고랑 둘. 황씨 아저씨 2부. 반전이 있었기에 중간중간 질문 넣어서 재미를 더하며 시간을 늘렸어. 고랑이 한참 남았거든. 이래서 셋쯤 더.
농사는 몰라도 농꾼이 일머리가 있다는 건 시작부터 알았어. 왼쪽 젤 길다란 고랑부터. 마지막 젤 오른쪽 배 불뚝 부분 순으로. 중간은 원래 논이라서 모종기가 잘 안 꽂히니까 나중 미루고. 두어 시간. 어느덧 한여름의 해 뜨고 기온 오르니 조금 지쳐서 엄살 좀 부린 거. 남은 건 내일 90세 아부지, 87세 어무이와 하겠다고. 부모님, 형제 이야기. 작업 끝. 밭 옆에 붙은 실계곡에서 발, 신발, 얼굴 씻고. 초짜는 농꾼 친구 덕에 재미나게 들깨를 심어보는 행운. 농사 문외한. 어릴적 어무이 텃밭에 호미로 구멍 파면 꼬맹이 호박씨 떨군 게 전부.
반년 세 번째 만남. 두 번은 서울 올라가 보고, 이번은 전원 사는 모습 보고 싶어서 100키로 차 몰고 드라이브. 원주ㅡ화천. 전날 오후 4시에 만나 다음날 새벽 2시 넘어까지 이야기 꽃 만발. 친구의 지난 세월이 궁금했고 나 산 스토리 끼워넣고. 받거니 주거니. 새벽 1에 누워 자려다가 일어나 또 이야기. 다시 잠자리에서 불 끄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런두런. 그러다 잠이 들었어.
42년전 춘천 103보충대에서 처음 만났어. 12사단 신병훈련소 5주. 2년여 지나 둘 다 최전방 철책 상황병. 딸딸이 전화기로 목소리만 들었어. 복학해 3년만에 얼굴 다시 보았어. 학과 달라서 지나다 잠시 대화만. 녀석은 늘 말수가 적었어. 속이 깊다는 걸 느꼈고 고뇌가 있는 거 같았어. 대학 졸업, 결혼, 생존경쟁의 밀림에서 각자 뜻을 이루기 위해 달렸지. 올해 2월 다시 만났어. 같은 사건으로 군에 납치된 넷이 모였어. 강산이 몇 번 변하도록 넷은서로 연락이 끊겼지. 반가움을 뛰어넘은 감정의 쓰나미. 아픈 청춘의 기억이 시나브로발효되었고일순 터져버린 거. 그날 알았어. 넷은 인연 아나라 운명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