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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삼거리에서 Jan 12. 2020

칠공주 다음 낳은 첫아들

응답하라 1968 - 가족 편


-- 여자가 아기를 낳았는데 문에 금줄을 내걸지 않고 아기가 보이지 않으면 아기가 죽어서 나오거나 문제가 있는 아이였다. 갓 낳은 아기를 아무도 모르게 내다 파묻었느니 똥뚜간에 버렸느니 그런 얘기가 돌았다. -- 




쌀집은 칠공주다. 말 그대로 딸이 일곱. 아들 하나 보려는 불굴의 의지로 칠전팔기 드디어 첫아들을 보았다. 헌데 소아마비다. 아주 심한. 걷지 못하고 사지로 땅을 짚고 기는 병신이었다.

병신 아이는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육이오 전쟁이 끝나고 15년 지나니 집마다 아이들이 넘쳤고 세 끼니 먹이기도 벅찬데 병신까지 거둘 여력이 없었다. 여자가 아기를 낳았는데 문에 금줄을 내걸지 않고 아기가 보이지 않으면 아기가 죽어서 나오거나 문제가 있는 아이였다. 갓 낳은 아기를 아무도 모르게 내다 파묻었느니 똥뚜에 버렸느니 그런 얘기가 돌았다.   

쌀집은 그럴 수 없었다. 딸 일곱 후에 얻은 첫아들이고, 소아마비는 크면 어느 정도 낫기도 하는 병이었다. 이미 여덟을 낳아 더 아이를 가진 들 아들을 볼 자신도 여력도 없었다. 대를 이을 유일무이한 아들이었다. 쌀집은 아들을 키웠다. 동네 사람들은 쌀집이라 쌀이 넉넉하니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쌀집 사정이 어떻든 그 애는 자라면서 동네 아이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아이들이 보기에 영락없는 짐승이었다. 네 발로 땅바닥을 기었을 뿐만 아니라 어어 할 뿐 말도 못 했다. 기는 애를 새꼬락지로 목을 매어서 개처럼 끌고 다녔다. 동네 어른들은 그걸 보고도 당연하다는 듯이 막지도 아무런 말도 안 했다. 그 애 엄마, 아부지도 아이들을 혼내지 않았다. 정 심하면 아들을 껴안아 들고 집안으로 옮겨 놓을 뿐이었다. 방에만 가둘 수 없기에, 혼자서 자라선 안 되기에 함께 어울려 보라고 일부러 밖에 내놓은 거였다. 동네 애들은 서로 이름을 다 알았지만 그 애만은 이름을 몰랐고 병신이라고 불렀다.

그 애 빼고 가매기 삼거리에 열댓 집 아이들은 다 튼튼했다.  어른들은 다 젊었고 환갑 지난 노인은 없었다.

1968년경 꼬맹이 때. 그땐 그랬다.






그때는



신체 일부, 특히 사지가 외관상 망가지거나 없는 사람을 병신이라 했다. 개 병신이야. 어디가? 응, 팔 병신. 그 정도 의미였다. 다리를 절면 다리병신, 눈이 멀면 눈 병신. 멀쩡한 사람에게 병신은 욕으로 쓰였다. 아이들은 병신 외에 달리 표현할 용어 자체를 몰랐다. 어른들도 딱히 다른 표현을 안 했다. 다만 비하의 의미가 담겨서 당사자가 없는 데서 쓰는 말이지 대놓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지금은


소아마비보다 심한 뇌성마비란 걸 안 건 성인 되고서도 한참 후였다. 90년대 이후 뇌성마비 아이를 기르는 사람들이 면서 사회에 노출되고 기사화되면서 2000년대 이후에 알게 되었다.

병신이란 말은 10년여 지나 칠팔십 년대쯤 불구자, 90년대경 장애인, 2000년대 들어 장애우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경제 발전과 더불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게 된 거다.


아픈 기억이다. 쌀집 아들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그렇다고 잘못했다는 말도 못 한다. 당사자로서 너무나 쓰라렸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기에.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 정신지체는 의외로 많다. 고교 반창 61명 중 2명이 그런 아이를 낳았고 길렀다. 아파트에서 그런 아이를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재정 부담, 정신 고통은 오롯이 부모 몫이다. 지원이 있지만 매우 제한적이고 혜택을 보는 가정은 극소수다. 노인병에 대한 정책은 강화되어 전 국민이 혜택을 보지만 신생아 난치병은 손을 놓고 있다. 정책과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아니면 적자생존의 정글인 60년대와 다를 바 없다. 그때처럼 내다 파묻을 수도 없고 버릴 똥뚜간도 없지 않은가. 한 친구 아이는 30세 가까이 살다 죽었고, 다른 한 친구 아이는 30세 넘어도 뇌 외에는 건강하다. 한 친구는 소원을 이루었다. 그런 아이를 둔 부모의 소원은 하나. 자식보다 하루만 더 사는 거다. 아무도 건사해 줄 사람이 없기에. 하루하루를 전투 치르듯 사는 애환을 듣다 보면 절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이런 거까지 기록해야 하나 고민이 있었습니다. 한 개인과 가족과 시대의 상처이자 시대의 비극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걸 빼고 그때 그 시절의 실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기에 세상에 내놓기로 했습니다. 육이오 때 쌀이 없어 밥을 굶었다니까 손자가 그랬다지요. 왜요? 라면 끓여 먹으면 되잖아요. 그건 아니니까요.  


이 글을 빌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너무나 마음 아팠을 부모님께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형, 내가 정말 잘못했어. 진심으로 미안해. 그리고 이제 형이 서서 걸어 다니는 걸 보면 참으로 기뻐. 어렵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모습이 남들에겐 어색해 보여도 형에겐 기적이라는 걸 난 알아. 그리고 그땐 두 살 형인 지도 몰랐어. 형, 진심으로 미안해. 그리고 내가 사죄할 수 있게 지금껏 살아줘서 고마워.





잊히기 전에, 더 늦기 전에 1968년 전후 생활상을 서투나마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국민학교 입학 전후 꼬맹이 눈으로, 가급적 그때 언어로. 저물어 가는 저와 새 시대를 살아가는 자식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 한때는 이런 시절이 있었노라고.




2020.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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