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 뒤에 흐르는 청령포


일요일 아침, 우리 동네 극장은 철제 셔터를 입술처럼 굳게 다물고 있었다. 경기도 시흥의 한 귀퉁이,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고소한 팝콘 냄새가 공기의 결을 채우던 곳이다. 이제는 적자를 견디지 못해 내려진 문이 이 시대가 문화를 대하는 냉정한 마침표처럼 닫혀 있다.

극장 앞을 지나며 어느덧 내 어깨만큼 키가 자란 딸아이가 멈춰 섰다. 아이는 굳게 닫힌 셔터 위로 어른거리는 먼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빠, 여기 이제 정말 끝인가 봐. 나 초등학교 때 아빠랑 여기서 ‘알라딘’ 보고 팝콘 먹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게, 이제 이 문은 오래 닫혀 있을 것 같아”

“공간이 사라진다는 건 추억이 머물 주소가 없어지는 것 같아. 영화 속 주인공들도 이제 돌아갈 집을 잃었겠네.”

아이의 말은 소박했으나 우리 동네에서 유일했던 극장이 폐업을 한다니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극장이 사라진다는 것은 서비스가 중단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과 꿈이 머물던 ‘장소의 추억’이 잊혀가는 것임을 열여덟의 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발길을 돌려 이웃 도시의 극장으로 향했다.

손가락 하나로 수만 편의 영화를 호출하는 OTT의 범람은 안방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극장의 높은 관람료와 번거로운 이동 대신, 사람들은 각자의 거실이라는 안락함으로 파고들었다. 대중의 시선이 작은 액정과 모니터로 분산될수록, 광장(廣場)이었던 극장의 객석은 빠르게 비어갔다. 한때 문화를 공유하던 북적임은 가성비와 효율이라는 논리 앞에 밀려났고, 그 결과 우리 동네의 극장처럼 홀로 시대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공간들은 하나둘 셔터를 내리며 고립되어 갔다. 이 효율적인 시대에 굳이 집 밖을 나서 극장을 가는 건
어쩌면 소멸해 가는 공유의 가치를 향한 마지막 미사(Miass)와도 같았다.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어두워지자, 역사는 과거를 거슬러 스크린 위로 도착했다. 단종(端宗).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슬픔의 대명사다. 영화는 사실을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개연성’을 붙여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편은 절벽으로 막힌 천혜의 감옥이다. 배가 없으면 나갈 수 없는 그 지형은 소년 왕이 마주했을 고립의 깊이를 침묵으로 증명한다.

한명회를 표현하는 유지태의 연기는 그 고립을 정말 잘 표현했다. 그의 눈빛은 강렬해서 화면을 가로지를 때마다 관객의 마음을 긴장시켰다. 권력이란 이토록 잔인하게 한 소년의 세계를 무너뜨리는가. 그러나 그 냉혹한 설계도 위에 뜨거운 피를 뿌리며 인간의 온기를 회복시킨 것은 유해진의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은 시대의 지형도였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응어리를 짜내듯 고통스럽게 터져 나왔다. 그의 대사는 시대의 불의(不義)를 꾸역꾸역 삼켰다가,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토해내듯 했다. 거칠게 떨리는 손끝과 핏발 선 눈동자에는 단종을 지키지 못한 자책과 무력감이 뒤엉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의 흐느낌에 내 호흡을 맞추었다. 그건 '나의 고통을 누군가 대신 울어주고 있다'는 위안이었다.

영화관을 나오며 다시 시흥의 폐업한 극장을 떠올렸다. 셔터 뒤에 갇힌 것은 영화 속 주인공들만이 아니었다. 타인의 비극을 내 몸 안으로 받아들여 함께 정화하던 연대의 장소가 사라진 지금, 우리 모두는 각자의 거실이라는 섬에 유배된 관객들 인지도 모른다.

관객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힘은 기술이 아니다. 그 힘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담은 ‘이야기의 진심’에서 나온다.

압도적인 해상도와 화려한 사운드가 잠시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는 있지만, 차가운 기술은 관객의 삶에 머무르지 못한다. 결국 사람의 발길을 돌리게 하는 것은 화려한 CG가 아니라, 나를 닮은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고단한 삶의 이면을 묵묵히 들여다봐 주는 작가와 감독의 사려 깊은 시선이다.

우리는 기술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를 발견하기 위해 극장으로 향한다. 낯선 타인의 얼굴에서 나의 슬픔을 읽고, 스크린 속 공기에 함께 숨 쉬며 '혼자가 아님'을 확인받을 때, 비로소 극장은 다시금 존재의 이유를 얻는다.

인간의 고통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고, 기쁨을 가볍게 조롱하지 않는 그 최소한의 예의. 그 온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관객은 기꺼이 극장을 방문할 것이다.

“아빠, 아까 그 유해진 아저씨 눈빛이 잊히지 않아. 슬픔에도 결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

옆에 선 딸아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는 이미 역사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었다. 비록 우리 동네의 극장은 침묵하고 있지만, 나는 오늘 마음속에 새로운 상영관을 하나 만들었다. 타인의 슬픔에 기꺼이 함께하고, 그 슬픔을 동력 삼아 내일의 인(仁)을 고민하는 장소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가 필요하다. 홀로 삼키는 독백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숨 쉬며 나누는 살아있는 이야기. 텅 빈 객석은 다시 채워질 것이다. 서로의 아픔을 궁금해하기 시작할 때, 그날의 영월 강물은 굳게 닫힌 셔터를 넘어 우리 삶으로 흘러올 것이다.

나는 이제 닫힌 극장의 문을 두드리는 첫 번째 문장을 조심스레 적어본다. "단종의 슬픔은 아직 이곳에 주소가 있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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