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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 삼거리에서 Jun 06. 2024

가리파재 기담

25화. 응답하라 1968-직업 편


가리파재 남쪽 사면은 혼령이 산 자를 유혹하였다. 사고로 매해 두셋이 죽어 나갔다. 한 해는 황씨 아저씨 자살. 비극은 영월 방면에서 시멘트를 트럭으로 나르면서 시작되었다.



버스



처음 갔을 땐 차부라 했다. 차가 모였다 해서. 택시가 생기면서 버스부라 바꿔 불렀다. 원주 버스부는 우산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고급지게 영어를 사용한다. 시외버스터미날. 이웃해 최초 고속버스터미날. 버스부는 시를 관통하는 봉천의 첫 번째 다리인 쌍다리 서쪽이었다. 인도와 차도를 못 넘게 구분하여 쌍으로 놓았다. 엄마, 아부지는 버스부에서 처음 먹는 장사를 시작했다. 닭 치는 양계 몇 해에 빚만 잔뜩. 아무리 애써도 닭 돌림병을 피하지 못 했다. 두 번 떼죽음. 돼지치기에 이어 생물이란 돈이 되기는커녕 가산 탕진의 지름길이란 걸 알게 된 부모님은 여덟 식구의 명줄을 걸어야 했다. 마침 버스부에 가게 매물. 빚을 더 내었고 매입. 시균이 국민학교 4학년. 1971년.


쌍다리 버스부는 시외버스만 따로 모았다. 시내를 남북으로 단하는 A, B, C 도로 셋. 그중 B도로와 C도로 남쪽 각 끝단 사이에 진작 터를 잡았다. 버스는 앞줄로 넉 대가 나란히 B도로와 C도로를 잇는 남측 도로를 접한다. 그쪽에서 부르릉 출발. 그 뒤로 버스 서너 줄 공간. 돌아오는 버스는 그 뒤쪽으로 C도로에서 진입했고 그쯤에 퍼내는 공용 변소 나란히 몇. 반대편은 B도로 접한 매표소 건물. 버스 대기하는 지붕 아래로 표지판. 춘천행, 충주ㆍ제천행, 여주ㆍ서울행, 그리고 끝 강릉행. 시의 북남서동으로 한 대씩. 승객 붐비는 순서. 직행과 완행. 춘천 직행은 횡성, 홍천 두 곳만 정차. 완행은 그 중간 중간 사람 모여 사는 마을이면 선다. 춘천 직행이라도 산마다 구비구비라 세 시간여. 완행은 곳마다 서고 기다리느라 대중 없어. 가게는 춘천 버스 바로 옆 두 발 거리. 버스로 오르는 세멘 디딤돌이 사이를 벌렸을 뿐. 버스 창에서 저기요 김밥 한 줄요 부르면 가게에서 능히 듣는다. 우동, 오뎅, 삶은 계란, 그리고 밀가루 반죽 치대어 하룻밤 숙성 후 팥앙꼬 듬뿍 찐빵. 잠시 버스 대기에 요기하기 편리했고, 만들면 금새 팔려 신선하다. 1974년 중2. 난생처음 시 탈출. 말로만 듣던 서울 가고 싶었다. 이유는 없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원주를 단 한 번 벗어나지 않은 것이 잘못으로 느꼈다. 버스를 탄다. 완행이라 느리다. 세 시간여. 가다 서다 무한 반복. 여주 버스부서 다 내린다. 갈아타야 하는 거. 서울까지 돈 부족. 밥 값도 없다. 점심 굶고 할 수 없이 원주 완행. 싸니까. 종일 여섯 시간을 차에 서서 흔들대니 녹초. 가매기 삼거리 집에서 햇볕에 바지 내리고 거웃 몇 가닥 처음 발견한 게 중2였다. 다음해 펌프장에서 목욕하다 엄마가 갑자기 나무 문짝 열어 화들짝. 무성한 숲으로 변한 몸을 들켰다. 목소리는 굵되 갈라졌다. 사춘기의 소심한 일탈이었던 거.


가게는 대략 정방형 버스부 서쪽 끝 모퉁이. 반대편 동편은 1층 순대국밥, 2층 금강다방. 시간이 넉넉한 승객을 위한 시설. 가게는 승객 왕래가 가장 빈번한 춘천행 버스 바로 옆이자 매표소 입구이자 인도를 접했다. 버스부 최고의 목자리. 가건물이었다. 공그리 쳐서 제대로 널직 지은 슬리브 건물 하나. 안으로 매표소, 밖으로 매점 하나. 정식 건물의 도로쪽으로 공간이 조금 남았다. 건물 벽에 붙여서 브로꾸 쌓아 스레트 지붕 올렸다. 두 평 가량. 벽에 붙여서 걸터앉게끔 직사각, 허벅지 높이로 부로꾸로 쌓고 시멘트 미장. 그리고 비닐 장판을 덮었다. 끝을 앞과 옆 끝에서 굽혀 바닥까지 늘어뜨렸다. 장마면 빗물 콸콸. 지붕과 건물 사이 틈을 타고서 벽으로. 다시 장판 밑으로. 비 쏟으면 장판이 부풀어 꿀렁꿀렁. 막내는 갓난아기로 빗물을 포대기 삼아 장사 짬짬이 엄마 젖을 물었다. 1969년 생. 장남인 나와 여덟 해 차이.


가게 우측으로, 매표소 건물에 붙여서 인도에 구두 수선 한 칸. 높이도 면적도 가게의 반이라서 수선공은 앉아서 구두 닦거나 밑창 갈거나. 막내가 걸었을 때 구두 가게서 수선용 송곳에 손가락 끝 살을 꿰었다. 덜렁 입 벌린 구두창을 뚫도록 날카로운 송곳. 끝이 달라서 실을 걸어 당기도록 미늘 모양. 아이 살에 박혔고 당겨도 빠지지 않으니 죽도록 아프서 비명 겁 잔뜩 먹어 손도 못 대게. 수선 아저씨가 어찌어찌 빼기는 했다만 아까쟁끼 빨간약으로는 낫지 않는 찢어진 상처. 국민학교 2학년 때 버스부를 처음 알았다. 집 떠나 밤잠도 처음. 새벽 첫 차 부르릉 부르릉 엔진 음은 잠결에 자장가였다. 귀한 매연의 기름 내음은 진한 향으로 달콤하였다. 그리 7년. 가게는 사시사철 새벽부터 해 진 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붐볐다. 그러다 중학교 때 큰 변화가 생긴다. 시외버스부가 시외버스터미날로 이름, 장소 갈이하면서 도약하였지만, 아부지는 장사는 손 털고 산촌에 들어가 농사 짓기로 고집한다. 전원의 낭만을 그리며.



● 가리파재



가파라서 가리파재라면 과연 그렇다. 재는 시의 남쪽에서 원주시와 신림면을 날카롭게 가른다. 오르막 초입에 금대리 철교. 이어서 똬리굴. 철교에서 잠깐 구렁이 길다란 몸뚱이 자랑한 열차는 철커 철커덩 장단을 몰고 굴속으로 빨려든다. 철로와 달리 도로는 거기부터 좌로 우로 연실 급하게 틀며 지렁이 모냥 전진. 한참 후 정상. 내리막은 굽이굽이 유사하되 완만하여 길다. 세운 원 크게 한 바퀴 멋들어지게 돌아서 산의 내장을 통과한 철로는 헐레벌떡 재를 넘은 도로와 저 아래 평지에 이르러 재회한다.


엄마, 아부지는 재를 버스로 넘었다. 내리막 중간에서 안내양에게 차를 세워달라 하였다. 검정 아스팔트가 산과 산 사이. 이쪽 산 허리를 따서 내리 길을 내었다. 도로에서 반대편 역시 산. 노변서 내려다보면 계곡이라 하기엔 너르기에 민가 둘이 떨어져 자리잡았다. 도로에서 이어진 경사를 오르면 계단식으로 논 몇 마지기. 그다음 밭. 끝쯤에 농가 한 채. 그리고 깎아지른 산. 집 우측으로 중간에서 아래로 넓어지는 둔덕. 양손 겹겹이 벌려 하늘 떠받든 낙엽송 여남은. 그 너머 아래에 실계곡. 거기가 경계. 농사철이면 부모님은 게서 땀을 식혔고 등목. 집에서 싸 간 참을 드시고 계곡물 입가심. 빈 농가엔 살쾡이가 살았다. 갇힌 삵은 하악질로 위협했고 다가서면 달려들기에 방문을 열어주었다. 농지라 하기엔 어설프고 산지라 하기엔 인적 진한 산중턱으로 6,000평을 사서 농사를 시작한다.


ㅡ서울 사람


엄마는 한 해 짓고나서 알았다. 농사는 돈이 안 된다는 걸. 주변 농가 산지도 옥수수 일색. 그나마 논 좀 일궜지만 작은 땅에 서늘한 기온마저 수확이 적었다. 나 곧 고교 갈 거고 대학도 보내야 했기에 수를 내어야 했다.


말끔한 도시의 신사. 것도 서울 사람. 은수원사시나무가 돈이 된다고. 나무라 심기만 하면 알아서 자란다고. 산지에 볕이 들어 제격이라고. 대신 심을 때는 각별하다고. 흩어 사는 마을 주민들  동원한다. 밭 흙을 며칠이고 일일이 채를 쳐서 곱게 깐다. 대다수 쪼가리 땅에서 옥수수, 감자를 짓던 주민들. 이게 뭐여? 쉿, 서울 사람이 극비라 했다. 씨를 보물 다루듯이 심는다. 실계곡서 물 길어다 준다. 애지중지 온갖 정성. 대체 이게 뭐여? 산중 흩어진 마을은 가구마다, 누구라도 만나면 온통 이야깃거리. 일주일 후 싹이 흙을 밀고 빼꼼 머리를 내민다. 푸르네? 색이 다르지 않아. 허긴 양귀비도 싹은 푸르지. 며칠 후 펴진 잎들. 잎도 둥글어. 네모난 잎은 없응께.

마을 사람들이 속속들이 아는 건 그들 품을 샀기 때문이어서 천 평 밭을 부모님 둘이서는 어쩔수 없었다. 귀한 몸이라 갓난아가 돌보듯 해야 했다. 손가락 마디쯤 자란다. 쑥갓 닮았어. 그러네, 쑥갓 닮았어. 일주일 후. 쑥갓 아닌감? 그럴리 없어. 암, 그렇고말고. 러시아에서 온 거래. 추운 나라에 쑥갓은 없을 거여. 손바닥 크기. 쑥갓 맞네 맞아. 참다 못해 그 비싼 걸 한 뿌리 조심해서 뽑아 본다. 봐봐. 쑥갓 뿌리네. 쑥갓 맞아. 그리곤 씹어 맛 보고. 쑥갓 틀림없어. 다들 먹어봐.


그렇다. 틀림없이 쑥갓이었다. 씨 뿌리면 알아서 자라는. 상추쌈에 얹어 입맛 돋우는 쑥갓. 어디건 지천인 쑥갓. 그 흔해빠진 걸  주고 씨를 사서는, 동네 사람 죄다 모아 돈 주고 사서 갖은 정성 다 들이고. 엄마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망신은 둘째 치고 특수 작목의 돌파구는 재난으로 돌변했다. 수입 나무 심자우긴 남편이었지만 원망만 하기엔 너무 늦었다. 뻥튀기 기계 처음 나왔을 때도 그랬어. 달아 오른 원 하판에 인조 쌀 알개이 한 줌. 상판을 연결된 지렛대로  주어 눌러 밀폐 후 손을 놓으면 펑 뻥튀기. 기계를 비싼 돈 들여 샀어. 반대했지. 아니, 끼니 쌀도 부족해 옥수수 밥, 감자 밥 먹는데 배도 안 부르는 이런 걸 동네에서 누가 돈 내고 사먹냐고. 고철로 엿장수만 좋은 일. 쑥갓이라니. 시베리아 은수원사시나무라니. 말려야 했는데. 버스부 장사 그만두자고 할 때 너무 싸워 부부의 정까지 해칠까 포기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물어 물어 서울까지 찾아간다. 쪽방촌 판잣집에 살더라고. 돈 다 썼다고 죄송하다고. 사는 꼬락서니 보고 두 말 않고 돌아섰다고. 경찰에 고소 안 했다고.


ㅡ황씨 아저씨


사기 당한 다음 해. 멀쑥한 아저씨 등장.  

가리파재에 세 번째 인물 되시겠다. 첫 40대 부부. 시내에서 장사해서 돈 번. 둘째 50대 서울 사기꾼. 이번은 30대 후반 남자. 키는 아부지보다 작았지만 큰 편이다. 말랐다. 면이 길고 악한 상 아니다. 첫, 다음과 달라서 이이는 마을 주민과 거래가 없었다. 단 가리파재 정상의 부부만 빼고. 성만 알려졌고 황씨라 했다.


황씨 아저씨는 장비와 인부를 동원해 터를 닦았다. 가리파재 역사 이래 처음인 공사. 아부지 농토 입구 아래. 도로가로 산허리를 밀어낸다. 차 대여섯 주차할 공간. 그리고 위쪽으로 돌 계단 이십 여. 거기가 편편한 편이고 높아서 앞으로 산과 계곡 전망이 훌륭했다. 가옥 한 채를 길이로 짓는다. 뭔 일이래? 공사 인부에게 물으니 식당 짓는다고. 산 골짜기에? 차라곤 오전, 오후 버스 한 대뿐인데? 시멘트 트럭만 줄창나게 오가는데?


기사 식당. 도로. 태백ㅡ영월ㅡ제천ㅡ신림ㅡ원주ㅡ서울. 유일한 국도. 제천 이전부터 시멘트 생산 지역. 열차 외에도 시멘트 포대를 대형트럭에 가득 적재하여 날랐다. 레미콘 차량도 섞였다. 승용차가 희귀하던 시절. 트럭 전용도로나 진배 없었다. 영월서 출발하면 출출하다. 이곳을 지나면 거대한 트럭 맘 놓고 주차하고 식사할 곳 마땅찮다. 이걸 다 면밀히 조사하고 이곳에 터 잡기로 결정하고 판을 벌린 거. 계획대로였다.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차를 세웠다. 주방 아줌마 골라뽑아 음식 맛 뛰어났다. 시멘트 업계에 금방 소문 났다. 주차장은 늘 찼고 식당은 기사로 붐볐다. 다른 아줌마는 홀 서빙, 부인은 카운터에서 돈 세느라 바빴다. 황씨는 쌀, 각종 부식 사 나르느라 쉴 틈 없었다. 첫 일 년은 그랬다.


농사꾼


황씨는 가리파재 정상을 노렸다. 수 년을 설득 또 설득 했다. 시세의 배를 주겠으니 땅을 팔라 했다. 나중엔 세 배. 50대 부부가 옥수수 농사를 짓고 있었다. 산 꼭대기라 차고 돌이 많아 다른 농사는 엄두도 못 냈다. 면적도 둘의 농토로는 좁아서 삼백여 평. 하도 졸라서 팔까 생각은 해보았으나 달리 배운 게 없었다. 밭으로는 크지 않아 몇 배 값을 받아도 큰 돈도 아니었다. 배 곯지는 않기에 팔 이유도 굳이 없었다. 이런 쓸모 없는 따에 뭐 할 거냐고 물었지만 황씨는 결코 대답 않았다. 농사 부부는 몹시 궁금했다.


아하, 저거 하려고. 근데 식당이 되나? 트럭만 다니는데? 그 큰 차에 사람은 운전수 달랑 하나뿐인데? 마을 주민 열 손가락으로 다 세는데? 웬걸. 개업날부터 문전성시. 주차장 부족해 길까지 침범. 어랏, 우리 집 옥수수 밭은 삼사십 배인데? 옥수수  안 심으면 바로 주차장. 아하, 이래서 땅 팔라고 애걸복걸 했구나. 여보, 지긋지긋한 옥수수 농사 치우고 우리도 해볼까? 나 요리 몰라. 주방 뽑으면 돈 들잖아? 아줌마 월급은? 계산은? 재료는 어디서? 무엇보다도 초가집. 번듯 다시 지을 목돈 없잖아.


겨울이면 옥수수밭 공터. 저 아래 주차장에 못 댄 트럭 운전사. 아줌마, 여기 식당 차리소.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된다고 하니까. 우동 하나만 삶아 파소. 그거면 되오. 주차하기 편하고, 꼭대기서 쉬고 싶소. 식당은요? 있는 집 쓰면 되지요. 후루룩 우동 먹을 탁자, 의자만 있으면 되오.


그으래? 시도나 해 보자. 돈 안 든다. 집, 터 그대로. 우동쯤이야 삶는 거 뻔하고, 국물 내는 방법은 우동집에 물어보고. 안 알켜주면 길거리 오뎅집 국물 돈 쪼금 주고. 오뎅 국물에 우동 말아주니까. 해서 시작. 처음엔 하루 서넛. 서너 달 지나니 아래 기사 식당과 역전. 반 년 후 옥수수 밭 전체가 주차장,  기사 식당은 파리 날리는 파리 식당.



ㅡ주유소



심리다.


1.트럭에 시멘트 잔뜩 실은 기사는 중간 말고 꼭대기에 차 세우고 쉬고 싶다.


2.운행 도중 먹는 건 우동이면 충분. 돈 아끼고 시간도 절약. 집에서 아침 밥 든든히 먹었다. 집 가면 저녁 밥도.


황씨 아저씨는 치미는 분을 누를 수 없었다. 촌 무지렁이 농삿꾼이 감히. 달랑 우동 한 그릇에 20년 식당 경륜이 짓밟히다니. 세 배 값 준다해도 농사밖에 할 게 없어 못 판다하더니. 고심 부심 절치 부심. 차를 세우자. 주유소. 시에 강원주유소라고 하나밖에 없다. 여기다 차리면 기름통 채우려다 밥 먹고. 밥 먹으려다 기름통 채우고. 이중 매상. 이건 못 쫓아하지. 인맥 동원, 처갓집 빚까지 박박 끌어다가 공사. 이번은 포크레인 중장비를 부른다. 주차장 옆 산 허리를 꺾는다. 바닥은 철근 깔고 콘크리트 타설. 이십여 대 주차와 주유. 헌데 아주 어쩌다 차 멈춰. 장거리 기름은 넣고 출발하니까. 식당 빚에 훨씬 더 큰 주유소 빚까지. 장사는 기울었고 이자는 쌓이고. 그리 두어 해. 부인 안 보여. 황씨 아저씨 이혼 당했다.


ㅡ내리막길


가리파재 남면 내리막은 죽음의 도로였다. 치악산 줄기는 본래 한쪽이 급하고 다른쪽 완만. 재는 남면이 그러했다. 재답게 도로가 굽은 건 마찬가지나 굽도로 사이 뻗은 길이가 북면에서 짧고 남면에서 길었다. 시멘트를 북에서 가득 실었고 남에서 비었다. 남 내리막에서 일 끝내고 집에 간다는 희망, 빈 차라는 안도는 방심을 낳았다. 보다 긴 직선로에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기도. 어어, 한순간 굽은 곳. 운전대를 잡아채 돌리면 차량이 뒤집히고 브레이크 늦으면 직진해 계곡에 처박는다. 사망. 중상에 발견도 이송도 늦기에. 여러 곳 아니고 단 한 지점서 반복되니 황씨 아저씨 식당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한번은 이곳 도로서 시신 발견. 주민이 도로 건너는 걸 트럭이 친 거. 경찰 말로는 치고 지났다가 돌아와 살아 있는 걸 보고 차 빠꾸해 확인 살해한 거라고. 평생 피해 보상이 두렵고 산중이라 보는 이 없기에.


주유소에 달린 타이어 빵구 때우는 집이 매물로 나왔다. 이 또한 트럭 잡으려고 벌린 거. 트럭 기름 안 팔리니 빵구도 들르지 않아. 아부지는 농사 영 시원찮아 부업으로 인수한다. 농사가 처음이듯 이도 처음. 매일 돈이 들어오니 점점 치중한다. 농한기 겨울에도. 헌데 기계라서 위험하다. 기구라곤 쟁기, 호미, 낫뿐인 작물과 다르다. 히로시마 핵 폭탄 크기, 모양의 콤프레샤. 전기 스위치 올리면 굉음과 함께 공기 압축. 끄지 않으면 폭발한다고. 커다란 트럭 바퀴를 다리통만한 기계로 압축 공기를 이용해 넛트를 돌려서 빼낸다. 휠에 쇠판 막대기 넣어 돌리면서 튜브를 분리한다. 바퀴에 밖힌 나사나 돌 제거. 튜브에서 터진 곳 찾는다. 튜브 조각의 한 면을 사포로 거칠게. 접착제로 튜브 터진 곳에 붙인다. 역순으로 튜브 넣고 바퀴 끼우고. 트럭 하부에서 그리고 공기 압축기를 가동하면서 무거운 기구와 쇠를 써서 온몸으로 하는 작업이라 부상 위험 크다. 잔 상처는 일상. 고등학생 된 나는 몇 번 일 도와드리다 알게 된다. 몇 해 뒤 농사를 그만두면서 빵구집도 종료. 미련일랑 두지 않고 가리파재를 훌쩍 떠났다. 농사는 아부지 소망이었으나 돈 버는 건 실패. 사기까지 당하고 나니 아부지는 처음 지어본 농업의 꿈을 접었다. 해마다 겨울이면 바짝 마른 옥수수. 버리자니 아깝고 팔자니 돈 안 되는 걸 방바닥에 쏟아서 각자 쇠 도라이바로 힘껏 떠밀어 떼어내야 했던 식구들은 반겼다.


황씨 아저씨는 목 매달아 죽었다. 국도에 휴게소를 연 개척자였지만 차라리 아니 함만 못했다. 배를 주더라도 정상을 매입하든지 다른 산 정상에서 판을 벌려야 했다. 밀림에 돈 몸 머리 다 바쳐 길 내니 무지한 원주민이 냉큼 차 몰고 씽씽 달린 거. 작 않았으면 아무일 없을 걸 괜히 벌려서 참극을 자초한 거. 사업에서 정상을 이기는 비탈은 없다는 거, 길 터주느니 시작도 마라. 고2 뼈에 아로새긴다. 


가리파재는 처음 갈 때부터 철수까지 10년간 매해 두셋이 목숨을 잃었다. 달팽이 잡다가 물에 빠져 죽는 곳은  같은 건이다. 갑자기 푹 패인 웅덩이. 포크레인으로 모래를 뜬 자리.  길 넘는데 깊이를 모르는데 그 주위로 달팽이가 많기 때문이다. 가리파재는 남쪽 산사면에서 혼령이 산 자를 끊임없이 유혹했다. 비극은 영월 방면에서 시멘트를 트럭으로 나르면서 시작되었다.



● 가리파재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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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경. 그땐 그랬다.


잊히기 전에, 더 늦기 전에 1968년 전후 생활상을 서투나마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국민학교 입학 전후 꼬맹이 눈으로, 가급적 그때 언어로. 저물어 가는 저와 새 시대를 살아가는 자식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 한때는 이런 시절이 있었노라고.




●  지금은


국도 옆으로 중앙고속도로. 굽은  국도를 직선으로 폈다. 치악휴게소가 옛 우동집 역할을 갈음하였다. 가리파재는 여전하나 통행은 드물다. 원주시 인구 15만에서 36만. 계속 느는 중. 영월 등 주변 군에서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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