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부지를 희생했다. 풍이 왔을 때 우황청심원 먹였다. 병원으로 모시지 않았다. 사랑 받고 사랑했지만 여섯 중 출가한 둘 외에 남은 자식 넷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했다. 장남인 나와 남동생 대학을 마쳐야 했다. 택지 450평과 사는 집 한 채, 세준 집 두 채, 1층 상가 한 채 있었지만 팔지 않았다.
아니 매도할 수 없는 상태. 사방 지어서 땅을 잘라낼 수 없는 상태.
무지였다. 1982년. 풍이란 건 알았다. 우황청심원이 약이라고, 병원 가도 못 고친다고 다들 그런다. 뇌졸중, 뇌출혈, 뇌경색. 이런 건 세월 지나서 알게 되었다. 원인 질병인 당뇨는 처음 듣는다. 부자 병.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이고 잘 먹는 게 약이라고. 아프지 않으니 병이라 하는 게 이상했다. 한약방 수없이 많고 개인 내과 의원 두엇인가. 풍을 고친다는 상상도 못 해. 종합병원은 기독병원 하나. 농약 먹고 자살하면 실려 가거나, 큰 부상일 때 꿰메는 병원으로만 알고 크게 다르지도 않다. 살면서 이제껏 단 한 번 병원 가본 적 없다. 아부지 건사하랴 자식 학비 대랴 엄마는 연약한 여자의 몸을 갈아야 했다. 아부지와 같이 늘 맞벌이 했는데 병으로 자리에 누우니 독해져야 했다. 새벽에 시장 나가 장사하고 밤 늦게 귀가해 아부지 챙기고. 그러다 돌아가신다. 1989년. 다 아부지 명의. 다 엄마 거지만 법정 지분 상속.
엄마 독거. 같은 생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서울로 이사 와 합치자고 3년 설득. 1991년. 내가 귀향한다. 수 년 후 도로 확장. 토지 도로 편입. 보상가 공시지가. 터무니없이 낮다. 최대한 버텨 올려서 보상 받는다. 다 엄마 거지만 엄마와 상의해 보상금을 형제들에게 지분대로 나눠준다. 단 남은 땅 100여 평 소유권 내게 이전하기로. 내가 엄마 모시고 있고 모셔야 하기에. 살던 집 없어졌다. 엄마는 보상금으로 내 집, 막내 동생 집으로 근처 아파트 덜컥 샀다. 내 명의, 동생 명의.
나 퇴직. 1997년. 모은 돈 1억과 나누고 남은 보상금으로 남은 땅 100평에 상가 짓기로. 헌데 땅 모양 이상해 앞에 붙은 짜투리 16평, 뒤에 붙은 땅 42평을 사서 붙인다. 2층 건축. 필생의 사업 대실패로 전재산 파산 직전. 기사회생해 경매 안 넘어가고 되찾는다. 엄마는 시장서 소일 삼아 장사하다 70세 은퇴.어머니 그전부터 홍보관 출입. 브이아이피 최고 대우. 그 돈 전부 홍보관에 갖다 주니까. 아부지 풍, 자식들 연달아 풍. 겁 먹는다. 값 비싼 건강식품, 기구. 한 번에 일곱 개씩 산다. 당신, 그리고 자식 여섯. 여왕 대우. 모른 척. 나 못 하는 효도 대신 받으시라고. 이전 상가나 신축 상가나 세 수입 전부 다 엄마 드린다. 나는 관리만. 내 돈도 보태 용돈 드리고 생신, 결혼 등 집안 대소사 돈은 다 내 돈으로 부담한다. 사업이 망하건 흥하건 생활비 월 800만 원. 벌이가 좋아서 돈에 구애 받지 않고 썼다. 빚을 져도 쓸 건 썼다.
엄마 노환으로 척추 주저앉아 처음 병원 입원. 2015년. 아무도 한 푼도 안 낸다. 셋은 어려우나 둘은 여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내라 한다. 나중 후회 않으려면. 작은누나. 시균이 니가 부모 재산 다 빼앗았다고, 그러려고 고향 내려온 거라고.청구서 작성. 엄마 거, 엄마 쓴 거. 대충 계산해도 쓴 게 몇 억 훌쩍 초과. 네 논리면 뺏기는커녕 내가 빼앗겼으니 그 돈 내놓으라 호통. 아무말 않는다. 헌데 돈은커녕 문병 한 번 안 온다. 숨 거두기 직전 코빼기 내밀길래 병실 복도 떠나도록 맹비난. 간호사들 소란 피는 나는 두고 누나를 쫓아 내보낸다. 죄송하다 하니 괜찮다고. 가족 중에 꼭 그런 사람 있다고. 담배 피러 밖에 나가니 잘못했어, 잘못했어. 큰소리로 내게 외친다. 자리 잠깐 비운 사이 엄마 곁에 앉았다. 얼굴 봤으니 내쫓는다. 경고.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마라. 누나고 매형이고 죽여 버린다. 엄마 장례가 너 부부 장례 되고 싶으면 낯짝 디밀어라. 엄마가 말이나마 할 수 있었다면 이리 않았다. 지만 보고 죄 씼으려고. 엄마는 얼마나 제 년 얼굴보고 싶었을까. 손 한 번 잡고 싶었을까. 하실 말씀 있었을 텐데. 오늘 내일 오락가락 상태에 엄마 보겠다고? 말도 못 하고 손도 못 쥐는데. 이미 죽어 썩고 있는 장례식은 왜 오는데. 2015년.
누나 고생 많았다. 1톤 트럭에 반찬 싣고 서울 동네 동네. 아파트에 눈 떠 형편 풀린다. 운도 따른다. 법원 동생이 서울시 도로가 시아버지 소유임을 찾아내 알려주어 큰돈 보상. 잘 산다. 헌데 평생 부모에 원망의 뿌리를 키우고 살았다. 지 키워준 거 한 번 고맙다 말 않고, 부모에 용돈 한 번 안 드리고, 병원비 한 푼 안 보내고. 누나, 매형 쪽 부의금 들어온 거 한 푼도 안 줬다. 얼마인지 알려는 준다. 엄마 치료비 받은 거로 치겠다고. 불효 씻을 기회 준 거 고맙게 알라고. 끽소리 않는다. 장례식에 참석했길래 엄마를 위해 허용은 했다. 이후 서로 제정신. 원만하게 지낸다. 누나에게 고맙다. 여동생 풍 와서 요양원. 누나가 보호자. 내가 팽개친 사이 누나가 나 대신. 이후 내게 여동생 넘겼고 기꺼이 받았다.
엄마가 아부지를 희생한 거 아니다. 내가 아버지를 희생했던 거다.오늘에야 글로 찬찬히 돌이키니 엄마로서는 방법이 없었던 거. 듣도 보도 생각도 못 한 대사건. 건강하던 멀쩡하던 50세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다니. 친척도 없고 장남은 군에 가 있고 여자 혼자 얼마나 놀랐을까. 살림만 하던 게 아니고 남편과 동업. 매일 벌어야 하는데. 남편이 없으면 장사 못 하는데. 얼마나 당황했을까. 엄마는 홀로 꿋꿋이 헤쳐나갔다. 손은 부르트다 못해 두꺼비 거죽이 되었다. 재산을 지켰다. 다 당신 것이지만 자식들에게 지분대로 나누어 주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엄마에게 넌지시. 엄마 땅 지분 내 명의로 하면 어떨까. 나중에 형제간에 얼마 안 되는 거로 큰 분쟁 될 거 같아. 엄마는 두 말 않고 인감도장을 내게 주었다. 평생 나를 믿었듯이 마지막까지 그리하였다.
ㅡㅡㅡ
부의 이전 1.
아부지 57세 가셨다. 재산 분할. 엄마 1/4, 장남 나 1/4. 나머지 2/1을 다섯이 똑같이. 1989년 당시 상속법. 그리 등기부등본에 박힌다. 몇 년 후. 도로 보상. 그 비율대로 나누어 준다. 그러면서 쪼가리 땅, 쪼가리 지분이지만 지분 내가 흡수. 분쟁의 원인 제거. 엄마 가시기 전. 엄마 지분 내 거로. 돈은 따로 드리지 않는다. 1991년부터 2015년까지 26년 엄마 모시고 살았다.
부의 이전 2.
물려받은 땅 100평, 내가 벌어 사서 붙인 땅 100평. 합 200여 평. 그 땅 위로 작은 2층 상가.
나 베이비부머 63세. 아내 56세. 평균수명 남 82세, 여 86세. 나 19년, 아내 30년이나 남았다. 큰아들 30세, 작은아들 28세. 각 60세, 58세 되어야 그 재산 쓸 수 있다. 그때까지 지킬 수는 있을까? 나, 아내 병 걸려 자리 누우면 의료비는? 건강보험, 실손보험 있으니 크게 축나지는 않겠다. 간병비. 한달 400만 원 년 5천만 원. 둘이면 1억. 그래도 남기는 하겠다. 헌데 30년 후라니.
자식 나이 60세, 58세라야 부의 이전. 나 28세 첫 상속.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서류로. 두 번째. 35세. 토지 보상. 세 번째. 40세. 담보 대출해 사업하다 망했다. 그후 복구했지만.
나는 형편나은 편. 국민연금도 평균 이상. 자식에게 부양 부담 안 준다. 얼마간 도움도 준다. 2년전 심근경색, 작년 위암 진단. 보험금 목돈 타서 일부 분배. 얼마간 월 송금도. 30년 후 늙어 백 억이면 뭐 하나. 당장 써야 하는데. 대학 교육까지만 돈 대겠다고. 이후 결혼, 집 마련 알아서 해라, 단 너희에게 부양 부담 안 준다. 진작 선언했다. 그리곤 여유 생기면 도와준다. 상당수 나 같지 않다. 자식 지원 받아야 할 이 많다.
장수가 복 아니다. 부모 가면 하다못해 숟가락 하나라도 남긴다. 오늘날 부의 이전이 안 되고 있다. 청년은 이래저래 어렵다. 나. 삶이 부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