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밤에 와 폭우가 퍼부으면 아부지가 식구들을 다 깨운다. 온 가족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 집이 떠내려갈까 봐. 아부지는 밤새 국방색으로 아래로 긴 ㄱ 자 군용 후라쉬를 들고 들락날락 개울 다리 옆 축대를 비추고 또 비추고. 우린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하고.
개울. 걸어서 10분 거리 육판바위 즉 육조판서바위 위쪽 어디선가 시작된다. 사방이 민둥산이어서 폭우는 토사와 함께 바로 개울로 흘러든다. 우리 동네에 이르러서 기태네 집에서 한 번 굽어서는 동네와 앞산 사이를 직선으로 흐르다가 축대 아래를 어루만지면서 남에서 서로 방향을 튼다. 물은 목욕해도 좋을 만큼 맑다. 발목 깊이로 얕으며 가장자리는 대부분 모래톱이거나 어쩌다 자갈이다.
폭우에는 돌변한다.
양이 다르다. 개울 옆길 턱까지 어른 한 길 높이로 꽉 찬다. 질이 다르다. 흙탕물로 범벅이 돼서 성난 사람 얼굴처럼 온통 벌겋다. 힘이 다르다. 통나무 건 뭐건 닥치는 대로 휩쓴다. 수십 명이 수백 년된 나무 기둥을 들고서 성문을 깨는 거보다 셀 거다. 빠르기가 다르다. 비가 내린 만큼 바로 불어서 100미터 달리기 선수인 양 내달린다.
다리. 철근 공그리. 개울을 가로지른다. 폭이 좁다. 군인 트럭 두대가 동시에 마주 오면 옆면이 서로 긁힐까 안 긁힐까 상상한다. 하도 많이 생각해서 그런 장면이 꿈에 나타날 정도. 인도는 없다. 차 없을 때 지나면 되니까. 축대 쪽은 어른 키높이, 반대 편은 우리 키 보다 조금 높다.
축대. 개울물을 정면으로 맞는다. 다리에 바짝 붙어있다. 다리 높이에 어른 두 명이 양팔 벌린 길이다. 노트만 한 돌을 다이아몬드형으로 세워서 얼기설기 수십 개를 쌓아 올렸다. 외겹이고 그 위는 앞산으로 가는 흙길이다.
우리 집. 다리 입구에, 개울에 붙여서 여느 집들처럼 나무 기둥을 세워 집을 지었다. 직선으로 개울, 축대, 신작로, 그다음이 우리 집 한 채뿐.
밤새 태풍에 폭우가 내리면,
나는 새벽녘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다리로 나가서 축대부터 살펴본다. 벌건 불기둥 같은 물기둥이 축대를 있는 있는 대로 들이친다. 큰 파도가 일고, 그 파도를 물기둥이 다시 때린다. 쉼 없이 처댄다.
무섭다.
축대에서 다이아몬드 이빨이 하나라도 빠지면 끝이다. 거대한 물기둥이 그 구멍을 이리저리 후벼대면 축대는 금방 무너진다. 그다음엔 신작로를 뚫고 우리 집을 바닥부터 집어삼키는 건 시간문제다.
불안하다.
이러니 밤새 폭우가 내리면 아부지가 온 식구를 깨울 수밖에. 겁을 먹고 밤이 가길 기다릴 수밖에. 여름이면 두어 번은 겪는다.
태풍은 비가 사나워서 무섭다. 장마는 귀찮을 뿐 무섭지는 않다. 태풍은 해롭다. 장마는 이롭다. 어른들이 태풍 후에 축대 틈을 메운다. 장마 비 올 때는 변소를 깨끗이 비운다.
1968년경 꼬맹이 때. 그땐 그랬다.
세대 통역
공그리 = 콘크리트 concrete
지금은
개울은 콘크리트로 복개했다. 그 위로 포장도로. 다리는 필요 없으니 사라지고.
축대도 복개하면서 없어졌다. 축대 자리는 동성교회 입구에서 복개천이 꺾인 곳이다.
우리 집 터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로로 편입되었다.
집은 스레트 지붕 들어내고, 부로꾸 벽 헐어내서 각기목으로 된 뼈대만 남겼다. 그리곤 동네 어른 넷이 한 귀퉁이씩 나눠 번쩍 들어서 약 60미터 옮겼다. 아부지는 다시 지붕 올리고, 판자로 벽을 판자로 붙여서 창고로 썼다.
은하미용실 접한 부분이 개울. 물길은 우에서 좌로. 급히 꺾인 곳에 축대. 우리 집은 물길 꺾이기 전 직선으로 도로 가운데쯤.
잊히기 전에, 더 늦기 전에 1968년 전후 생활상을 서투나마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국민학교 입학 전후 꼬맹이 눈으로, 가급적 그때 언어로. 저물어 가는 저와 새 시대를 살아가는 자식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 한때는 이런 시절이 있었노라고.
2016. 07.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