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아들 하나 보려다 딸 낳고, 아들 혼자는 외롭다며 아들 하나 더 보려다 딸 낳고, 이웃집 아들 셋이 부러워서 아들 하나 더 보려다 딸을 낳는다. 그뿐 아니다. 아들만 본다면 첩을 두어도 당당했다.
영영 아들이 없는 집은 조카를 아들로 삼거나, 문 앞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들이거나, 이마저 곤란하면 아무도 모르게 야반도주 이사해서 아들을 들였다.
딸만 낳고 넋 놓고 있는 집은 어디에고 없었다. 모든 건 대를 이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육이오 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죽어서 부담은 더욱 커졌다.
가매기 삼거리도 마찬가지여서 온 동네가 아들에 목매달았다.
엄마는 딸만 셋 줄러리 낳고 죄인이 되었다. 동네 사람 마주칠까 동네에서 고개를 못 들고 다녔다. 시내 나갈 때는 그림자처럼 골목길로 숨어 다녔다. 그래서 엄마는 평생 처음 점을 보았다.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번재 가는 길 육판바위 아래에 촛불 켜고 삼신할머니께 백일 동안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아들 하나 갖게 해 달라고. 나는 그렇게 귀가 빠지고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날 아부지는 생애 최고로 신명 났고, 부정한 것들을 막기 위해 금줄을 만들어 대문에 걸쳤다. 누런 새끼줄 왼쪽으로 꼬아서 간간이 벌리고, 광택이 나도록 새빨갛고 길쭘해 늘씬하게 휜 고추와 새카만 숯을 번갈아 꿰어서는 문 양쪽 기둥에 어른 키높이보다 조금 높게 느슨하게 매달았다. 아부지는 그날부터 동네방네 어깨에 힘깨나 주고 다녔고, 엄마는 시집와서 8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을 활짝 펴고 동네를 활보했다.
그러나 아들 못 본 다른 집은 더욱 깊은 시름에 잠겨야 했다.
쌀집은 칠공주에 아들만 하나다. 어떻게든 아들 하나 보려고 낳다 보니 딸만 일곱.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 천만 다행히 여덟 번만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헌데 서지 못하고 사지로 기는 소아마비였다.
막걸릿집은 아들만 하나다. 큰집서 조카를 데려와 아들로 삼았다. 부부가 애를 갖지 못하는 것은 흉이라 쉬쉬했지만, 형의 아들 중 하나를 아들로 들인 건 흠이 아니어서 떳떳하게 말했다.
공 씨는 딸만 하나다. 누가 강보에 둘둘 말아 대문 앞에 버리고 간 갓난아기를 자식으로 들였다. 헌데 사내 아닌 계집이었다. 공 씨는 육이오 전쟁 나고 군대 가서 매독에 걸렸다. 매독균을 죽인다고 바지 벗고 쭈그리고 앉아서 불로 수은 증기를 끓여 불알에 쐬었다. 매독은 나아 생명은 건졌지만 불알이 죽어서 대가 끊겼다. 공 씨 아부지는 땅부자였고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인 공 씨가 남편을 여읜 어머니와 함께 재산을 관리했다. 공 씨 삼 형제간 상속 문제 때문에 조카를 아들로 삼지 못 하고 고심 끝에 여자 애를 받은 거다. 공 씨 집안 사정을 아는 누군가 일부러 계집아이를 대문 앞에 둔 거였다.
세탁소집은 딸만 둘이다. 부부 나이가 동네서 제일 많아 할아버지로 불렸고 아이를 더 낳지 못했다. 군인을 상대해 군복을 다리거나 수선해 돈을 잘 벌었다. 돈이 궁하거나 급한 동네 사람은 으레 세탁소집에서 돈을 빌리니 이자까지 더해 살림살이가 늘 넉넉했다. 사내아이들 여럿이 떼를 지어 집집마다 돌아가며 세배하는 설날이면 세뱃돈을 가장 많이 주었다. 세뱃돈 받으려고 양손을 내밀면 할아버지는 내 손에 돈을 쥐어주고는 두 손으로 내 양손을 꼭 잡고 한참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세탁소집이 어느 날 하룻밤 새 텅텅 비었다. 젊은 이웃들의 아들이 부러워서 견디다 못해 야반도주한 거였다. 빌려준 돈 다 포기하고 아들 들이려고. 출생의 비밀을 지켜주려고 아무도 모르게. 몇 년 지나 부산서 봤다는 소문이 돌았다. 섬 빼고 육지로는 가매기 삼거리에서 가장 먼 거리였다.
이뿐인가? 아들이 하나인 집은 혼자는 외롭다고 형제가 있어야 한다며 어떡하든 아들을 더 낳으려 했다.
염 목수는 아들 넷에 딸 하나다. 먼저 살림을 차린 여자에게서 아들 둘을 얻었다. 나중 여자와 딸 하나, 그 다음 아들 둘이 더 생겼다. 여자 둘과 자식 다섯은 한 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었다. 여자 둘은 아들이 둘씩 같아서 그런지 사이가 좋아 자매로 보였고 다투는 걸 본 적 없다. 이복형제 다섯도 친형제처럼 지냈다. 동네 사람들은 누가 처고 첩인지는 늘 궁금했다. 두 여자 간 나이 차이가 컸고, 둘의 자식들 간 나이 역시 차이가 나서 먼저 산 순서만 알 수 있었기에 나중 여자가 첩이거니 여겼을 뿐이다. 오 형제는 큰 엄마, 작은 엄마라고 부르는 걸로 서로 다른 배 출생임을 구분했다. 아들을 더 가질 수 있다면 여자를 더 들여도 문제 될 게 없었고, 여자는 아들만 낳으면 장땡이었다.
김목수는 아들 둘에 딸 하나다. 첩인지 새장가들었는지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더 얻었다. 딸의 병이 깊어 아들 더 낳기를 포기했다.
방앗간집은 아들 둘에 딸 둘이다. 넷 중 장남이 첫째고 차남이 막내니까 아들 둘 얻으려다 딸 둘을 본 거다. 처 외에 여자가 있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첩으로 들이지는 못 했다.
빵공장집도 아들 둘에 딸 하나다. 셋 중 딸이 둘째니까 아들 둘 얻으려다 딸 하나 본 거다.
이뿐인가? 아들 셋이 부러워서 경쟁심에 아들을 더 낳으려고 했다.
강 씨는 아들 둘에 딸 셋이다. 다섯 중 장남, 차남이 첫째, 둘째니까 진작에 아들 둘을 낳았다. 아들 더 낳으려다 딸 셋을 연달아 본 거다. 우리 집보다 아들 더 가지려다 그리되었다.
아들 더 낳기를 그만둔 집이 있기는 하지만 흔치는 않았다.
여씨는 아들 둘에 딸 하나다. 딸이 장녀니까 아들 둘에 만족한 거다.
우리 집은 아들 셋에 딸 넷이다. 일곱 중 장남인 내가 네 번째, 차남이 여섯 째니까 아들 둘 보려다가 딸 넷을 낳은 거. 그러고 나서 셋째 아들이 막내로 태어났다. 엄마는 막내는 실수라고 했다. 나이 들어 낳아 창피해서 동네에서 고개를 못 들고 다녔단다. 둘째 딸은 세 살 때인가 병약해서 죽었다고.
가매기 삼거리 토박이는 이런 식으로 열댓 집이었다. 다른 집들이 몇 있었지만 뜨내기라 가족 사정은 몰랐다.
가매기 삼거리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아들 때문에 웃고 우는 아들 공화국이었다. 그렇게 온 동네, 온 나라가 아들 보려고 밤이 이슥하면 황금빛으로 빛나는 백열등의 새까만 소켓 스위치를 돌려서 끄고, 애들이 잠들고 나면 전투를 치르는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아무리 그리해도 나라 전체로 반은 원한대로 반은 반대로 태어났다.
1968년경 꼬맹이 때. 그땐 그랬다.
후기
베이비부머
이 무렵 동네마다 집마다 줄줄이 사탕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자라면서 나라 경제와 정치를 쥐락펴락해 평생 정부의 표적이 된다.
국민학교 가니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면서 아들로 태어난 게 죄인가 보다 느끼고,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길고 긴 국민교육헌장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달달 외우고 못 외면 손바닥 맞거나 복도에 나가 두 손 들고 벌을 선다.
고등학교 때는 얼룩덜룩 교련복 입고 열병식 하고, 뙤약볕 운동장에서 단체로 목총 들고 찔러 총을 외치면서 나라를 지켜야 했다. 대학가서는 최루탄 가스를 마시고 눈물, 콧물 줄줄 빼고, 어딘가로 잡혀가거나 억울한 죽음을 보거나 들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386 세대라 불려서 빨간색 레드카드를 받는다.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 지니까 베이비 부머란 이상한 딱지를 떡하니 갖다 붙인다.
그래도 의식주 해결되어 여가를 즐기고, 실내면 어디든 겨울에 따스하고 여름에 시원하며, 집마다 자동차 한 대는 기본이니 베이비부머가 성실하게 열심히 산 건 맞다.
그때는
우끝 엄마. 좌끝 아부지. 단기 4284년 = 1951년. 육이오 전쟁 중 만나셨다.
좌 엄마. 사범학교 시절. 육이오 전쟁 전.
지금은
도로가 확장되면서 옛집들이 다 없어졌다.
노란색 도로 좌 위부터 아래로 공 씨네 집, 방앗간 집 (동원 건축 자리), 우리 집 노 씨네 집 (신화 철물 자리와 행정복지센터 앞쪽 자리 두 곳), 빵공장집 (도배 사랑 자리).
도로 우 위부터 아래로 김 상사 구멍가게 (세븐일레븐 자리), 자전거포, 염 목수네 집, 연탄집, 쌀집, 세탁소집, 강 씨네 집, 막걸릿집, 김 목수네 집 (은하미용실)
잊히기 전에, 더 늦기 전에 1968년 전후 생활상을 서투나마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국민학교 입학 전후 꼬맹이 눈으로, 가급적 그때 언어로. 저물어 가는 저와 새 시대를 살아가는 자식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 한때는 이런 시절이 있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