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의 머리를 감기며


"내 손바닥 위로 툭, 한 생애가 견뎌온 중력의 무게가 실렸다."

희미한 불빛의 병원 세면실. 무채색의 타일과 차가운 스테인리스 수도꼭지,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지배하는 이 공간에서 가영이는 낡은 철제 의자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었다. 창백한 병원 조명 아래 놓인 작은 딸아이의 머리가 내 두 손 위로 조심스레 내려앉았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딸아이는 줄곧 제대로 걷지 못했다. 제멋대로 어긋나버리는 무릎뼈, ‘슬개골 탈구’라는 생소한 이름의 병명은 활기찬 발걸음을 앗아갔다. 결국 , 가영이는 차가운 수술대 위에 올랐다. 어긋난 뼈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그 자리를 버텨낼 인조 인대를 심어 넣는 큰 수술이었다. 찢겨나간 살갗 아래 단단히 고정된 인대의 온기만큼이나 아이가 견뎌온 시간은 차가웠다. 투병의 시간만큼 가벼워진 몸이라지만, 손끝에 전해지는 무게는 그 어떤 성산(聖山) 보다 묵직한 삶의 하중을 담고 있었다.

나는 수도꼭지를 아주 살짝 돌렸다. 쏴아아,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미온수에 손가락을 대면서 온도를 살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기.

"아빠, 시원해."

무채색의 공간 속으로 하얀 샴푸 거품이 피어올랐다. 병원의 메마른 공기와 대조되는 풍성하고 이질적인 순백의 거품. 딸아이의 귓가와 이마 언저리를 몽글몽글하게 덮은 그 거품은, 이 거친 세상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는 내 간절한 소망이었다.

나는 혹여나 그 연약한 두피에 상처라도 날까, 손끝에 온 신경을 모아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문질렀다. 이 순간, 손가락 끝을 타고 흐르는 건 가영이의 몸속에 남아있는 고통의 흔적들이었다. 이제 곧 딸아이는 굳게 닫힌 무릎을 다시 굽히고 펴는, 수술보다 더 잔인한 재활의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나는 그 험난한 여정을 앞둔 두려움을 미리 닦아내듯, 그것들을 하나하나 긁어내어 물줄기에 실어 보내는 은밀하고도 신성한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거품이 씻겨 내려갈 때마다 가영이의 고통도, 나의 무력감도 함께 하수구 너머로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아이의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규칙적인 숨소리. 그 순간만큼은 오직 손바닥을 적시는 따뜻한 물줄기와 내 손길에 오롯이 자신을 맡긴 작은 떨림만이 있을 뿐이었다.

거품을 씻어내자 매끄러운 머릿결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나는 마른 수건으로 가영이의 젖은 머리를 감싸 쥐고, 아주 천천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물기를 눌러 닦았다. 수건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에 비로소 내 마음의 응어리도 조금은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병실로 돌아온 딸아이는 침대 끝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하늘과 낯선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어둠이 짙어지는 저녁, 창문에 비친 가영이의 모습은 얇은 그림자처럼 희미했다. 아이는 작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 동작에서 나는 앞으로 감당해야 할 고통의 무게를 읽었다. 무릎을 굽히고 펴는 것이 딸아이에게는 세상의 아픔을 이겨내는 투쟁이 될 것이다. 삶이란 이토록 불공평하던가. 때로는 아무런 잘못 없는 존재에게 가장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며, 그 작은 어깨 위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얹어 놓는다. 나는 그 앞에서 속절없이 무력한 존재가 되어, 그저 딸아이의 고통을 함께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계 속에서 절망했다. 가영이의 삶이라는 미지의 페이지 위에서, 나는 단 한 글자도 대신 써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딸아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병실 조명 아래서도 반짝이는 눈빛. 그 작은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그러나 단단한 의지가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아빠, 나 다시 걷고 싶어. 뛰어다니고 싶어."

그 말 한마디에 내 안에 드리워졌던 사유의 무거운 그림자가 일순간 걷히는 듯했다. 아이의 순수한 희망 앞에서 삶의 부조리함에 대한 모든 질문은 무의미해졌다. 중요한 건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설 것인가, 그리고 내가 그 옆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영이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병실 공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다가올 재활의 시간을 견딜 용기를 찾아내고 있었다.

퇴원 후 시작된 재활은 차가운 병실에서의 사투보다 더 잔인한 현실이었다. 고요한 물리치료실, 아이의 무릎이 굽혀질 때마다 뼈와 살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마찰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자, 조금만 더 해보자.”

물리 치료사의 무미건조하고도 단호한 독려가 들릴 때마다 가영이의 작은 입술은 하얗게 질려갔다. 굳게 닫힌 무릎을 펴고 접는 그 동작 하나를 위해, 아이는 온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툭, 툭. 이마에서 떨어진 굵은 땀방울이 시트 위로 번져나갔다. 그 신음소리가 공기를 찢고 내 가슴에 박힐 때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대신 아파줄 수 없는 부모의 무력감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내 마음을 난도질했다. 딸아이는 인조 인대라는 타자의 힘을 빌려 자신의 몸을 다시 세우기 위해, 매일 스스로의 한계를 부수는 형벌 같은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나 가영의 의지는 인공 인대보다도 더 단단했다. 넘어지면 다시 짚었고, 신음이 터지면 입술을 깨물며 다시 무릎을 굽혔다. 힘든 과정이 점점 지나가고 아이의 무릎 위 수술 자국은 점차 옅어지는 흉터가 되었고, 그 자리는 단단한 근육과 굳은 의지가 대신 채워 나갔다.

어느 눈부신 오후, 마침내 가영이는 보조기 없이 첫발을 내디뎠다. 뒤틀렸던 궤적이 반듯한 직선을 그리며 지면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세상의 모든 고통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그날 병원 세면실에서 내 손에 기대어 생의 무거운 거품을 씻어냈던 아이는 이제 없다.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공원 한복판, 멀리서 나를 발견한 딸아이가 보조기도, 휠체어도 없이 오직 자신의 두 발로 땅을 힘차게 박차며 달려온다. 가영이의 가벼워진 발걸음 소리가 경쾌한 리듬이 되어 공기를 울린다.

"아빠!"

활짝 웃으며 달려와 내 품으로 뛰어드는 가영이를 안는 순간, 묵직했던 생의 하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눈부신 생명력만이 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이제 내 손바닥에 닿는 것은 딸아이의 지친 머리가 아니라, 나를 꽉 껴안는 아이의 단단하고 따뜻한 두 손이다. 우리는 안다. 그 고통의 무게를 견디고 일어선 무릎에는 이전보다 훨씬 깊고 단단한 생의 뿌리가 내렸음을.

금빛 햇살 아래, 가영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아이의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흩어졌다. 그것은 중력을 거스르고 피어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승리의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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