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븐의 묵직한 철문을 열자 뜨거운 숨결이 훅 끼쳐온다. 구수한 곡물 향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순간이다. 갓 구운 식빵의 하얀 속살을 조심스레 가른다. 결대로 부드럽게 찢어지는 모양새가 잘 삶은 닭고기 살결을 닮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부드러운 탄력이 손끝을 타고 흐른다. 스물아홉, 제빵사라는 명찰을 달고 갓 사회에 나온 나의 청춘도 반죽처럼 말랑하고 뜨거웠다.
빵의 생애는 만짐에서 시작한다. 발효를 마친 반죽은 아기 볼살처럼 온유하다. 세 덩이로 나누어 봉긋한 산봉우리를 세운 영국식 식빵이나, 뚜껑을 닫아 단단한 직사각형으로 빚은 미국식 식빵이나 그 바탕에는 정직한 부드러움이 흐른다. 인류와 함께 걸어온 빵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근대 이후라니 조금 늦은 감은 있다. 하지만 이제 빵은 누군가의 허기를 달래는 가장 다정한 끼니가 되었다.
매일 아침, 싱그러운 미소로 작은 빵집의 적막을 깨우는 그녀가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근처 무역회사에 다닌다던 그녀는 조그만 입술로 빵 한 조각을 베어 물며 말했다. “달지 않아 좋아요. 참 잘 만드시네요.” 신도림역의 분주한 출근길, 쫓기듯 걷는 인파 속에서도 그녀만은 갓 구운 빵 향기를 맡을 줄 알았다. 나는 그녀가 오는 시간에 맞춰 오븐 온도를 매만졌고, 가장 결이 고운 식빵을 골라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온기 어린 대화가 오갔다. 주말의 날씨나 소소한 일상들이 빵 냄새와 섞여 공기 중에 떠다녔다. 그러나 빵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건넨 카스텔라와 단팥빵은, 차마 이름을 묻지 못한 사내의 투박한 인사였다.
씨앗이 결과를 낳는 직접적인 원인이라면, 그 씨앗을 꽃피우게 돕는 간접적인 환경은 인연의 마디가 된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씨앗이었으나, 그 씨앗을 필연으로 묶어낼 나의 용기는 마디에 닿지 못했다. 반죽이 공기를 품어 부풀어 오르는 것이 시작이라면, 그 부풂을 견고한 형체로 익혀내는 오븐의 열기는 완성이다. 내게는 부푼 마음만 있었을 뿐, 그것을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구워낼 온도가 부족했다.
일주일째 그녀의 자리가 비었다. 주인을 잃은 빵들이 비닐봉지 속에서 수분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녀가 궁금해질수록 내가 아는 정보의 빈곤함은 뼈아팠다.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는 얼마나 위태로운가. 얼마 후 나는 본사 발령 통지를 받았고, 말간 애틋함을 식빵의 결 속에 묻어둔 채 그곳을 떠났다.
서너 달 뒤, 우연히 만난 지점장은 뜻밖의 말을 건넸다. 내가 떠난 뒤 그녀가 몇 번이나 들러 나를 찾았노라고.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의 결을 맞추려 애썼으나, 끝내 한 덩이의 빵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스쳐 간 미완의 시간이었음을.
작은 빵집은 이제 식당으로 바뀌어 더 이상 고소한 버터 향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4월의 햇살이 창가를 기웃거릴 때면,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 서성이는 스물아홉의 나와 그녀를 본다. 시작은 있었으나 마무리가 비껴간 자리는 아쉽지만, 그 아쉬움이야말로 삶을 부풀게 하는 효모가 된다. 식빵의 속살을 찢을 때마다, 나는 그 촘촘한 결 사이에서 여전히 바스락거리는 청춘의 미소 하나를 꺼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