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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 삼거리에서 Aug 22. 2020

봄봄봄 아부지의 노래

응답하라 1968 - 가족 편


-- 명절 다가오면 어떤 놈이 왜 명절을 만들었나 원망했다. --




봄 봄 봄이로구나 봄

이팔청춘 방긋 웃는 봄이로구나 봄

금강산 호랑이 으르르릉

낙동강 꾀꼬리 꾀꼴 꾀꼴

봄이로구나


아부지는 흥이 나면 이 노래를 부른다.

따라 한다.

함께 수없이 하니 저절로 외워진다.



아부지가 동네 사람 누구와도 싸우는  본 적 없다. 법이 없어도 살 분이었다. 술도 담배도 안 다. 아부지는 식구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에 순서가 있었으니  아끼는 엄마가 1등, 장남인 내가 2등, 그리고 자식 넷 공동 3위 . 큰누나만 종종 구박했고 4위. 아들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린 첫딸이라. 못났다고 머리마저 둔했다고. 고구마 고구마 하며 아무리 가르쳐도 쪼주망 쪼주망 했단다. 그래도 사춘기 되니 네가 맏이니까 동생들 봐야 한다고.


뻐스부에서 가게를 하고나서부터 사랑하는 엄마와 다투시작했다. 매년 두 번은 대판 싸움. 날은 정해졌다. 설날 때 한 번, 추석 때 한 번. 아부지는 명절날 하루만이라도 쉬자 하고, 엄마는 대목날 어떻게 쉬냐 하고. 아무리 화나도 아부지는 엄마를 때리지는 않았다. 어쩌다 분에 못 이기면 그릇을 집어 바닥이나 벽을 향해 집어던지기는 했지만. 깨지지 않는 걸로 골라서.  


가게 전에는 아부지가 하고 싶다는 걸 하면 그때마다 빚이 늘었다. 그러자 엄마가 나섰고 가게 해서 빚을 갚았다.




ㅡㅡㅡ  ㅇ ㅡㅡㅡ




ㅡㅡ돼지 치기



아부지는 돼지를 치자 했다. 암퇘지  마리가 새끼 치면 열 마리 되고 또 낳으면 스무 마리 되니까. 하지만 한 마리 돼지는 더디게 컸고 너무 많이 처먹었다. 그만큼 똥을 무더기로 쌌고 치우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접붙이기


새끼 칠 때가 되니 우선 통나무를 구해다가 X자로 받침부터 만들어야 했다. 따로 씨돼지를 돈 주고 불러다가 접붙여야 했다. 어른 여럿이 달려들어 우리 집 암퇘지를 응차 들어 X자 받침 위로 올려야 했다. 돼지는 단두대에 올라 죽는 줄 알고 몸부림치면서 그야말로 돼지 멱따는 소리로 비명.


꽤애액 꽤애액

꽤애액 꽤애


연실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더니 어른이고 애고 남자건 여자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든다. 먹고살기 바쁜데 이만한 구경이 어디 있으랴. 별별 희한한 걸 다 보여주는 서커스 가도 이런 건 없다. 다들 이 요상한 공연을 지켜보기로 한다. 신작로 옆쪽 아래로 담장이 없는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길가에 죽 늘어서서 눈만 감지 않으면 빤히 다 보인다. 호기심 많은 나야 당연히 틈에 끼어서 눈 동그랗게 뜨고.


암퇘지를 간신히 받침대에 걸치고 나니 씨돼지 차례. 이건 쉽다. 그 돼지를 몰고 온 휘발류 김 씨 아저씨가 나선다. 암퇘지보다 훨씬 더 커서 송아지만 한 씨돼지가 암퇘지 등에 올라타도록 아저씨가 거든다. 이놈은 씨돼지답게 맨날 밥 먹고 하는 일이 이거라서 지가 멀 하는지 아니까 알아서 기어오른다. 허나 흥분한 모습이 영 보기가 거북하다. 분홍빛으로 발딱 선 거시기 나무젓가락같이 기다랗고 가늘다. 뚱뚱한 몸뚱이로는 머시기를 못 찾으니 몸을 비틀어댈 때마다 허공에서 회초리처럼 이리저리 휘리릭 휘리릭.


그러는 사이 암퇘지는 통나무 받침에 가슴이 눌려 아픈 데다가 첫 만남에 엄청난 덩치가 등에 올라타니 기겁해서 더 지랄한다. 게다가 평상시 못 보던 사람들이 떼로 모여서 다 자기를 향해 눈빛을 쏘아대니 돼지 입장에서는 엄청 무서울 거. 발버둥 칠 때마다 받침대가 찌그덕 찌그덕 주저앉을 거 같다. 거식이 어렵사리 을 찾아 넣으니 숫처녀인 암퇘지가 경끼를 일으키며 외친다.


꽤애액


이번엔 외마디. 첫 경험이라도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느낌으로 깨닫는 거다. 이건 결코 멱따는 일이 아니라는 걸, 절대 쓸 일이 아니라는 걸, 이런 때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두 마리가 몸이 붙고 잠깐. 수퇘지가 등에서 떨어져 내려온다.


에개, 이게 끝이야? 


기껏 이거 시키려고 우리 집 암퇘지를 그렇게 괴롭힌 거야? 싱겁고 허무하다. 암퇘지는 더 그랬을 거 같다.       

아부지는 새끼도 직접 받아야 했다. 한 마리씩 나오면 하나하나 천으로 닦아준다. 숨 안 쉬면 입 맞추어 후욱 불어주고. 열 마리 정도 받으려면 밤을 새운다. 애써 받은 새끼도 어미가 놀라면 물어 죽이거나 잠잘 때 뒤척이다 새끼가 깔려서 죽기도 한다. 젖 떼면 새끼 열 마리를 다시 어미 한 마리 키웠듯이. 그러나 먹는 양과 들이는 공은 열 배. 먹이고 똥 치우고 반복해야 한다. 그러다 다시 씨돼지 불러 엄마 돼지와 접붙여야 하고.


아부지는 한 해인가 난리통을 겪고 나서 돼지 치는 걸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ㅡㅡ닭치기



닭은 돼지와 한참 달랐다. 우리 집 옆 골목에 부화장이 생겼고 거기서 병아리를 사 오면 그만. 돼지처럼 새끼를 받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도  동네 사람들 앞에서 창피하게 접붙일 일이 없다. 알아서 날개 펴고 푸드덕푸드덕 아주 잠깐 올라타암탉 소리래야 꼬꼬댁 꼬꼬. 이 정도야 돼지 멱따는 괴성에 비하면 음악. 게다가 병아리는 귀여웠고 금새 자랐다. 새끼가 아니라 알을 낳으니 길에 떨어진 돈 줍듯이 주워서 계란판에 담기만 하면 된다. 마릿수 늘리고 싶으면 병아리 더 사 오면 되고.


그렇게 아부지는 가매기 삼거리 동네 한가운데 양계장을 짓고 닭을 쳤다. 엄마는 자전거 타는 걸 배웠고, 30개들이 계란판을 자전거 뒷좌석에 켠켠이 높이 쌓아 싣고서 여러 식당에 내다 팔았다. 헌데 닭은 돈 좀 될 하면 병이 돌았다. 닭들이 한꺼번에 죽었다. 돌림병은 약도 없다. 양계를 몇 해 하고 나니 병에 강한 돼지와 달리 닭은 돌림병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엄마는 계란 판 경험을 살려 가축 말고 사람 상대로 무엇이든 파는 걸 하자고 했다. 사람은 금방 죽지 않고 계속 사고 계속 쓰니까. 똥도 각자 알아서 변소 가서 누니까. 이렇게 작하게 된 가게 덕에 양계장 하다 생긴 빚 다 갚고 재산이 었다. 자연스럽게 엄마가 돈을 책임지고 아부지는 엄마를 도왔다. 여덟 살 차이 큰누나는 엄마 대신에 다섯 동생에게 밥 해 주고 설거지 하고, 양말, 옷 꿰매 주고. 가게에서 엄마, 아부지 일도 돕고.




ㅡㅡㅡ ㅇ ㅡㅡㅡ




ㅡㅡ찐빵 가게



양계장이 망하고 엄마, 아부지는 고심 끝에 쌍다리와 천주교회 중간에 있는 시외뻐스부에 가게를 빚을 내어 샀다. 가게래봐야 단층 대합실 건물에 가닥을 붙이고 스레트를 얹은 방 한 칸 크기 가건물. 사람 하나 다닐 통로를 사이에 두고 춘천행 뻐스를 마주 본다. 도로 쪽으로 반 평 정도 쓸 수 있는 외부. 실내는 손님 둘 의자에 앉는 나무 탁자  개 나란히, 신 벗고 오르면 이 앉을 수 있는 무릎 높이의 턱이 전부였다.


허름한 간이음식점이었지만 자리가 워낙 좋아서 무엇이든 불티나게 팔렸다. 가게가 굳이 넓을 필요는 없어서 뻐스 시간에 쫓 밖에 서서, 가져다 뻐스 안에서 알아서들 먹었다.  스가 출발하는 새벽부터 막차가 들어오는 밤까지 뻐스부에 사람이 붐비니 가게도 덩달아 바빴다. 서울, 춘천, 제천, 충주, 여주행 뻐스가 사람들을 담을 때마다, 돌아와 토해낼 때마다 돈통에 돈이 쌓였다. 메뉴는 가지로 라면, 우동, 찐빵, 김밥, 오뎅, 삶은 계란. 


라면. 얼마나 많이 끓여 팔았는지 집에다 삼양라면을 트럭으로 받아 젤 큰 방인 안방 천장까지 박스째로 가득 쌓아 쟁여 놓았다. 식구들 잠은 옆방에서 자고. 매년 겨울 김장은 오백 포기하면 부족하고 천 포기하면 남아서 군내나 버리고. 라면에 김치를 곁들여야 하니까.


우동, 오뎅. 면을 삶아 뜨거운 오뎅 국물에 말아서 닥꽝과 함께 나무 탁자에 내놓는다. 금방 삶은 면은 이 자르르 흐르고 우들우들 쫄깃하며 국물까지 맛나니 우동도 수시로 삶는다. 오래되면 뚝뚝 끊어져 찰진 맛이 사라지니 조금씩 나누어 면을 삶는다. 


국물은 물에다 큼지막하게 썰은 무, 파 등 몇 가지 재료를 넣고 간장인가 소금인가로 간을 맞추고 연탄불에 종일 우려낸다. 길고 둥근 오뎅을 대나무 꼬치에 꿰어 국물에 넣어 익혀 판다. 꼬치 오뎅은 겨울엔 꾸준히 나가지만 여름엔 조금만 준비해도 남아서 팅팅 붇는다. 불은 오뎅은 한번 맛 들이면 나름 별미라 일부러 찾는 사람도 있다.


김밥. 말아서 쌓아두면 어느새 바닥을 보이니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밥을 짓는다. 재료는 김, 고들밥, 판 오뎅을 길게 썰어서 간 맞춰 프라이팬에 볶은 거, 닥꽝 길게 썰어서 한 줄,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간 맞춘 시금치.

김밥 마는 대나무 발을 펼치고 김 한 장을 얹고, 밥 한 주걱을 김 위에 얹어 얇게 펴고, 가운데에 판 오뎅 두 줄, 닥꽝 한 줄, 시금치를 한 줄로 끊기지 않게 길게 이어 놓고, 발을 둘둘 말으면 김밥 한 줄. 김에 기름칠하고 통깨를 흩뿌리면 반질반질 윤이 나고 굵직하니 한 입 뭉텅 깨물어 먹고싶은 김밥 완성. 금방한 재료에 간이 맞으니 꾸준히 팔린다.


삶은 계란. 반숙으로 한다. 물에 계란을 넣어 펄펄 끓이면 끝. 그래도 비법은 있었으니 물에 식초인가 먼가를 넣고 끓이고, 찬물에 식히면 껍질이 훌렁훌렁 잘 벗겨진다. 반숙이 어려운데 끓이는 시간을 잘 맞춰야. 찍어 먹는 소금은 쇠 절구에 쇠공이로 으깬 참깨를 섞어서 종지에 담아 내준다.


거의 다 방금 했거나 직접 한 거라 신선하고 맛나다.



---찐빵


별미 중 별미. 전 공정 다 아부지가 담당. 아부지는 매일 장사 끝나고 밤에 찐빵 반죽을 만들었다. 큰 스덴 다라에 밀가루 한 포대를 쏟아붓는다. 베이킹 소다를 넣고 섞는다. 물과 막걸리로 반죽해 충분히 치댄 후 다라를 가게 안쪽에 두고 이불을 덮어둔다. 다음날 아침이면 반죽이 잘 삭아 붕그렇게 오른다.


잉꼬는 팥을 삶아 쇠 절구에 으깨어 만든다. 반죽을 뜯어 앙꼬를 한 움큼 넣어 주먹만 한 크기로 빵을 만든다. 천을 깔아 둔 둥근 나무 판 위에 빵을 차례로 놓는다. 연탄불 위에 놓인 가마솥에 물을 붓고, 그 위로 물이 닿지 않게 떨어져서 나무판을 얹는다. 물이 끓으면서 수증기로 빵이 쪄진다. 찐빵이다.


잘 된 찐빵. 빵은 얇고 앙꼬넉넉하다. 앙꼬 없는 찐빵이 찐빵이 아니듯이 앙꼬 아낀 찐빵은 모지란 찐빵이다. 뜨거운 건 매우 부드럽다. 양손으로 반 가르려면 뜯어지기보다 눌리면서 앙꼬가 튀어나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르기보다 덩어리째로 한 입씩 베어 먹는다. 앗 뜨거. 제대로 씹지 못 하지만 입에서 살살 녹는다. 앙꼬 너무 달지 않되 흰 설탕을 따로 찍어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어느 정도 단맛이 돌아야. 삶은 팥을 완전히 으깬 거보다 온전한 거, 반쯤 부서진 게 드문드문 남을 정도면 씹는 맛이 더해진. 많이 먹어도 목물이 안 올라오고 먹고 나서 속이 편하다. 매일 큰 다라 하나를 팔았다.


갓 찐 빵. 솥뚜껑을 열면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 오른다. 뜨거운 찐빵을 손바닥에 번갈아 놓아 식히면서 호호 불며 입에 조금 물면 그 뜨거움과 그 부드러움과 그 달콤함이란! 아부지가 가마솥에서 금방 쪄낸 찐빵이 어찌나 맛난지 가게 갈 때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뻐스부 근처에 태권도장에 다니면서 뜨끈 뜨근한 찐빵 먹을 생각으로 가게에 매일 들렀다.


사람 찐빵. 가게 하던  국민학교 5학년부터 뻐스부 길 건너 인동에 있는 태권도장에 다녀서 자연스럽게 가게에 들렀다. 사범님은 내 이름 대신에 별명을 불렀다. 찐빵이라고. 도장은 입구 쪽이 좁고 길이가 긴 장방형에 마루를 깔아 신을 벗고 들어간다. 벽은 부로꾸를 쌓아 올려 미장. 그 위로 굵직한 나무를 삼각형으로 얹은 서까래와 지붕이 보인다. 천장은 없다. 운동 전에 내부를 뛰어서 돌고 이십여 명이 모여서 정권 찌르기와 발차기를 할 정도로 널찍했다.   


라면은 가게에서 끓여주면 먹기도 했지만 가게가 바빠서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출출할 때마다 밥 대신 생으로 부셔서 먹었다. 이 또한 질리는 법이 없다. 나만 라면을 뿌셔 먹는 게 아니었는지 얼마 후 라면땅이라는 과자가 나왔다. 쫀드기만큼 폭발적인 인기.


우동도 좋아했지만 삶아야 하니 시간이 걸려서 어쩌다 먹었다. 잔뜩 은 오뎅과 속까지 검붉게 물들어 흐물흐물해진 무는 입맛이 들어서 일부러 골라 먹기도. 김밥도 가끔 한 줄 먹고. 학교에서 소풍 갈 때 늘 먹던 거라 입에 맞다. 계란은 양계장 할 때 너무 먹어서 그런지 딱히 당기지 않았다. 찐빵을 우선 먹다 보니 배가 불러서 나머지는 어쩌다 먹었다.


이렇듯 엄마가 음식점을 하자고 한 건 식구들 끼니도 해결할 수 있어서이기도 했다.  


설, 추석이면 엄마, 아부지, 큰누나 다 정신줄 놓아야 한다. 일주일 전부터 매상이 팍팍 오른다. 전전날, 전날은 평일에 몇 배나 판다. 당일도 두 배는 된다. 다음날, 다다음 날도 사람들이 돈이 생기니 많이 다. 그러니 엄마는 대목날 가게 문을 못 닫을 수밖에. 그렇다고 엄마가 명절 다음 주에 하루라도 쉬었던 건 아니다. 빚 갚아야 하고, 자식 여섯 먹이고 입히고 학비를 대야 하니까.  모아서 중학교, 고등학교 보내야 하니까.


아부지는 두어 해를 정신없이 단 하루도 못 쉬고 명절마저 일하고 나서 지쳤다. 돈이고 뭐고 다음 해 명절날 드디어 폭발. 제발 하루만 쉬자고. 이때부터 아부지, 엄마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연례행사로 점점 더 험악해졌다. 나는 해가 갈수록 설날과 추석이 점점 싫어졌다. 명절이 다가오면 어떤 놈이 왜 명절을 만들었나 원망했다.


아부지는 가게를 하고부터 봄이 와도 봄봄봄 노래를 잊어버렸다.




ㅡㅡㅡ ㅇ ㅡㅡㅡ




---화투 치기


가게 하기 전에 양계장  때는 엄마가 불만이었다. 돌림병 때문에 떼로 죽은 닭을 내다 파묻었다. 겨울이 왔고 아부지는 할 일이 없었다. 날마다 막걸릿집에 동네 어른 너댓이 모여 뽕이라는 화투를 쳤고 아부지도 끼었다. 설 전날은 밤새도록 친다. 이날은 새벽녘 화투가 끝나면 아부지는 꼭 구멍가게에 들러서 종합 선물세트를 사서 집에 가져다. 몸통만큼 커다랗고 낮은 상자엔 가지가지 과자와 사탕이 가득. 아부지는 돈을 땄을 때는 기분 좋아서, 잃어도 개평받은 돈으로 다.


아부지는 깊이 잠 나만 깨웠고 가슴에 선물 세트를 안겨 주었다. 맛도 있거니와 골라 먹는 재미가 컸다. 다른 형제들은 소란하니까 얼떨결에 깨든가 아침에 일어나 내가 먹다 남긴 걸 먹든가. 아부지는 항상 첫아들인 나를 조용히 깨웠다. 엄마는 매일 화투만 치는 아부지가 었다. 난 아부지가 화투 치는 게 좋았다. 많이 딴 날은 명절 아니라도 먹을 걸 사 왔기 때문에.


하루는 엄마가 밤에 남자들이 모여 화투 치는 집에 찾아가서 화투판을 뒤엎었다. 화투 아래 깐 군인 담요를 통째로 들어서 팽개쳤던 거. 시간 보내려 재미로 친 화투가 도박이 되었던 거다. 동네 사람 외에도 외지 사람이 끼었다. 전문 화투꾼. 처음에 잃어주는 척하다가 나중에 다 따고 재산까지 빼앗아가는. 아부지와 같이 화투 친 동 아저씨의 아줌마가 엄마에게 귀띔해 주었고 엄마는 고민 고민하다가 그날 절단 낸 거였다.


동네가 오밤중에 난리가 났다. 남자들이 하는 일에 감히 여편네가 이럴 수 있냐고. 엄마, 아부지는 집에 와서 대판 싸움. 아부지는 남편 망신 다 시켰다고, 엄마는 이럴 거면 갈라서자고. 아부지의 엄마 사랑, 가족 사랑이 도박을 이겼고 이후 아부지는 화투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나는 종합 선물세트를 가져오지 않는 게 서운했다.



ㅡㅡ비누 공장



돼지치기 전에는 아부지는 비누 공장을 했다. 공장은 빈집을 이용했다. 비누는 까만 비누나 똥 비누라고 불렀다. 아부지는 왕겨를 사다가 공장 옆 마당에 내 키 높이로 작은 산처럼 쌓아두고 태웠다. 바닥에 불씨를 두고 그 위로 왕겨를 얹으면 안에서부터 천천히 타들어 간다. 겉까지 새카매지면 다 타서 재가 된다.


이 재에 물을 부어서 통과하면 양잿물인가가 된다. 양잿물을 기름인지 무언지와 섞는지 어쩌는지 해서 굳힌다. 그럼 연탄처럼 시커먼 색을 띤 비누가 된다. 도시락 반에 반만 한 크기로 자르면 까만 비누. 빨래뿐 아니라 세수할 때, 머리 감을 때도 썼다. 까만 비누를 설거지 할 때 쓰지는 않았다. 쓸 일이 없었다. 매 끼니에 기름기 있는 게 없으니 물로 씻어내면 그만.
 
아부지는 까만 비누를 두어 해인지 만들어 팔다가 그만두었다. 허가가 안 나와서인지 안 팔려인지 그건 모른다.



ㅡㅡ농사



뻐스부에서 가게한 지 7년여. 쌍다리 옆 뻐스부가 우산동으로 확장해서 옮겨진다고. 명절날조차 쉬지 못하고 더 바쁘게 일해야 하는 가게 신물 난 아부지는 버스부 따라 가게를 옮기는 걸 결사코 반대했다. 이번에는 오랜 싸움에 지친 엄마가 손을 들었다. 빚은 진작 다 가렸고 쌓인 돈으로 논과 밭을 낀 산 6,000평 샀다. 신림 가는 가리파재 너머 구불구불한 국도 중간쯤 길가 왼쪽으로.


오래전부터 산을 일궈서 아래로 반은 논, 위로 반은 허름한 농가가 한 채. 남쪽 경계가  크고 늘씬한 낙엽송 십여 그루로 이루어진 작은 숲이어서 해를 피해 참을 먹거나 궁둥이 붙이고 쉴 수 있었다. 그 아래로 자그마한 계곡에서 물을 얻었다. 아부지와 엄마는 농사짓기로 한 거였다. 


씨 뿌리는 봄이 왔고 아부지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봄 봄 봄이로구나 봄

이팔청춘 방긋 웃는 봄이로구나 봄

금강산 호랑이 으르르릉

강 꾀꼬리 꾀꼴 꾀꼴

이로구나


1968년경 꼬맹이 때. 그땐 그랬다.







세대 통역



뻐스부 = 버스터미널


뻐스부ㅡ버스터미날ㅡ버스터미널 순으로 말이 바뀌었다.


닥꽝 : 다꽝. 일본말. 우리말 단무지.


스덴 : stainless steel. 녹이 슬지 않는 강철. 처음에 밥그릇, 그다음 다라 등 용도가 넓어졌다. 그전에 놋그릇은 녹이 잘 슬고 양은 다라는 쉽게 우그러들었다. 스덴은 녹이 안 나고 우그러들지 않아서 살림하는 여자라면 누구나 스덴 그릇을 한 벌 장만하는 게 꿈이었다.


다라 : 둥글고 넓고 얕고 위가 트인 커다란 용기. 많은 물을 담거나 김치, 깍두기를 담거나 빨래할 때 쓰였다.


앙꼬 : 팥소. 일본말.







그때는




신혼 때쯤 아부지




가게 그만두고 나서쯤 아부지와 막내 동생




72년 국민학교 5학년. 앞줄 왼쪽 두 번째 불쑥 키 큰 녀석. 꼬맹이를 지났다. 중앙 어른 셋 중 좌가 박동선 사범님. 요맘때 사진 이거 달랑 한 장.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노래였던 듯.


아부지는 사람 상대하기가 싫어서 동물, 식물을 키웠던 거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이어서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데서 돼지 접붙이는 게 창피했던 게다.


쌍다리 근처 스부는 시외버스 터미날. 우산동 터미날로 이전하면서 시외버스 터미날 바로 옆으로 붙여서 고속버스 터미날이 새로 생겼다.


농사를 시작한 건 76년경이다. 응답하라 1968은 아니고 10년 후 1978년경 이야기인 청춘 비망록과 중첩되는 부분.







지금은




신화 철물쯤이 우리 암퇘지 응응 하던 자리. 버스정류장쯤에서 동네 사람들 다 구경하고.




여름, 가을, 겨울 이, 삼, 사 절을 부르셨던 거 같은데 봄만 기억난다. 아부지는 이 노래를 언제 배운 걸까?

아들 둘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 노래라며 가끔 이 노래를 가끔 불러주었다. 녀석들은 내 나이 되면 이 노래를 기억할까? 나를 어떻게 추억할까?


3남 3녀 중 둘만 대학까지 교육을 받았다. 나와 남동생 하나. 셋은 고등학교 졸업. 큰누나는 엄마 역할 일부하랴 가게 일 도우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다.  고맙고 미안하다.


평생 궁금했다. 태권도 사범님이 내 이름 대신 왜 나를 찐빵이라고 불렀는지. 찐빵 가게 아들이니까 찐빵이라고 했던 거였다.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글이 내게 준 선물!

박동선 사범님. 이제야 생각난다.  성만 생각나고 이름이 가물가물했는데. 이 또한 선물!


아부지가 만든 찐빵이 너무너무 먹고 싶다. 어디에고 아부지표 찐빵은 없다. 원조라는 안흥 찐빵 마을조차도. 빵을 뜯어보면 대번 다르다는 걸 안다. 대개 빵이 두터우니 앙꼬를 아낀다. 반죽이 다르고 소도 다르다.


1.5차선 신작로는 아스팔트 포장을 거쳐 97년경 6차선으로 확장되었고 돼지 접붙이던 마당은 일부가 도로로 편입되었다.





잊히기 전에, 더 늦기 전에 1968년 전후 생활상을 서투나마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국민학교 입학 전후 꼬맹이 눈으로, 가급적 그때 언어로. 저물어 가는 저와 새 시대를 살아가는 자식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 한때는 이런 시절이 있었노라고.




2018.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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