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도 마시란 해변의 일몰은 정직하다. 동해의 일출이 단호한 선언이라면, 이곳의 일몰은 낮은 목소리로 건네는 설득에 가깝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은 대지의 속살이자, 하루를 견뎌낸 삶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 흔적 위로 붉은 해가 내려앉을 때, 하늘과 땅은 경계 없이 서로를 껴안는다. 파도 소리가 잦아든 자리에 남은 침묵은 묻는다. 오늘 당신의 하루는 무엇을 남겼느냐고. 나는 소멸의 현장 앞에 서서 내 남은 생의 낙관(落款)을 어디에 찍어야 할지 가만히 가늠해 본다.
낙관을 찍는 일은 제 삶에 책임을 지는 일이다. 조선의 성군 정조 역시 지는 해를 보며 무거운 부채감을 떠올렸을 것이다. 왕에게 해가 진다는 것은 권위의 하강이 아니라,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그늘 아래 방치된 이들을 살피라는 성찰의 신호였다. 하늘이 빛을 거두는 것은 사람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여백을 주기 위함이다. 27년의 직장 생활을 하며 마주한 일몰 또한 그러했다. 우편물을 분류하고 타인의 안부를 목적지까지 인계하던 시간들. 그 끝에 찾아오는 노을은 늘 내게 물었다. 그대는 오늘 하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문장을 남겼는가. 왕이 하늘을 두려워하며 낮은 곳을 살폈듯, 나 또한 저무는 빛 앞에 고개를 숙이며 소명의 좌표를 다시 읽는다.
퇴근길 김포공항역에서 서해선으로 몸을 옮기면 풍경은 단절된다. 열차가 깊은 지하를 달리면 유리창은 풍경을 지우고 거울이 되어 내 지친 얼굴을 비춘다. 빛이 차단된 완벽한 어둠 속에서 역설적으로 마시란의 노을은 마음의 필름 위에 선명하게 현상되기 시작한다.
궤도를 달리는 바퀴의 구동음이 지하의 정적을 메울 때, 나는 90년대의 어느 저녁으로 돌아간다. 라디오 노래를 녹음하다 테이프가 씹히면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엉킨 갈색 줄을 풀어내어 육각 연필을 구멍에 끼워 넣던 순간을 기억한다. 연필을 돌릴 때 손끝에 전해지던 묵직한 저항감과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내던 규칙적인 진동. 그것은 지금 내가 몸을 실은 열차의 진동과 맥이 닿아 있다.
나는 지하의 어둠에 기댄 채, 엉킨 테이프를 감듯 고단했던 삶의 마디들을 정성껏 감아올린다. 연필심이 닿는 톱니바퀴의 투박한 마찰음 속에서 서툰 기억들은 비로소 선율이 된다. 한 바퀴씩 공들여 감던 그 수고로움은 효율을 앞세운 시대가 잃어버린 '기다림의 예의'였다. 그 느릿한 회복의 감각이 터널을 지나는 내 마음의 매듭을 고르게 펴준다.
열차가 시흥대야역에 멈춰 서고 지상으로 올라오면, 출구 너머로 시흥의 밤공기가 마중을 나온다. 익숙한 상가 거리를 지나 골목에 접어들면 어느 집 창문 틈으로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번져 나온다. 그 냄새는 내가 주방에서 가족을 위해 앞치마를 둘렀던 주말의 풍경을 부른다. 팬 위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봄동의 빛깔이 아침의 해를 닮았다면, 뭉근하게 끓는 된장찌개의 색은 저녁의 노을을 닮았다.
우리네 밥상은 아침과 저녁을 한 데 모으는 신비로운 예식이다. 동해의 수평선에서 밀어 올린 노란 기운이 봄동의 잎사귀에 맺혀 있고, 서해의 갯벌로 잦아든 붉은 위로는 뚝배기 속 된장에 녹아 있다. 시작과 끝, 탄생과 소멸이 식탁 위에서 비로소 갈등 없이 조우한다. 인생의 중년 역시 이 밥상을 닮아간다. 치열했던 아침의 열정과 평온해야 할 저녁의 사유가 한 상 위에 오를 때 삶은 비로소 완전한 문장이 된다. 가족의 젓가락 소리가 공허를 메우는 평화 속에서, 나는 행복이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소박한 한 그릇의 온기였음을 배운다.
나의 퇴근길과 나의 중년, 그리고 써 내려갈 글들이 지하를 지나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곁을 내어주길 소망한다. 어둑어둑한 골목 위로 밤이 밀려온다. 집으로 향하는 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별로 변해있을 노을에 경의를 표한다. 오늘 하루도, 내 인생도 이 일몰처럼 참으로 경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