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어떤 용도인가요?
“시설 입소용이요.”
친정아빠의 요양원 입소 날짜가 정해졌다. 챙겨야 할 준비물이 많았고, 일을 다니시는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하시고, 시간이 안 되어 못 하시는 것은 내가 도왔다.
시설에서 요구하는 건강검진을 하기 위해 며칠 전 아빠를 만나 병원에 갔다.
“건강검진을 하려고 하는데요.” 시설에서 메시지로 보내준 '요양원 입소 시 필요한 서류와 물품' 목록을 보여드렸다. 간염, 결핵, 홍역, 성병, 피부병 등에 대한 검사가 필요했다. 입소 하루 전날 오후 3시 이전에 반드시 PCR 검사를 진행해야 당일 오전에 결과가 나온다. 반드시 당일 결과를 받아야 입소가 가능하다.
아빠를 모시고 보건소에 다녀오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올라왔다. 꾹꾹 눌러 내리면 다시 불쑥 올라오는 감정에 길지 않은 시간에 지쳤다. 검사를 마치고 집에 모셔다 드렸다. 들어가시는 모습만을 보고 나는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어쩌면 이 집에서 보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애썼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생각과 달리 오히려 더 빨리 발길이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걸음에 수십 번의 눈물을 꾹꾹 삼켜버렸다.
인천 사는 오빠가 교대근무 일정을 확인 후 올 수 있는 날이 6월 10일이었다. 그렇게 입소일은 6월 10일로 정해졌다. 나는 디지털튜터 1급 시험을 볼 예정이라 함께 하지 않았다. 시험 일정이 없었더라도 함께 하지 않았을 테지만, 내내 집중하기 어려웠고 이 시험을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기시험을 마치고 잠시 시간이 났을 때 엄마의 메시지를 보고 마음이 힘들어 다시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아빠가 잘 들어가셨다는 말 외에도 심장이 떨리고 마음의 진정이 안 된다는 엄마의 감정에 충실한 메시지였다. 내 감정은 뒤로 숨겨둔 채 엄마의 메시지에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엄마 아빠의 자식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내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네다섯 살, 그 어느 무렵부터 아빠의 술주정과 엄마를 향한 아빠의 폭력을 보았다. 내가 왜 이런 집에 태어났는지 조차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작고 어렸다. 큰소리를 내며 엉엉 우는 것, 아빠의 팔을 잡고 말리는 것, 그것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연년생 오빠는 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것 또한 두려움 속에서 어린 오빠가 할 수 있는 유일함이었다. 내가 왜 이런 집에 태어났는지, 아빠가 왜 저러는지, 엄마는 왜 저렇게 매일 당하는 건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쯤부터였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외가가 있었다. 일상이 아빠의 술주정, 폭언, 폭력인 날이었으므로 수시로 외할머니, 큰 외삼촌 등 외가 식구들이 달려와 아빠를 제지했다. 모두의 진을 빼고 고주망태인 아빠가 간신히 잠이 들고 나면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우리 남매에게 “네 엄마 힘들어. 네 엄마 불쌍해. 너희 엄마한테 잘해” 말씀하셨다. 뭘 어떻게 잘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늘 기가 죽어 있는 우리 남매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네” 짧은 대답을 하는 것뿐이었다. 우리 남매가 성인이 되었을 때 엄마가 말씀하셨다. 자식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고. 엄마는 나의 아빠, 그러니까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시달리며 고통 받고 살았다고. 엄마에게 고통은 오로지 매일 술주정을 하면서 살림살이를 부수는 아빠라는 존재였다. ‘엄마는 불쌍한 사람이구나. 엄마를 돕고 엄마한테 잘해야 하는구나.’ 그랬다. 정작 어린 우리 남매가 학대를 받고 있는지 불쌍한지 어쩐지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아빠는 엄마에게만 집착했고 엄마에게만 강한 사람이었다. 밖에서는 그저 좋은 사람이었다. 82세가 되어서도 치매와 파킨슨을 앓으시는 가운데, 없는 기운으로도 남은 힘을 모아 엄마의 팔을 잡아 비틀고 언어폭력을 내뱉으시는 걸 누구도 믿지 못한다. 우리 네 식구만이 아빠의 특징을 알 수 있을 뿐. 아빠는 밖에서는 “네. 네.” 온순했다. 아빠가 집안에서 벌이는 일을 우리의 측근 이외에는 짐작할 수 없었다. 몇십 년 동안 행동에 옮기지 못했던 일을 감행했던 날, 그날도 엄마의 다급한 전화와 함께 우리 모두를 고통으로 집어넣었던 날, 아빠를 알코올 병원에 보내 3개월 있도록 했을 때, 동네 어르신들은 부인과 자식들이 나쁜 놈들이라고 수군거렸다.
아빠는 그런 와중에 자식에게, 아니 더 정확히는 딸, 요즘 소위 말하는 딸 바보였다. 딸이라면 껌벅 죽는 아빠였다.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릴 때도 그날의 운에 따라 어떤 날은 전혀 먹히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내가 울며 매달리면서 말리면 조금 잦아들기도 했다. 나에게만큼은 끔찍한 아빠여서 아빠를 좋아해야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게 자아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아빠를 증오했고 좋아하기도 했다. 내 나이 44살이 되도록 어떠한 상황이나 감정이 영원히 달라질 수 없어서 더욱더 애증과 연민만 가득했다. 아빠가 나를 아무리 끔찍이 여겨도 아빠가 엄마에게 하는 행동은 내가 아빠를 끔찍이 여길 수 없게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우리 남매가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찾을 수는 없었지만, 지칠 대로 지친 엄마로부터 매일 퍼붓는 끔찍한 신세한탄과 잔소리를 받아내며 아침 등교를 해야 했다.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이삼 년마다 달동네에서 달동네로 이사를 하는 와중에 학교 준비물을 사거나 용돈을 받아야 할 때는 퍼붓는 잔소리를 온몸으로 맞아가며, 그 틈에 돈을 달라고 하면서 자세히는 알 수 없는 수치심 같은 것을 느꼈다.
20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면서는 가끔 아빠 엄마를 모시고 식사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아빠가 술을 입에 대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했고 그런 날이 별로 없었기에 외식을 못하기도 했다. 또는 엄마와 단둘이 외식을 하기도 했다. 잠깐 동안 행복한 엄마와 딸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이어지는 아빠에 대한 엄마의 분노와 고통을 들어낼 때는 그것을 함께 보고 사는 나의 고통은 감히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엄마와 외식은 고됨을 들어주고 위로해주어야 하는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다.
결혼을 해서 친정과 1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신혼살림을 살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부터 여전히 일을 다니시는 엄마가 아주 가끔 아빠를 시켜 우리 집에 반찬을 보내기도 했다. 아빠는 내게 애틋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하루 이틀마다 다시 도돌이표인 아빠를 보며 증오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또다시 애증과 연민이 뒤섞인 채로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짠하기도 해서 항상 지쳐버렸다. 엄마는 아빠에게 당하고 사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사실인 것이 내게 전화를 하면 엄마의 힘듦과 분노를 쏟아내기에 바빠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받고 있을 고통은 쏟을 길이 없었던 이유가 되어버렸다. 몇 십 년째 상황은 같으므로 내용이 같다. 폭력 영화를 다시 보기 하듯 하면서 몇 십 년째 한결같이 마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것, 자식은 그런 부모가 항상 애틋하여 고맙고 미안하여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부모자식의 그림 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큰 상처를 주거나 평생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도 많다.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세뇌당하듯 배워왔기에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도 죄책감을 갖는다. 어떤 부모라도 자식이 책임지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고 자식 스스로 걸어갈 방향을 잃어가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내가 자식의 도리를 하는 것이 강제 효녀가 된 모양새로 비치는 것이 이런 이유일까. 부모에게 애틋하고 존경심 가득한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는 그럴 수 없음에 그런 그들이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