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나드는 수만 개의 사연 중, 나를 잠시 멈추게 만든 건 미국에서 온 배송품었다."
영종도의 아침은 봄을 향한 길목이다. 밤새 세계 각지를 건너온 물품들이 비행기를 타고 내려와 컨베이어 벨트 위에 몸을 싣는다. 내가 근무하는 물류센터의 하루는 남들보다 한 호흡 일찍 시작된다. 하지만 동료들의 발소리가 복도를 채우고 기계 장치들이 돌아가기 전, 나는 사무실 창가에서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창밖 활주로에는 비행기들이 기나긴 여행을 마친 후 조용한 숨을 몰아쉬며 서 있고, 하역장의 유도등은 졸린 눈을 비비듯 깜빡인다. 이 고요한 틈을 타 전기포트의 물을 끓인다. 타인의 속도나 처리해야 할 물량의 압박에서 벗어나, 오직 나만의 리듬으로 하루를 설계하는 이 짧은 순간은 나에게 가장 맑은 해방의 공간이다.
커피 향이 차가운 공기를 타고 올라오면, 문득 어제 현장에서 마주쳤던 해외 직구 배송품 하나가 떠올라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 수많은 물건들 사이로 불쑥 나타난 익숙한 주소. 이제는 대학을 졸업한 큰딸이 어릴 적 손을 잡고 드나들던 동네 원어민 영어 학원의 주소였다. 미국 어딘가에서 날아온 그 묵직한 상자 안에는 아마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읽을 영어책이 있었을 것이다.
바코드 스캐너가 읽어내지 못한 것은 그 상자 속에 담긴 시간이었다. 그 상자를 마주한 순간, 서툰 발음으로 단어를 읊조리던 딸아이의 어린 시절이 분류대 위로 겹쳐 보였다. 바쁘게만 달려온 내게 잠시 멈춰 서서 소중한 기억을 돌아보라고, 세상이 내게 보낸 따뜻한 ‘배달 사고’ 같은 선물은 아니었을까. 수만 개의 배송 상품중 그 하나를 내 손으로 분류하게 된 건, 어쩌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뜨거운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어본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는 어제의 고단함과 오늘 마주할 업무의 무게를 부드럽게 녹여낸다. 한 모금 머금은 커피의 쌉싸름한 맛은 목을 타고 내려가며 엉켰던 생각의 타래들을 차분히 정리해 준다. 창밖 하역장을 비추는 아침 햇살은 이제 제법 다정한 봄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전 세계로 향하는 글로벌 배송 물품들이 저마다의 경로와 시간을 거쳐 제 자리를 찾아가듯, 인생에서 중요한 건 앞서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울리는 고유한 박자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긴다. 겨울을 견뎌낸 나무는 제 속도에 맞춰 꽃을 피운다. 나 또한 향긋한 커피 한 잔의 여유 속에서 나만의 계절을 준비한다.
이제 곧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일상의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들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 마음 안에는 이미 정적을 채웠던 커피 향처럼, 단단하고 평온한 나만의 리듬이 깊게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수만 개의 상자 틈에서 나를 찾아온 그 배송품처럼, 봄은 언제나 예고 없이, 그러나 정확한 주소를 들고 우리를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