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아는 사람들은 남편의 안부를 묻는다.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볼 때마다 묻는다. 껄끄럽다. 뭐라 답하기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난 불륜녀가 된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밥을 먹고 있으면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게 고지식한 우리 한국 사회이다.
결혼 생활 25년 동안 2번을 망해 먹었다. 25년 만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30년 채웠으면 3번 망했을 것이다. 꼭 10년에 한 번씩 사고를 쳤다. 여자 말을 잘 안 듣는다. 기독교였지만, 힘들 때마다, 점도 한 번씩 보러 다녔다. 심리상담인 것이다. 점쟁이가 서류정리를 해야 경제적인 게 내가 부담이 덜 온다고 했다. 이혼 후 아이들 때문에 참고 2년을 함께 한집에서 더 살긴 살았다. 애들 아빠는 작은 방에서 아들과 난 안방에서 막둥이와 큰딸은 가운데 방에서 우리를 갈라주고 있었다. 그때 난 프리랜서 강사 일을 하고 있었다. 잠깐씩 집에 와서 쉬어야 하는데, 남편이 퇴직 후 퇴직금으로 인천에 올라가서 그 말리던 꽈배기 장사를 시작해서 쫄딱 망하고 와서 집에 와 있었다. 한 공간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날 심폐소생술을 해 줘야 할 정도였다.
우린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경제적인 문제가 다가 아니었다.
이 글에 다 쓸 수는 없다. 나의 계획은 남편의 글을 따로 모을 생각이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외로운 나에게 잘해줬다.
잘해줬기 때문에 인물 없고 키 작고 돈 없는 이 남자를 택했다. 착한 줄 알았다. 남자는 변한다. 아니 사람은 살면서 변한다. 환경이 변화를 만든다.
난 정에 약하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없고 나이 차이 나는 오빠는 떨어져 살고 난 늘 외로웠다. 고양이가 내 친구였다.
그는 다정했다.
그는 여자들에게 다정했다.
그는 바람을 피웠다. 그것도 아주 길게 피었다. 한 6~7년 한 여자랑 내가 사랑이란 것을 늦게 해 보니까 만남은 쉬어도 헤어지는 것은 쉬운 게 아닌 것이다.
가정의 소중함을 알기에 참고 살아야만 했다. 그때 결정했어야 했다. 아이들이 한둘 더 생기기 전에~
이혼했다는 것을 내가 아는 사람들이 많은 SNS 한 군데에 어제 밝혔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진작에 밝힐 것을 그랬다. 이혼한 게 죄는 아니잖아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애들 셋 데리고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난 여자이기 전에 엄마이다. 엄마는 강하다. 남의 시선에 겁먹지 말자. 물어보면 말할 것이고, 숨기지 않을 것이다. 친척 결혼식장에서 결심했다. 집안망신이라는 말에 더 당당하게 말해야 겟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