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매기삼거리에서 Sep 11. 2021

야망의 이끼


저 처절하게 살아요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잎은 작고 꽃은 더 작으며 줄기는 없기도 있기도 합니다

변변한 뿌리조차 못 갖추어 오죽하면 헛뿌리라 하고 씨앗마저 만들 능력 못 되어 먼지처럼 날리는 포자로 번식합니다

해서 남들처럼 독채에서 번듯하게 살지 못 하고 실타래인 양 똘똘똘똘 뭉쳐서 서로 껴안고 평생 부대껴야 합니다

가랑비 한방울이라도 움켜쥐고 폭우면 언제 다시 만날까 스펀지처럼 잔뜩 머금습니다

이렇게 나 하나 살기도 버거운 형편이라 남의 씨가 내 등 올라타 뿌리내리는 일은 용납할 여유가 없습니다


저 어디건 가리지 않아요


나무가 좋긴하지만 흙, 돌, 바위도 무차별 공략합니다

산 나무 죽은 나무 벤 나무, 큰 돌 작은 돌 각진 돌 따지지 않습니다

산자락부터 능선, 바닥부터 공중, 수평 수직 경사, 평면 곡면, 남북이고 동서고 막무가내입니다

심지어 동굴, 샘처럼 음습한 데서는 우주의 태양과 지구의 중력마저 도외시한 채 천장에 붙어서 거꾸로

그늘 선호하나 뙤약볕도 마다않지요

한여름은 바닥에 붙어서 서늘하고

맹추위는 푹신한 거위털처럼 두툼하니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갑니다

물에서 살다가 뭍으로 나왔다는데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은 없습니다

여하튼 전진은 있어도 후퇴란 말은 제 사전에는 없습니다


다만 철칙 하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하게 해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터를 넓혀갑니다



ㅡㅡㅡ



삶이 구질구질하다고요?


천만에,

딴에는  좀 청춘이랍니다

뭉터기로 자라서 전체가 하나이니 보자기라도 펼친 듯이 잎과 꽃이 주위에서 가장 넓고 거대합니다

헛뿌리라 풀만도 못하고 포자나 날리는 버섯 같은 신세지만 암수 구분만은 뚜렷해

두근두근 사랑에 설레고 나눌 줄 알지요

상록수마냥 사시사철 푸른 젊음을 뽐낸답니다

억세고 비루하게 살아도 피부만큼은 숲에서 최고 촉촉하고 보드랍지요

이렇듯 저는 숲에서 가장 작지만 제일 커다랗고, 가장 연약하지만 제일 강하답니다


억겁을 산 만큼 다시 억겁을 사는 게 꿈입니다

다들 그렇듯 잎, 꽃, 뿌리, 가지 커다랗게 화려하게 변이할 세월이야 넉넉했지만 남들과 반대로 저는 꿈을 위해서 욕심 꾹꾹 누르고 또 누르고 다시 누르며 오늘도 처절하게 사는 이유랍니다


젠장, 말이 너무 많았군

억겁만에 처음 사람이란 게 말 붙이니 흥분했소이다

기왕에 안면에다 말까지 텄으니 

이제  가거든 아는 척은 하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