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수묵화

G-케어 매니저-8화

by 가매기삼거리에서


새동네는 내 구역이다. 꼬맹이 때 가매기 삼거리 우리동네의 옆동네가 환갑 지나 내 서비스 지역이 된 것이다. 노노 케어. 축복이다. 가매기 삼거리는 역사가 있다. 천안삼거리와 같아서 여기서 동 강릉, 북 춘천, 남 충청과 서울로 갈라진다. 배산임수에 토질이 모래 섞인 마사토라 배수가 잘되어 주변 산 일대가 묘자리로 으뜸이다. 해서 조선 성종은 복란공주를 낳고 그 태를 항아리에 담아 인근에 묻었다. 해서 지금의 태장동. 태를 저장한 동네. 그걸 기념하려고 한양 육조판서가 한꺼번에 가매기에 떴다. 육조판서가 바둑을 두었다는 육판바위가 근처. 지금의 원주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강원감영으로 가려면 삼거리에서 가마에 내려서 걸어야 했다고 해서 가매기 삼거리. 전국향 분기점이라 김정호는 붓 들어 대동여지도에 세 갈래 선을 그렸을 게고, 기록은 없지만 고려, 삼국시대에도 마을이나 주막이 있었을 터이다. 육판바위가 자리한 산에서 졸졸 산물은 가매기삼거리를 지나면서 실개천을 이루어 새동네로 이어지니 태곳적부터이리라.


새동네는 역사가 없다. 육이오 전쟁 나고 새로 생겼다. 해서 새동네. 원주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지금껏 여전하다. 동네라 하기엔 광활하다. 예전에 논이었거나 그랬을 법한 평지. 길이 칠팔백, 폭 백오십여 미터에 북쪽 끝으로 뾰족하다. 새 삶의 터전에 다다른 거대한 노아의 방주. 현대판이라서 길다란 카누형인. 그안으로 방주의 칸처럼 촘촘하게 수 백 가옥. 배의 양쪽으로 차 씽씽 도로가 흐른다. 현충로 8차선 대로 그리고 봉천내 둑 겸 도로인 강변로 2차선. 새동네4길이 중앙선을 긋지 아니한 2차선 폭으로 두 길과 평행으로 중앙을 가른다. 그 길은 실개천을 콘크리트로 복개하고 그 위로 아스팔트를 깔았으니 태고를 덮은 것이었다. 강변로 아래로 새동네1길은 4길과 비슷한 폭, 새동네2,3길은 골목길이다. 현충로쪽 또한. 새동네 전부를 가로로 커팅해 차가 다니는 네개의 길과 사이 사이 골목 또 골목들.


골목은 한 명 들어서면 꽉찬다. 넓어봤자 반 폭 더. 골목 끝에서 저 골목 끝이 보이는 골목은 손에 꼽는다. 그마저 가로로 새 골목이 막아서 거기서부터 다시 세로로 골목들. 골목은 대개 길게 휘어서 거반 가봐야 가롯길이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면 90도 꺾거나 다시 또 90도 꺾거나 그 반쯤 휘거나 그 셋이 섞인 골목도 있다. 심지어 국내 초유이자 마지막일 법한 오 직각 회전 골목. 최후의 한 집을 위해서 다섯 번을 직각으로 오른쪽으로만 꺾어야 했다. 더욱이 그 중간은 삼거리로 갈리고. 골목 안 사거리도 있다. 대로에서 사선으로 한 집 지나자마자 직진, 좌, 휘어서 우. 각 두어 집 지나니 골목 끝. 입구부터 다리 방향을 45도 틀고 진입하는 골목도 다수다. 그 안에서 다리처럼 양갈래로 찢어지기도. 장기의 졸이나 마쯤 되어야 깔딱깔딱 빠져나오지 우마 차나 코끼리 상은 턱도 없다. 가다보면 쪽문인 대문이 정면으로 떡하니 막아서는 막다른 골목도 나타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어서 끝에 다 가서야 그 깊은 속을 알 수 있다. 현란 무쌍한 골목길의 극치미는 가옥이 무슨 계획이란 걸 가진 게 아니고 되는 대로 형편대로 자유롭게 지어졌다는 걸 보여 준다. 골목이라면 좌우로 집의 연속은 당연하지만, 이빨처럼 다닥다닥, 검게 썩은니처럼 으레 폐가가 한두 채 끼어 있다. 그렇게 수 십여 골목. 한마디로 미로. 두 단어로 골목 문화재감.



골목 입구. 안쪽으로 구옥 14채. 사방팔방으로 이런 골목들.



들어서면




없이 이어진 재래 가옥들. 대부분 부로꾸를 쌓고 지붕을 얹은. 바닥은 처음엔 온돌이었다. 부엌과 방 맞닿은 곳 중앙에 아궁이를 둔다. 방에 불 기운이 지나도록 받침돌로 길을 여럿 낸다. 뒤로 처마보다 높이 굴뚝. 받침돌 위로 얇고 넙대대해 판 같은 돌을 연이어 얹는다. 진회색, 보자기쯤 크기나 제각기 다르고 끝은 들쭉날쭉. 그 위로 황토를 물에 되게 개어 돌틈을 막는다. 시험 삼아 아궁이에 볏짚을 태워 본다. 연기가 잘 빠지면 바닥을 통으로 황토를 두툼하게 편다. 며칠이고 충분히 굳으면 온돌 완성. 여기까지가 선조들의 지혜. 테레비 드라마에서 삼국시대부터 아궁이에 나무를 땠다. 70년대부터이리라. 석탄으로 만든 연탄을 때려면 아궁이 아래를 깊이 파야 했다. 연탄 두 장 높이. 보일러가 생기면서 바닥은 불 길 대신에 물 길 파이프로 바뀌었다. 아궁이에서 불 땔 일이 없으니 바닥에 불 길도 굴뚝도 사라졌다. 황토는 시멘트로 바뀌었다. 70년대 중후반부터 수도가 놓였고 이때부터 부엌은 실내에 자리잡는다.


온돌 다음으로 벽을 쌓는다. 전쟁 이후라 처음엔 나무와 못과 망치로 지은 판잣집으로 출발했다. 그다음 벽체와 지붕재를 구분하였다. 벽의 재료는 황토를 잘게 자른 짚과 섞어 물로 되게 개서 한 자쯤 길이 직육면체 틀에 넣고 발로 밟아 찍어 낸 황토벽돌. 그다음 공장이 생겨 황토 대신 시멘트, 모래, 물을 비벼 기계를 써서 찍은 부로꾸. 세로로 큰 구멍 셋과 양쪽으로 굴곡을 주어 쌓았을 때 힘은 받고 재료는 아꼈다. 그다음 랭가. 부로꾸와 재질과 모양은 같되 한 뼘 길이. 그다음 랭가 크기로 진흙을 불에 구운 벽돌. 이것들 공통점은 한 장씩 쌓아 올리는조적. 마지막으로 철근으로 골격을 세우고 거푸집으로 둘러 쌓은 후 레드 믹스트 콘크리트를 레미콘 차로 싣고와 들이부은 철근 콘크니트 구조. 한편 벽 소재, 공법이 무엇이든 문과 창 자리를 비워두고 지붕을 얹은 후에 마감해 집짓기를 마무리 한다.


지붕. 벽 위로 얹는다. 벽체와 달리 얇아 약하다. 게다가 날마다 햇빛, 비를 번갈아 가며 온몸으로 견뎌야 한다. 더욱이 겨울이면 눈이 쌓여 짓누르더니 여름 태풍은 처마부터 들어 올리려 기를 쓴다. 색이 바래고 낡다가 비가 샌다. 그때부터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산다. 그래서 옛집들은 지붕 교체가 잦다. 처음은 판자를 연이어 박고 그 위로 기름 먹인 종이 재질의 루삥을 덮고. 그다음 비가 타고 잘 흐르게 석면 돌가루를 잔물결 모양으로 압착한 스레트, 어른 키에 팔 둘 폭. 그다음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함석은 한때 유행. 스레트보다 훨씬 얇은 쇠여서 가벼워 인기 끌었지만 막상 써 보니 도금이 벗겨지고 삭아서. 그리고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벽체와 일체형으로 슬라브. 그리고 가장 최근에 깊고 널찍하게 빗물길을 낸 강판. 돌고 돌아 스레트와 함석의 결함은 대폭 보강하고 장점은 살렸다. 벽 재료든 지붕재든 바꿔 나간 것은 생산, 운반, 작업의 편의를 위해서였고 내구성은 증강되었다.


마감. 온돌, 벽, 지붕 작업을 마치면 집의 형태를 갖춘다. 이제 마무리할 순서. 방문과 창은 나무. 각기목으로 외부 틀을 짠다. 격자형으로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수십 개 칸을 나눈 내부 틀을 외부 틀에 끼운다. 그 위로 하얀 한지를 바른다. 격자는 세공이 들기에 창문은 대개 각기목으로 틀을 사등분한다. 벽은 신문지를 붙이거나, 형편이 나으면 신문지를 초벌하고 공장에서 생산된 벽지를 그 위로 덧바른다. 방바닥은 한지를 바른다. 콩기름인지 기름이 밴 주먹만한 주머니 덩어리를 문지르고 말리기를 며칠 반복한다. 누렇고 반질반질해서 물걸레도 닦아도 이물이나 자국이 잘 지며 찢어지지 않는다. 종이를 붙이는 건 나무건 바닥이건 풀. 밀가루를 물에 묽게 풀어 불에 약한 불에 주걱으로 휘휘 젓는다. 뻑뻑해서 힘이 들어가도 안 저어지면 그게 풀. 방문, 창, 바닥은 구조가 아니고 마감이라 교체가 용이했다. 가볍고 튼튼하며 편리하고 보기에도 좋은 재료로 계속 바뀌었다. 바닥의 경우 한지에 며칠 기름 먹이는 작업 대신 장판을 사다가 깔았다. 재질도 얇아 찢어지는 것에서 두툼 푹신한 모노륨으로 발전. 무늬는 너무 다양해 고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으나 대체로 나무 색, 무늬를 선호.


담장. 집을 다 짓고 난 후다. 처마보다 낮춰서 터의 경계를 구분하고 내부를 가렸다. 재료는 벽과 같아서 판자, 부로꾸, 구운 벽돌 순. 비 맞으면 패이는 황토 벽돌은 쓰지 않았다. 한때 콘크리트 담장이 유행했다. 한 칸 길이로 수직으로 홈이 패인 콘트리트 사각 기둥과 한 자쯤 폭의 콘크리트 판을 공장에서 제작. 그걸 사다가 땅을 파서 기둥을 묻고 기둥과 기둥 사이로 아래부터 판을 끼워서 한 장씩 올리면 담장 완성. 작업은 빨랐지만 기둥이 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했다. 담장이 통째 옆으로 기우는 단점이 드러나 부로꾸로 거꾸로 돌아갔다. 더 이상 발전은 없었다. 담장의 용도가 니 땅 내 땅 구분과 가림막으로 충분했기에. 거의 모든 집의 한쪽 벽은 담장을 겸하는 바 터가 좁고 연달아 집을 지어서다. 지금도 대부분 가옥의 벽체와 담장은 부로꾸다. 벽 일부가 허물어져 바닥으로 누런 흙을 간혹 볼 수 있는 바 여즉 예전 횡토 벽돌이 남아 있어서다. 지붕이나 가닥으로 스레트가 지금도 제법 눈에 띈다. 구옥을 헐고 스라브로 지은 집들 듬성듬성. 한편, 벽에 방문 내듯 담장도 대문. 이 또한 부분이라 교체가 수월했다. 나무로 시작해 철문으로 바뀌었다. 담이 없는 집은 방문 즉 대문.


마지막 휘날레. 온가족이 날마다 이용하는 변소. 냄새가 진동하기에 집채에서 가장 멀리 두어야 하니 담에 바짝 붙여 짓는다. 집과 같이 독립된 구조물이기에 그 소재와 공법이 같다. 아궁이처럼 구덩이를 파되 깊고 넓다. 거기에 뚜껑을 딴 도라무깡-드럼통-을 앉힌다. 통 위로 쪼그리고 앉아 똥 눌 수 있도록 간격을 띄워 두 줄 굵은 판자. 그다음 벽과 지붕. 수돗물로 수세식이 되면서 변소는 냄새가 사라져 집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집 짓기가 엄청 복잡한 거 같아도 알고 보면 순서 단순하다. 바닥에서 위로, 중심에서 밖으로. 편히 누워 잠을 청하려고 방을 두고 바람 먹으려고 벽을 쌓고, 해와 비를 피하려고 지붕을 얹고 내 땅을 담으로 구분하였다. 모든 건 삼국시대 온돌에서 시작되었고 육이오전쟁 이후 새로이 새동네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새동네 그 많은 집 중 기와집은 단 한 채도 없었다. 부자들만 모여 살아서 지붕 전부가 기와였던 평원동과 확연히 구별되었다. 기와가 특별난 건 주변 산이면 수이 얻는 황토의 벽돌과 달리 진흙이 풍부한 지역에서 불에 구워 만든 후 멀리 실어 날라야 했으므로 품값에다가 운반비까지 더해졌기 때문. 새동네가 단칸방, 끽해야 쪽방 두 칸이었던 것과 달리 기와집은 방이 여럿에 대청마루가 딸렸으며 그 앞으로 널찍한 마당을 두어 나무와 화초를 가꾸었다. 담장뿐 아니라 대문마저 기와를 얹은 솟을대문. 양옆으로 열어제끼며 여봐라 외치는 양반집들이었을 거고 조선의 도청격인 강원감영과 지근거리이니 틀림없이 역사가 있으리라. 이처럼 새동네는 탄생부터 가난한 동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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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전 마침내 새동네에 재개발 광풍이 들이닥쳤다. 아파트 건설 회사는 원주시 남쪽으로 논과 밭과 산 개발이 한계에 다다르자 드디어 다시 북쪽으로 새동네에 눈독을 들였다. 도심과 차로 5분 지척이고 드넓은 땅에 허름한 가옥이라 수지 타산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자기 분담금이 하꼬방집 몇 채 값이고 대로변과 안쪽, 소유자와 세입자간 입장 차이가 컸다. 무엇보다도 보상 방식이 문제. 선매입 아니고 분양 후 돈을 준다하니 몇 년 찬반 분란만 요란하다 결국 무산되었다.


재개발 논란 전후로 새동네에 몇 안 되는 시설들은 탈바꿈 하거나 철거되었다. 북에서 남쪽으로 하나씩 기억을 꺼내본다. 재활용품 하치장 자리에 8년전 원주드림센타라고 시가 250억 들여 수영장, 헬스장을 갖춘 실내 체육관을 신축했다. 새동네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건축물. 자리쯤이리라. 나 어릴 적에 고아 소년들을 모아서 먹이고 재웠다. 대가로 소년들은 넝마주이 통을 등에 짊어지고 길다란 집게를 한손에 들어야 했다. 원주 시내 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통은 둥글고 촘촘하게 갈대로 엮었다. 시커매서 한두 해 쓴 게 아니란 걸 보여주었다. 어른 상체보다 서 뒤에서 보면 어린 소년은 몸과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른용을 같이 썼던 거. 그리고선 자활대라고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다. 부모 없이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가여운 무리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KBS 방송국은 건물 헐고 드러난 너른 터에 송신탑이 뻘쭘히 솟았다. 밤이면 헬기 충돌 방지용 불빛이 깜박깜박 몇 키로 떨어진 신평에서도 보였다고. 날개 가진 동물 하나 얼씨구나, 층층이 까치집만. 제일 높이서 깍깍 호령하면 뭐 하나 가까이 숲이 없어 배 곯다가 빈집, 사람이 철탑 손보다 철거. 허름한 야학인 덕신학교는 번듯하게 2층 어린이집으로 바뀌었다. 굵고 커다랗게 자란 옻나무가 옻공장을 둘러쌌고 뒤로 한 길 낮은 논과 경계를 이루었다. 논 뒤로 실개울 그다음 군부대. 새동네 남쪽 끝으로 옻공장, 논, 군부대가 가매기 삼거리에 맞닿아 있었으니 그 셋 반대편부터 새동네라 일컬었다. 이런 시설들 외에 상업용으로 자동차 매매상, 카센타 둘, 고물상은 둘 중 하나는 원래부터 그 자리, 다른 하나는 새로이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섰다. 10년전 대로변으로 옻공장 빈터에 농협은행, 2년전 4층짜리 병원 건물까지 건축하자 뒤로 새동네는 완전 헌동네가 되어버렸다. 대로를 건너면 산꼭대기부터 사방 산자락까지 25년전부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 4,000여 세대 8개 단지가 빼곡하다. 이로써 새동네는 진작부터 헌동네가 되었던 것이다.


새동네는 그럼으로써 오히려 새로와졌다. 마치 골동품처럼. 터나 공터를 낀 구옥이라면 텃밭을 가꾼다. 작게나마 마당이 있으면 과실 나무가 집 한 켠을 가린다. 터 전부가 집이라면 앞이나 옆으로 화분으로 줄 세워 화초를 는다. 집들은 담장이 낮고 대문과 방문이 가까워 계세요! 부르면 안에서 호응한다. 대답이 없다면 사림도 없는 거. 옆집과 경계래야 벽이 흔하고 거기에 창을 낸 집도 있어서 이웃이 누구인지 서로 익히 안다. 며칠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 있나 궁금해 한다. 아파트와 달리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난다. 아파트와 다르게 여전히 쥐가 성하다. 습한 철이면 쥐며느리가 분주하고 마른 자리에는 간간이 커다란 돈벌레. 옛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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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장마 끝물인가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후까지. G-케어 매니저 하루 3시간. 그치길 기다리자니 일수 빚이 있는 양 쫓기는 게 싫다. 개인사는 미루어도 직무는 후딱 해치워야 맘이 놓인다. 우산을 펴고 아파트를 나선다. 나보다 연배인 어르신들이 비에도 활동. 삼삼오오 집게 들고 다니는 분들, 체육관 앞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세 분이 쪼그리고 앉아 인도 블럭 사이로 자란 풀을 캐고 뜯고. 옳지, 나오길 잘했군. 헌데 난 어쩌지? 휴지나 풀은 비 와도 줍고 제거하지만, 새동네 노인들은 집에서 안 나올텐데. 먼저 통장 댁에 들르자. 어제 통장 남편이 내게 조언했다. 수상한 사람으로 안 보이려면 확인할 수 있도록 안내문에 시행 단체 적으라고. 그렇게 덧붙인 안내문을 드리자. 관련 언론 기사 출력한 거와 함께. 그러면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운 좋으면 독거 노인 정보도. 그리고 나서 새동네 전체를 둘러보자. 구역을 나누고 지리 지형을 익히자. 워낙 골목이 많고 복잡해 평생 이웃마을인 나조차 큰길만 안다. 이건 비 내려도 할 수 있다.


통장 집 앞. 답게 단층 슬라브. 마침 60대 여자가 옥상에서 계단을 내려온다.

통장이겠군. 담장 너머로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손 한껏 뻗어서 안내문과 기사를 건네니 허리 굽혀 받는다.



안내문


기사



나를 알아보니 통장 맞다. 어제 남편이 나를 수상하다고 동사무소에 신고한 게 미안했는지 공손 친절해진다. 전화위복. 이 순간을 위해 아침 일찍 컴퓨터 켜고 안내 문장 덧붙이고 기사 검색해 프린트 했다. 통장은 계단에 선 채 나를 내려다 보고 나는 고개 들어 통장을 위로 보고. 아파트에 거주한 이후 십 년 잊었던 위치와 자세로 대화를 시작한다. 비 먹어 칙칙한 부로꾸 담은 남녀가 유별하고 이제 막 초면임을 일깨운다. 헌데 싸나이 나는 모자에 우산까지 썼고 통장 여자는 맨몸. 여린 부슬비라 그런가 피하지도 않는다. 우산을 주려고 하니까 들어가서 머리 감을 거니까 괜찮다고 한다. 통장은 내게 마을의 노인 복지 관련 정보를 세세히 풀어 놓는다. 이런 복지사, 저런 지원사, 무슨 보호사, 사사사. 외우려다가 종류가 많아서 포기. 그거 신경 쓰다가 대화 끊기니까 다음에 묻기로 내심.


통장은 머리와 어깨가 비에 젖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서두른다. 영세민 지역이고 노인 비율이 높아 복지가 다양하고 촘촘하다. 지나칠 정도라 겹치기도 한다고. 나는 복지 사각지대 빈틈을 노린다며 끼어드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하하 웃으며 사각지대 전담팀까지 있다고. 그리고 복지 아니어도 이웃끼리 서로 잘 알아 아파트처럼 고독사 걱정 없다고. 독거 노인 정보는 동사무소에 알아보라 하고. 듣고 보니 이 동네 노인 복지에 굳이 나까지 필요하지 않다는 걸 대놓고 못 하니까 에둘러서 말하는 거다. 성가시니까 자기네 동네 오지 말라는 거. 살갑다가 어르다가 결론은 스리슬쩍 뺨 치기.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번엔 내 차례. 전화위복은 그때뿐 다시 전복위위 위태할 위가 되었으니 어찌할꼬. 벽이 막아서면 깨부수던가 넘든가 돌아서 가든가. 통장에게 말한다. 지금 방문하는 복지 대상이거나 알고 지내는 사람은 괜찮다. 무슨 일 나면 곧 아니까. 멀쩡하다가 혼자 지내다가 돌연 고독사가 발견하기 어렵다. 노인뿐만 아니라 요즘은 청년, 장년도 그렇다. 특히 아파트는 알 도리가 없다. 밀폐가 철저해 부패 냄새마저 잘 안 난다. 그래서 백골로 몇 달 지나서 발견되는 거다. 요즘은 고독사 흔해서 기사거리도 안 된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평소 별일 없어도 말 붙이고 말벗도 해드린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관찰하는 거다. 그러다 위급할 때, 필요할 때 나를 부르면 된다. 근처에 사니까 바로 달려간다. 119 소방서처럼. 그래서 안내문에 내 전화번호를 적어 두는 거다. 노인들이 버리지 않고 가져간다. 필요하니까 챙기는 거다. 언제든 누구든 독거하다 사고날 수 있다..누구고 언제고 독거 된다. 그건 이 동네 노인들, 통장도 나도 그렇다. 이런 취지로 설명하니 통장이 그건 그렇다며 공감을 표시한다. 오케이. 부슬비 속에서 벽을 타넘는다.


어제 동사무소 보건복지팀장, 오늘 통장. 연이틀 일껏 찾아가 통과 의례를 치루고 나서 벌 옷 재단을 재봉하듯 새동네 골목 골목을 발로 누빈다. 두어 시간 탐사를 마친다. 다리 팍팍. 현충로 대로변에 커피숍. 태장1동에서 첫 브랜드 커피숍이다. 석 자 이름으로 오픈하고 두어 달인데 아직 한 번도 못 갔다. 커피값 부담에 헛이나마 노인 되니까 사람 만날 일 없어 딱히 이용할 건수도 없다. 오늘 어차피 한 잔은 사 먹을 거 요즘 편의점 커피도 올라서 큰 잔은 2,000원 가깝다. 커피숍 유리에 눈 바짝 대고 실내를 염탐하니 아메리카노 3,200원. 4 자 아니네? 아, 이 브랜드는 중간 가격대라 좀 싸지. 그래 오늘 비도 오고 꿀꿀하니 여기서 한 잔 하면서 새동네 이야기를 써보자. 끄적이다 보니 빨빨 돌아다녀 그런가 배 출출. 쇼케이스를 살핀다. 베이글 1,900원 젤 싸다. 크고 속이 단단하니 양도 제법. 편의점 빵도 저 정도면 2,000원급. 하나 주문하니까 크림 발라야 맛난다고. 빵만으론 뻑뻑하다고. 800원이라고. 그래. 좀 더 쓰자. 청소녀가 요령 있게 주문 유혹하는 거 기분 좋게 넘어가 주자. 낚시꾼에서 미끼를 문 붕어가 된다. 조금 기다리시라고. 호출해 받아 보니 빵 따끈따끈. 오, 역시 편의점보다 낫군. 시간여 자리 쓰고 이 글도 쓰고 간만에 홀로 호젓하게 폼 좀 잡는다. 제일 구석에 자리잡고는 제멋에 겨워. 쪼잔한 건 노인 되면 젊은이 돈 다섯 배 가치라서. 이리 따지는 거도 재미 들이면 쏠쏠하거니와.


전쟁 나고 70여 년. 새동네는 헌동네가 됨으로써 다시 새동네가 되었다. 맨나중에 대로변에 첨단 4층 병원과 그 건물 1층에 최첨단 커피숍이 들어서면서 더욱 새로와졌다.



새동네는 G-케어 매니저 내 관할이다.






여적


비오는 날의 수묵화가 세밀화가 되어버렸다. 새동네가 개발되면 옛 정취는 영영 사라진다. 요즘 전국 아파트 깂이 폭등하자 또 개발업자가 나타났다. 아파트 짓자며 돌아다닌다. 짧은 역사나마 죄다 때려부술까 염려에 덧붙이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제목이 무에 중요하리. 나라도 기록해야지 베이비부머가 가고 나면 기억마저 증발할 터. 누가 알어? 핵전쟁, 기후, 지구 재앙으로 인류 멸종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지. 천 년 후 발견되어 고전될 지. 그러니 내 꺼 책 좀 내주라. 그럼 나와 함께 천년을 살지 않겠니.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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