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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오
04화
야망의 이끼
by
가매기삼거리에서
Sep 11. 2021
저 처절하게 살아요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잎은 작고 꽃은 더 작으며 줄기는 없기도 있기도 합니다
변변한 뿌리조차 못 갖추어 오죽하면 헛뿌리라 하고 씨앗마저 만들
능력 못 되어 먼지처럼 날리는 포자로 번식합니다
해서 남들처럼 독채에서 번듯하게 살지 못 하고 실타래인 양 똘똘똘똘 뭉쳐서 서로 껴안고 평생 부대껴야 합니다
가랑비 한방울이라도 움켜쥐고 폭우면 언제 다시 만날까
스펀지처럼 잔뜩 머금습니다
이렇게 나 하나 살기도 버거운 형편이라 남의 씨가 내 등 올라타 뿌리내리는 일은 용납할 여유가 없습니다
저 어디건 가리지 않아요
나무가 좋긴하지만 흙
, 돌, 바위도 무차별 공략합니다
산 나무 죽은 나무
벤 나무
,
큰 돌 작은 돌
각진
돌 따지지 않습니다
산자락부터 능선, 바닥부터 공중,
수평 수직 경사, 평면 곡면, 남북이고 동서고 막무가내입니다
심지어 동굴, 샘처럼 음습한 데서는 우주의 태양과 지구의 중력마저 도외시한 채 천장에 붙어서 거꾸로
그늘
선호하나 뙤약볕도 마다않지요
한여름은 바닥에 붙어서 서늘하고
맹추위는 푹신한 거위털처럼 두툼하니
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갑니다
물에서 살다가 뭍으로
나왔다는데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은 없습니다
여하튼 전진은 있어도 후퇴란 말은 제 사전에는 없습니다
다만 철칙 하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하게 해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터를 넓혀갑니다
ㅡㅡㅡ
삶이 구질구질하다고요?
천만에,
딴에는
폼
좀 나는
청춘이
랍니다
뭉터기로
자라서 전체가 하나이니 보자기라도 펼친 듯이 잎과 꽃이 주위에서 가장 넓고 거대합니다
헛뿌리라 풀만도 못하고 포자나 날리는 버섯 같은 신세지만 암수 구분만은
뚜렷해
두근두근 사랑에 설레고 나눌 줄 알지요
상록수마냥 사시사철 푸른
젊음을 뽐낸답니다
억세고 비루하게 살아도
피부만큼은 숲에서 최고 촉촉하고 보드랍지요
이렇듯 저는 숲에서 가장 작지만 제일 커다랗고, 가장 연약하지만 제일 강하답니다
억겁을 산 만큼 다시 억겁을 사는 게 꿈입니다
다들 그렇듯 잎, 꽃, 뿌리, 가지 커다랗게 화려하게 변이할 세월이야 넉넉했지만
남들과 정
반대로
저는 꿈을 위해서
욕심 꾹꾹 누르고 또 누르고 다시 누르며 오늘도 처절하게 사는 이유랍니다
젠장, 말이 너무 많았군
억겁만에 처음
사람이란
게 말 붙이니 흥분했소이다
기왕에
안면에다 말까지 텄으니
이제
산 가거든
아는 척은 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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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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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매기삼거리에서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The Birth Revolution 출산혁명
저자
혁명가, 사상가, 철학가, 작가, 시인, 자유인. 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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