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열심히 살자는 당연히 여긴다.
열심히 죽자는 낯설다.
나도 처음 해본 말.
삶과 죽음이 하나라면
삶만큼 죽음이 소중하다면
열심히 죽어야 한다.
열심히 살아야 하듯이.
열심히 죽다니.
영 거북하시다면
열심히 존엄하게 죽자.
오늘날 죽음에 열심 않으면 개죽음만 못하다.
애견은 자연사한다.
사람은 자연사 못 한다. 병원서 갖은 고통으로 살린다.
얘견 마지막은 집에서 가족이 함께 한다.
사람은 병원 중환자실이나 병동 복도에서 가족 없이 홀로 죽는다.
백에 구십구 명이 그러하다.
시대가 180도 바뀌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 이병철 회장 마지막 몇 년 보지 않았나.
식물인간.
열심히 살되 죽음에 열심 않아서다.
하물며 범인이야 말해 무엇하리오.
열심히 죽음을 준비 않으면 비참하게 죽는다.
열심히 죽자.
https://brunch.co.kr/@sknohs/961
https://brunch.co.kr/brunchbook/skno20
이 글 **〈열심히 죽자〉**는 파격적인 표현 속에 깊은 현실 인식과 윤리적 통찰을 담은 글입니다. 감상과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심히 살자"는 익숙한 구호에 비해 **"열심히 죽자"**는 말은 낯설고 불편합니다.
→ 그 낯섦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직면시키는 방식은 언어의 힘을 빌려 죽음이라는 금기를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나도 처음 해본 말.”
→ 작가 자신도 이 말의 파괴력을 인식하고 있으며, 독자와 함께 이 낯섦을 마주하려 합니다.
→ 이 점에서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면 / 삶만큼 죽음이 소중하다면 / 열심히 죽어야 한다.”
→ 삶과 죽음의 대칭성을 전제로, ‘죽음도 삶처럼 준비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주장을 담고 있음.
→ 생의 미학이 있다면 죽음에도 죽음의 미학, 죽음의 윤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열심히 죽음에 열심 않으면 개죽음만 못하다.”
“사람은 자연사 못 한다.”
→ 현대 의료 시스템에서의 연명치료, 병원 중심 임종, 존엄사 부재라는 현실을 비판함.
“애견은 집에서 가족 품에 죽지만, 사람은 병원 복도에서 혼자 죽는다.”
→ 감정적으로 매우 강한 비유로, 인간 존엄의 퇴색을 일깨움. 이 구절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임국운—임종실 국민운동〉**과 연결되며, 존엄한 임종 환경 마련을 위한 구체적 실천 방향 제시.
〈병원에서 살아남기〉 브런치북과도 맥락을 이룸. 이 글은 일종의 사상적 초석 혹은 철학적 명제에 해당하며, 다른 실용적 글들의 이념적 토대가 됩니다.
이 글은 하나의 문장—"열심히 죽자"—로 시작해 우리 사회가 회피해 온 문제를 똑바로 들여다봅니다.
짧은 글이지만, 윤리, 의료, 가족, 죽음의 존엄 등 다양한 주제를 하나의 흐름 속에 녹여냅니다.
형식적으로는 시적 호흡과 단문을 통한 여운, 내용적으로는 현실 비판과 철학의 결합이 돋보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존엄하려면, 우리는 삶처럼 죽음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