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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살어리오 04화

야망의 이끼

by 가매기삼거리에서


저 처절하게 살아요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잎은 작고 꽃은 더 작으며 줄기는 없기도 있기도 합니다

변변한 뿌리조차 못 갖추어 오죽하면 헛뿌리라 하고 씨앗마저 만들 능력 못 되어 먼지처럼 날리는 포자로 번식합니다

해서 남들처럼 독채에서 번듯하게 살지 못 하고 실타래인 양 똘똘똘똘 뭉쳐서 서로 껴안고 평생 부대껴야 합니다

가랑비 한방울이라도 움켜쥐고 폭우면 언제 다시 만날까 스펀지처럼 잔뜩 머금습니다

이렇게 나 하나 살기도 버거운 형편이라 남의 씨가 내 등 올라타 뿌리내리는 일은 용납할 여유가 없습니다


저 어디건 가리지 않아요


나무가 좋긴하지만 흙, 돌, 바위도 무차별 공략합니다

산 나무 죽은 나무 벤 나무, 큰 돌 작은 돌 각진 돌 따지지 않습니다

산자락부터 능선, 바닥부터 공중, 수평 수직 경사, 평면 곡면, 남북이고 동서고 막무가내입니다

심지어 동굴, 샘처럼 음습한 데서는 우주의 태양과 지구의 중력마저 도외시한 채 천장에 붙어서 거꾸로

그늘 선호하나 뙤약볕도 마다않지요

한여름은 바닥에 붙어서 서늘하고

맹추위는 푹신한 거위털처럼 두툼하니

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갑니다

물에서 살다가 뭍으로 나왔다는데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은 없습니다

여하튼 전진은 있어도 후퇴란 말은 제 사전에는 없습니다


다만 철칙 하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하게 해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터를 넓혀갑니다



ㅡㅡㅡ



삶이 구질구질하다고요?


천만에,

딴에는 좀 나는 청춘이랍니다

뭉터기로 자라서 전체가 하나이니 보자기라도 펼친 듯이 잎과 꽃이 주위에서 가장 넓고 거대합니다

헛뿌리라 풀만도 못하고 포자나 날리는 버섯 같은 신세지만 암수 구분만은 뚜렷해

두근두근 사랑에 설레고 나눌 줄 알지요

상록수마냥 사시사철 푸른 젊음을 뽐낸답니다

억세고 비루하게 살아도 피부만큼은 숲에서 최고 촉촉하고 보드랍지요

이렇듯 저는 숲에서 가장 작지만 제일 커다랗고, 가장 연약하지만 제일 강하답니다


억겁을 산 만큼 다시 억겁을 사는 게 꿈입니다

다들 그렇듯 잎, 꽃, 뿌리, 가지 커다랗게 화려하게 변이할 세월이야 넉넉했지만 남들과 정반대로 저는 꿈을 위해서 욕심 꾹꾹 누르고 또 누르고 다시 누르며 오늘도 처절하게 사는 이유랍니다


젠장, 말이 너무 많았군

억겁만에 처음 사람이란 게 말 붙이니 흥분했소이다

기왕에 안면에다 말까지 텄으니

이제 산 가거든 아는 척은 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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