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24개월인가 병장 다니 소대 고참 둘마저 제대해 내가 왕고참이다. 전역은 6개월 남았다. 상황병은 2교대라 각 12시간씩 근무.
ㅡㅡ상황병 임무
소초 막사 내 귀퉁이 반 평 상황실서 딸딸이 전화로 상급부대와 송수신.소대장 찾으면 전화 바꿔주고.
소대원 경계 근무 투입, 철수 시 탄약 지급, 회수 및 탄약고 관리.소초 막사 내 상황실 바로 옆이 탄약고.
야간 불침번. 육이오 전쟁 직후인가 무장 북한군이 잠입해 잠자던 소대원을 전멸하다시피 했다는 전언. 복무기간 중 이웃 중대 신병 월북 사건. 하시라도 재발 말라는 법 없다.
겨울에는 막사 기름 난로로 난방. 기름 유입이 조금만 늘어도 대장간에 달군 쇠처럼 난로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화재 위험 커서 매우주의해야.
야간 2교대 근무자 중 1조 24시 철수하면 라면 끓여주기.
별로 할 일 없지만 소홀히 하면 소대 전체에 위험을 초래하거나나라가 발칵 뒤집힐 일 언제든 발생 가능. 최전방 병으로선 가장 중요한 임무다.
ㅡㅡ시간이 남으니까 임무 외로
근무 끝나면 소초 옆 마당에 나가 태권도 1시간.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뒤후리기, 정권 단련 즉 푸시업, 쪼그려 앉아 뛰기, 관절 및 근육 풀기.
목공 잔기술 활용해 콘크리트 초소 하나와 주간 초소 둘에 문틀, 문짝, 창, 창틀 짜서 쫄따구들 한겨울 바람막이해주기도 하고.
삼각자 들고 문짝 짜는 주인공
미확인 지뢰지대 가장자리에 덫을 놓으라 시킨다. 밧줄로 연결해 밤새 동물이 잡히면 도루코 면도날로 껍질 벗겨취사병 시켜 국 끓이라 해 전 소대원 회식시켜주고. 한번은 누런 오소리가 잡혀 전소대원 고깃국 파티. 오소리 쓸개만 따로 떼어내 실로 묶어 상황실 탁자 아래 그늘에 걸어 말렸다. 휴가 때 풍으로 쓰러진 아부지 드리고. 단, 노루는 사고를 부른다고 재수 없다고 미련 없이 버린다. 최전방서 사고란 지뢰 밟아 폭발, 총기 자살이나 난사, 내무반에 수류탄 투척 같은 인명 사고를 뜻하므로. 산 자도 영창 가거나 간부는 진급 누락 불이익.
그래도 한가하다.
제대하고 평생 뭘 할지 고민할 때가 된 거다. 대학 1년 마치고 입대해 3년 꼬박 남았으니 시간은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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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할까?
정치는 진작 포기.
보복 정치 싫어. 잡아가고 잡혀가고, 구타, 고문 병신 되고, 죽이고 죽고. 고교 졸업 때쯤 정치하려면 육사 가라는 말 듣는다. 군인이 무슨 정치? 그리고경상도, 전라도 쌈 아녀? 강원도가 그 판에 껴서 멀 해?
원주 토박이가 대통령 됐어도 군바리 허수아비. 끌어줄 선배도 후배도 없잖아.
사법고시?
합격하면 뭘 하는 거지? 판사나 검사 되는 방법은 안다.판, 검사는 뭘 하는 거?범죄자 만나는 게 일이네?평생 범죄자와? 이건 아니다.
그럼 기자?
인기 기자가 정치부, 사회부 기자란 건 안다. 정치 기자? 텔레비전 보면 국회서 의원들 맨날 쌈박질할 때 한마디라도 들을라고 마이크 대고 취재 경쟁.그럴 바에야 직접 정치하겠다.
사회부 기자? 경찰서 가서 살아야 하는 거 아녀? 뉴스거리 되려면 더 흉악한 거, 더 지저분한 거 찾아야 하는데? 이런 건 대개 밤에 일어나니 경찰서에서 밤새야 하고. 내가 시체 물어뜯는 하이에나? 이것도 아니다.
그럼 PD?
음, 이건 할 만하겠군.이쁜 연예인도 만나고. 헌데, 드라마 보면 맨날 시시콜콜한 사랑,불륜, 수사, 범죄물.아님 오락.그게 나라와 내 발전에 먼 도움? 아나운서는 쉰 목소리에다 발음이 션찮으니 택도 없고.
그렇게 당시 선망의 직업인판검사, 기자, PD 셋을 제하니 마땅히 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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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내가 하고 싶던 게 뭐였지?
엄마, 아부지 고생하셔서 어릴 때부터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었잖아. 그래서 고등학교 때 큰돈 벌고 싶었잖아. 그래서 이과반서 몰래 문과 준비했잖아. 그래. 초심으로 돌아가자.
근데 돈 벌라면?
대기업 들어가서 큰 회사 한번 경영해 보자.월급이야 먹고살 만큼은 줄테고,큰 회사 사장돼서 회사를 10배, 100배로 키우고 나면 한 재산 마련해 주지 않겠어? 그래 봐야 대기업에선 푼돈이니까. 아님, 사장되면 월급 많겠지?
언제 사장돼?
늦어도 50세에는 돼야 한 10년 바짝 키우겠지.
그럼 사장될 자격은? 전문 지식은? 성대 1년 다니면서 무역학 배웠고 그전에 회계사 시험 준비한다고 회계 중급까지 떼었고.고대 영어영문학과니 영문법, 영작문 갈고닦고 커리큘럼엔 없지만 영 회화는 국제적으로 놀려면 필수니까 별도로 익히면 될 거고. 젤 중요한 경영학은 부전공하면 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어 좋잖아.
안 죽고 안 죽이고 쌈박질 안 해도 되고, 평생 범죄자 볼 일 없고, 흉측한 사건들 파헤치러 안 다녀도 되고, 드라마 나부랭이 안 만들어도 되고.대기업이 돈도 많이 주고인기도 있고.우리나라가 크려면 경제가 발전해야 하는데 큰 회사 맡아서 키우면 작으나마 보탬될 테니 나름 보람도 있겠군.
그렇게 군 제대 6개월 남기고 진로 고민 끝에 난 대기업의 큰 회사를 키우며 나도 같이 성장해 보기로 작정한다.
늘 그랬다.
누구든 상의는 없다. 진학이든 진로든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하고, 내 멋대로 해보고 실패해 보고. 다시 일어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