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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천만원을 대신 갚아주고 억장이 무너졌다.

친인척간의 돈 거래

by 임세규


*왕래를 끊고 살던 사촌형에게 큰어머니의 부음을 알려준 사연*


"사촌 형은 작은 엄마도 엄마라며 안 갚아도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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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자정이 다되어갈 무렵 자동차 한 대가 오늘과 내일 사이의 정적을 가르며 주차장에 멈췄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가 내게 다가왔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예산역 근처의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사촌누나가 먼저 우리를 맞이했다.


학창 시절 방학이 되면 시골 큰집에 내려가서 며칠을 머물다가 왔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인사드리러 방문한다는 건 틀에 맞춰 돌아가는 도시 생활속에서 쉽지 않았다.

어느 해 여름휴가 때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큰 어머니를 찾아뵌 적이 있었다. 큰어머니는 나를 보자 “ 뉘여 뉘여 ” 하셨다. " 저예요 저.. 세규예요. ''으응.. 누구.. " 기억 저편에서 아무리 불러내려 해도 큰어머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셨다.

사촌 형은 큰어머니가 얼마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신다고 했다. 가끔은 온전한 정신이지만 가족들도 못 알아보신다고 했다. 추운 겨울에 큰어머니가 따끈따끈한 고구마를 '호~호 불며 껍질을 까주셨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큰 어머니는 아들 셋에 마흔이 넘어 얻은 늦둥이 딸을 키우셨다. 사촌누나는 초등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의 엄마는 젊은데 우리 엄마만 늙었다고 학교에 오지 말라고 투정을 부렸다 했다. 철없던 시절 아무 생각 없이 큰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살아생전 어머니께‘ 좀 더 잘해 드릴 것을 ’하는 후회만이 남는다며 누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가을밤 영안실 앞 화단의 고즈넉한 풀벌레 소리는 달빛과 어우러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들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둘째 사촌 형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어려운 살림에 농사를 지으며 큰아버지는 논과 소를 팔아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 형의 뒷바라지를 했다.

둘째 형은 여름 방학 때면 책값이라도 번다며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을 돌면서 kg 당 가격을 매겨 사들여 일본에 수출한다던 미꾸라지를 논에서 나와 함께 잡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자동차 회사인 H 기업에 입사를 했고 과장까지 진급을 했다. 언젠가는 결혼을 한다고 깔끔한 정장에 흰색 소나타를 몰고 작은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다며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촌 형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다녔다. 처갓집도 남부럽지 않은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한 달 후 돈이 들어온다며 큰 금액이지만 이자는 넉넉히 드릴 테니 1000만원정도 융통할 곳이 없느냐는 사촌 형의 전화를 받았다. 마침 어머니 친구 분 중에 여유가 있는 분이 계셨고 시중 은행보다 조금 더 많은 이자를 주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친구는 어머니를 믿고 사촌 형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한 달 후 돌려준다던 1000만원은 그가 경영하던 회사의 부도와 함께 언제 받을지 모르는 답답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친구를 믿고 돈을 빌려 주었지만 받을 방법이 없자 30년의 우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사촌 형과 친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셨다.


친구들이 대학교를 다닐 때 나는 군 입대를 하기 전까지 사회 경험을 해본다며 많은 일을 했다. 건설 현장에서 하루 종일 허드렛일을 하며 새까맣게 탄 얼굴로 지냈다. 한 여름 경마장에서 둘리 인형 탈을 쓰고 온몸을 땀에 적셔도 보았다. 우비 만드는 공장과 대형 식당에서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했다.

부지런히 살았고 부지런히 벌었다. 친구들이 자주 가던 당구장도 가지 않았고 담배조차도 피우지 않으며 제법 큰돈을 모았다.

어머니는 내가 군대에 있는 2년 동안 사촌 형이 빌려간 돈을 돌려줄 거라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내가 모아둔 1000만원 을 친구에게 주셨다. 그런데 그 날 이후 사촌 형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어머니에게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돈을 빌렸을 때 차용증을 쓴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작은 엄마가 대신 갚아주었느냐며 그는 오히려 화를 냈다. 둘째형 대신 어머니가 친구에게 갚아준 돈은 ' 아들이 몇 년을 어떻게 해서 모은 돈 1000만 원인데 ' 빌려달라고 사정사정할 때는 언제고 그는 인간관계의 감정을 무시했다.

법을 운운하는 사촌 형에게 어머니는 믿었던 사람의 실망과 배신감으로 인해 없으셨던 고혈압과 울화병이라는 지병을 앓게 되셨다. 군대를 제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 전후 사정의 설명을 들었다.

친인척 간의 왕래를 끊고 사는 그를( 나중에 알고 보니 형제지간과 집안 어른들께도 50만 원 30만 원 자잘한 돈을 빌려가고는 갚지 않았다.) 겨우 수소문해서 어머니와 함께 그를 만났다.

사촌 형은 작은 엄마도 엄마라며 안 갚아도 된다는 억지를 부리고 더 이상 볼일이 없을 거라며 서로 의절하자고 했다.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졌다.


큰어머니의 발인이 내일이었다. 하지만 둘째 사촌 형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연락할 길이 없으니 안타까웠다.

나는 친인척 간의 돈거래로 인한 불편함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우선 그에게 ‘ 큰어머니의 부음을 알릴 방법이 없을까 ’ 고민을 하다가 혹시 지금 살고 있는 주소라도 알 수는 없는지 사촌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는 혹시나 큰어머니가 돌아가실 것을 대비해서 주민등록 초본을 6개월 전에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초본에는 그의 주소가 나와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큰어머니의 장례에 주소는 알고 있지만 전화번호를 모르니 연락할 길이 없었다. 다음 지도에 주소를 넣고 로드뷰를 검색했다. 골목골목 실제 차량이 이동을 하면서 찍어놓은 사진과 같은 지도를 봤다. 사촌 형이 살고 있는 주소의 건물을 유심히 보니 2층은 가정집이고 1층은 옷가게였다. 옷가게의 간판에 전화번호가 있었다.

그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희망이 보였고 일단 전화를 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전화 시도에도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진을 찍은 업데이트 날짜를 보니 3년 전의 로드뷰이었다.


주민등록 초본에 적혀 있는 주소지 관할의 파출소에 연락을 했다. 집안 사정을 얘기 하자 경찰관 한 분을 보내어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전해 준다고 했고 내 전화번호와 이름을 남겼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낯선 전화번호가 영상에 떠올랐다. 전화기 건너 들려오는 사촌 형의 목소리는 약간의 흐느낌이 섞여 들려왔고 장례식장을 물었다.

영안실의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무렵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순간 큰어머니의 영정사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10년 만에 그를 만났다. 억지를 부리고 더 이상 보지 말고 의절하자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머니께도 말씀드렸고 돈을 받겠다는 생각은 그때 이후 하지 않았다. 사촌 형은 내게 연락을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형이 대학교 다닐 때 나와 함께 미꾸라지를 함께 잡던 기억이 나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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