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내고 나니 보이는 것들

"여보, 오늘은 정말 끝을 보자. 쌓아두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어."

토요일 아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아내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맑은 웃음을 지으며 화답했다.

"좋아, 대신 욕심은 현관문에 두고 오기. 딱 '필요한 것만 남기기로 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붙잡고 있으면 영영 비울 수 없으니까."

우리는 집안을 구역별로 나누었다. 아내는 안방에서 아이들의 작아진 옷가지들과 씨름하기로 했고, 나는 거실의 거대한 성벽, 책장을 맡기로 했다. 책장에 손을 뻗자 뽀얀 먼지가 햇살을 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동안 내가 이 책들을 소유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 종이 뭉치들이 내 공간과 시간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일까. 소장할 책은 왼쪽으로, 누군가에게 새로운 영감이 될 기증 도서들은 오른쪽으로 분류했다. 손때 묻은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한 권씩 덜어낼 때마다,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부채감이 가벼운 해방감으로 바뀌어 갔다.

한참을 비워내던 중, 어두운 구석진 틈새에서 낯선 하얀빛이 반짝였다. 1년 전, 온 집안을 이 잡듯 뒤지며 스스로를 자책하게 했던 그 에어팟 한 짝이었다. "어...!"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토록 간절히 찾으려 발버둥 칠 때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더니, 소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비로소 손을 움직이자 녀석은 무심한 듯 제 발로 찾아왔다.

먼지를 털어내고 충전 케이스에 꽂자, 마치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듯 주황색 불빛이 가늘게 깜빡였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가 수줍게 눈을 맞추는 것 같았다. 다시 귀에 꽂는 순간 흘러나오는 선명한 선율은 1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단숨에 메우며, 잃어버렸던 일상의 리듬을 복원해 주었다.

이 작은 우연은 내게 운 이상의 가르침을 남겼다. 우리는 무언가를 손에 꽉 쥐고 있을 때만 그것이 내 것이라 믿으며 안심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였다. 비움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들이 돌아올 자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채우려 애쓸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역설적으로 욕심을 덜어낸 여백을 타고 스며들듯 돌아온 것이다.

에어팟의 귀환이 '비움의 보상'이었다면, 다음으로 마주한 것은 '비움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베란다 창고 문을 열자 퀴퀴한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곳엔 시간이 퇴적물처럼 쌓여 있었다. 가장 안쪽에서 꺼낸 건 딸아이의 낡은 줄넘기와 노란 플라스틱 모래 놀이 세트였다. 바구니 바닥엔 5년 전 어느 여름날의 흔적인 해변의 모래알들이 서걱거리며 남아 있었다.

그 모래알들을 손가락으로 훑어보았다. 까슬까슬한 촉감이 느껴지는 순간, 파도 소리와 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플라스틱 덩어리가 아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의 어린 시절'을 붙잡고 있는 닻이었다. 바구니를 쓰레기봉투에 넣으려다 멈칫했다. 이걸 버리면 그날의 반짝이던 바다와 아이의 작았던 손등 위의 햇살까지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았다. 미련이란 참 고약하다. 물건에 기억이라는 인질을 잡아두고, 우리를 과거의 문법 속에 가둬버린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모래 놀이 세트 위로 쌓인 건 추억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를 놓아주지 못하는 집착'이라는 묵은 먼지였다. 비워내지 못한 물건들이 차지한 공간만큼, 지금의 내가 누려야 할 여백은 좁아지고 있었다.

눈을 꾹 감고 봉투 입구를 묶었다. 팽팽해진 비닐 너머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마음은 반대로 가벼워졌다. 에어팟이 돌아오며 증명해 주었듯, 미련을 끊어내는 건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물건이라는 감옥에서 해방해 내 마음속으로 옮겨 심는 일이었다.

군더더기를 뺀 삶은 단정하고 투명하다. 필요 이상의 물건, 필요 이상의 관계, 필요 이상의 걱정을 덜어내고 나면 오롯이 '지금의 나'만 남는다. 그 가벼움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형태의 자유다.

정리를 마치고 거실 한가운데에 앉았다. 텅 빈 베란다 창고 너머로 노을이 길게 들어온다. 물건들이 점령했던 자리에 빛과 바람이 대신 들어차 있다. 정리를 마친 거실은 이전보다 비어 있었지만, 공기의 밀도는 훨씬 더 촘촘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비워진 공간은 이제 더 이상 결핍이 아니다.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고,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영토다. 덜어내고 나니 비로소 보인다. 내 삶은 이미 충분히 아름다웠고, 앞으로는 더 가볍게 아름다울 것이라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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