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형 수건

G-케어 매니저-13화

by 가매기삼거리에서


1986.8.17. 수건.

1989.11.10. 수건과 베개.

1980년대. 스덴 주전자.



할머니. 82세. 독거. 40대에 오른다리에 병이 왔다. 무릎이 오그라들어 펴지를 못 했다. 병원서는 외국 가야 고칠 수 있다고. 엄두도 못 내고 야금야금 전재산 하꼬방 집 두 채 팔아 반쯤 나았으나 왼다리마저 아파서 집밖으로 산보는 못 한다. 10여 년전부터 양눈이 안 보여. 의사 말로는 다리 병이 눈으로 옮긴 거라고.


기초수급자 1급이다. 기초연금 합쳐서 월 60만 원이 수입 전부. 빚 400만 원이 남아 원금과 이자로 매달 40만 원이 빠져나간다. 20만 원으로 한 달 살아야. 전기료, 수도료 제한다. 매달은 아니나 10키로 정부미, 가끔 병원, 약국에 자부담 몇 만 원.


그러니 벽에 에어컨 달았되 틀지 못 한다. 세탁기 돌리지 않고 손빨래. 8월 더위인데 벌써 겨울 보일러 기름 걱정을 한다. 더위야 버티면 되나 추위는 불 없이 견디기 어려우니까. 무엇보다도 반찬 사먹을 돈이 없다. 맹인이라 해 먹지도 못 하고 그런다고 찬 값 아끼는 거도 아니다. 아니 아낄 돈 자체가 없다. 지난 주에 딸 가족 넷이 OO도에서 다녀갔다고. 다 떨어진 소금, 간장, 된장, 김치를 거금 들여 샀는데 밥 한끼 못 해줬다고. 딸, 사위야 사정을 아니 그렇다쳐도 보지도 못 하는 커다란 단독 사진을 스탠드 액자에 고이 모실 정도로 아끼는 손녀인데. OO종합사회복지관에서 월수금 점심 도시락이 온단다. 반찬만 무료 제공하는 서비스가 있다고 들어 밥상공동체에 전화. OO동은 이 복지관에 문의하란다. 할머니는 괜찮다 하신다. 도와달라기 싫단다. 어려운 젊은이도 많단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다른데서 반찬 받으면 혹시 복지관에 밉보여 도시락마저 끊길지 모른다고 두려워 한다.


틀니가 없어 뜯지도 씹지도 못 한다. 아랫니가 오른쪽 하나, 왼편에 붙어서 두 개가 전부. 노인 틀니 무료라고 알기에 치과에 문의하니 아래 140만 원, 기초수급자 1급이면 5% 자부담 7만 원, 보건소에 알아보니 7만 원 지원해주는데 올해 3차까지 끝났으니 내년에 신청하라고. 단 틀니한 지 7년 경과해야. 할머니께 여쭈니 5년쯤 전에 틀니했다고. 150만 원 빚내서 했고 아직 갚는 중이라고. 급한 건 아니니까 나보고 걱정 말란다.


나한테 쌀 가져 가란다. 어디 있냐, 몇 포대 남았냐고 묻는다. 아는 할머니가 쌀이 떨어져 몇 됫박 퍼주다가 쌀이 떨어졌단다. 6월에 한 포대 받아서 넘겼다고. 한 포 받으면 두 됫박 정도 남는다고. 한 포 가져 가라는 거로 알아들었는데 그거 가져가라는 거였다. 아차차, 할머니 어진 마음에 부담을 얹다니.


요양보호사가 주 5일 오전 세 시간씩 방문한다. 밥, 청소, 빨래 해 준다. 목요일에는 60대 남자가 여자와 같이 와 안마 시간 가량 해 준다고. 나는 언제 올까 상의하여 매주 월요일 오후 3시에 방문하기로. 고독사, 고립 우려는 없다. 하지만 세 시간 내내 지침 없이 말 폭포. 몹시 외롭다. 말벗 경청이 필요하다. 당장 반찬과 틀니가 시급하다.


두 건 해결하고 가을 되면 내 차로 드라이브 하자 했다. 차가 있냐며 놀란다. 눈이 안 보여 얼굴 부딪히고 멀리 못 걷는데 데리고 다니면 고생한다고 걱정. 차야 집앞에 세우면 되고 차에서 벨트 매면 안전하다고 안심시킨다. 할머니는 두 달에 한 번 병원 가서 처방 받고 약 타러 시내 병원 가는 게 외출의 전부. 이번 12일 금요일은 종합검진, 피 검사도 받는다고. 요즘 삼키면 식도 아프고, 양 옆구리 누르면 속이 아프고 명치 부위 배 아프고. 새로 얻은 병 같다. 반찬, 틀니는 여름 지나면 해결되리라. 가을에 드라이브는 작은 희망이나마 주고 싶어서다. 차 에어컨 봄에 진작 고장났는데 버티는 중이기도 해서. 어쩌다 모는데다 에어컨 없이 버텨볼까 고칠까 자아 기싸움. 금방 질 줄 알았는데 어랏, 창 활짝 여니 바람 씽씽 별거 없다. 괜한 자존심이 자부심이 되어 간다. 나뿐이니까. 몇 해전부터 돈 쓰는 재미보다 아껴 쓰는 맛에 눈 떴다. 젊어서 펑펑 써봤으니 거꾸로도 해보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과소비란 지구를 과한 만큼 더 망치는 거. 기본만 해도 이미 자연에 해악. 덜 쓰면 그나마 살리는 데 일조. 자연인은 못 되어도 스몰 라이프. 해서 에어컨 없어도 되는 가을에 드라이브.


86년형 수건.


것도 달랑 한 장이 모든 걸 말해 준다. 현재. 전기료 못 낼까봐 에어컨, 선풍기 안 키고 그거로 땀을 훔친다. 세탁기 안 돌려 손빨래 하되 수돗물마저 아껴서 빠는 것이 틀림 없다. 요양보호사의 밥, 청소는 고마워도 빨래는 질색한다고 했는데 세탁기를 써서다. 수건은 대개 한 번에 여러 장을 빤다. 걸어 놓은 줄을 보면 한 장용 정도. 이거 한 장뿐인가 싶어 다른 수건 있냐니 있다고. 보여 달라니 뭘 그런 거까지 보려고 하냐며 거절한다. 아무래도 수건은 이 한 장뿐인 듯. 과거. 86년쯤 다리 병이 온 거다. 그때부터 궁핍이 시작된 거다. 옛과 지금은 헤진 베겟닛에 흰실 바느질, 새카맣게 탄 스덴 주전자가 고스란히 이어준다.



딱함을 넘어 처절한 사정에도 할머니는 예쁘고 고운 꽃 접시와 꽃 잔에 커피를 내온다. 가스불 켜 주전자에 수도물 끓여서 믹스 커피를 타서. 형편이라 말 하기도 어려운 형편에 가스에, 수돗물에, 커피까지. 할머니는 나를 최고의 손님으로 대접하신 거였다. 그 귀한 걸 모르고, "할머니, 커피 한 잔 타주세요." 집에 들어서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청했으니.


세상엔 기부 천사만 있는 게 아니다. 늙고 병들고 찢어지게 가난한 천사도 있다.


G-케어 매니저. 돌봄 대상 2호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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