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이색을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정도전, 왜 그랬을까

by 임세규


631년 전 1392년 그해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국무회의에서 먼지방으로 귀양 보낼 명단을 작성했다. 이들은 각각 울릉도, 추자도, 제주도로 보내기로 했다.


" 나는 그들이 참으로 불쌍하다. 지금 이들을 여러 섬으로 나누어 보낸다고 하니, 이것은 믿음을 잃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이 많지 않은 섬으로 보내면 옷이나 음식은 어디에서 구한다는 말인가.. 반드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을 것이다. 이들이 경기도에 머문다고 한들 다시 반역 모의를 하지 않을 것이다. "


- 조선왕조 실록, 태조 1년 7월 이성계 -


위화도 회군 (1388년. 5월 ) 이후 드디어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의 왕 (1392년. 7월 17일 )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30일 조선 건국을 반대한 세력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되기 시작했다.


이들 속에 신진사대부의 아버지 이색이 있었다. 조선건국 세력의 주축이었던 신진사대부를 키워낸 스승이었건만 이색은 새로운 나라를 끝까지 반대했다. 고려말 신진사대부는 유교의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이색을 중심으로 온건 개혁파 (정몽주, 길재 등 ), 와 급진 개혁파 ( 정도전, 남은 등 )로 나뉘었다.


이색은 학문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인물이었다. 그는 원나라로 건너가 성리학을 공부한 후 왕 앞에서 보는 최종 시험에서 2등을 했다. (사실 1등을 했으나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2등으로 밀렸다고 한다. ) 경쟁이 치열했던 중국의 과거시험에서 자국민들과 겨루어 외국인이 장원을 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이색은 이후 고려로 돌아와 신진사대부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이색의 집안은 엘리트 집안이었다. 아버지 이곡 역시 원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관리로 있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이색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학문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색은 고려로 돌아왔다. 젊은 청년 이색은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동참했다. 권문세족의 횡포를 견제하며 자신이 공부한 성리학을 정치사상으로 내세웠다.


한편 정도전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외할머니가 천민 출신인 까닭에 신분제도의 고려 사회에서 평생 발목을 붙잡혔다. 그는 공민왕 11년에 과거 급제를 하고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곧은 성정 (性情)탓잇지 유배와 객지를 떠돌면서 교육과 저술에 매진했다. 결국 1383년 함경도로 찾아가 이성계를 만난 후 도움을 받아 다시 중앙정계로 진출했다.


이색은 정도전의 스승이다. 무엇 때문에 정도전은 스승을 그토록 죽이고 싶었을 까..

성리학을 함께 공부한 그들이다. 성리학은 공자에서 시작된 유교의 한 갈래다. 중국의 대표사상은 유교 > 훈고학 > 성리학 > 양명학으로 이어진다. 성리학을 쉽게 말하면 유교의 현실 실천적 학문이다. 아무리 좋은 학문이나 이념이 현실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저 이상만 있을 뿐이다. 신진사대부는 이상이 아닌 유교의 실천적 요소를 받아들였다.


성리학 공부를 함께 하고도 스승과 제자는 생각이 달랐다. 이색은 권문세족의 폐단으로 얼룩진 고려를 성리학을 통해 개혁하려 했다. 반대로 정도전의 성리학은 새로운 왕조를 열기 위한 사상이었다. 여기서 잠깐 이 두 사람은 어떻게 해서 입장 차이가 났는지 생각해 보자.


앞서 보았듯 이색은 엘리트 집안의 배경에 고려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이렇다 할 뒷 배경이 없었다. 아버지 정운경도 평범한 관리의 삶을 살았다. 더군다나 그는 조모가 노비출신이라는 이유로 출세는 한계가 있었다.


필자 역시 정도전의 입장이었다면 한이 많이 맺혔을 것 같다. 정도전도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이색과 함께 할 때부터 역성혁명을 마음먹은 건 아닐 거다. 고려 귀족들에게 집안에 천민의 피가 흐른다는 핍박을 받은 그는 점점 지쳐만 갔다. 이때 이색이 정도전을 좀 더 포용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성리학은 유교의 실천적 학문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여전히 책 속의 이상을 현실과 일치하려 하지 않은 유학자들은 이율배반이라 정도전은 생각했다. 성리학의 학문적 소양은 존경하지만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은 스승 이색에게도 그는 실망했다.


" 뜻은 버리고 한 풀이를 하려는 것이냐. "


" 맞습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소생 지금 백성들의 피를 빠는 주인들에게 한풀이를 하는 중입니다. "


" 똑똑히 듣거라. 정치는 부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다. "


" 스승님께서는 지키십시오. 저는 부술 것입니다. 권문세가로서 스승님이 소유하신 전국의 수많은 땅들과 말입니다. "


" 네 이놈, 가거라 ~ 이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다. "


" 바라던 바입니다. "


- KBS 드라마 정도전 중에서 -


토지제도 (과전법)의 개혁 과정에서 이색과 정도전의 갈등을 실제처럼 보여준 드라마 속의 대화다.


다른 한편으론 이성계의 이색에 대한 신뢰가 지속되었기에 정도전은 반발 심리가 더 커졌을 수도 있다. 이성계가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 술자리에서 상석을 이색에게 내준 점, 어떻게든 이색을 회유하려 했던 정황들, 유배마저 섬으로 보내지 않았던 일들로 미뤄보아 정도전에게 이색은 눈에 가시였다.


단순히 이성계가 건국 반대 세력인 이색을 옹호했기 때문에 정도전이 스승을 죽이려 하진 않았을 거라 보인다. 정도전이 꿈꾸는 세상은 왕권중심이 아니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삼은 재상중심의 나라를 계획했다. 이색은 고려의 왕권을 유지하며 성리학을 통한 개혁을 생각했다. 스승이라 할지라도 정치 노선이 다르고 이색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색을 사람이 없는 영종도로 보내려고 하자 경기 계정사(京畿計程使) 허주(許周)가 정도전에게 물었다.


" 왜 그를 무인도로 보내고자 합니까? "


" 섬으로 보내려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 넣기 위함이다. "


정도전의 의중이 한마디로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 이글의 대화 내용은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내용과 KBS드라마 정도전의 대사를 이해하기 쉽도록 일부 각색했습니다. *



도당에서 이색 등을 도서 지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청했으나 내륙으로 유배토록 하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일의 교서(敎書)에 기재된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낼 사람은 무릉(武陵)·추자도(楸子島)와 제주(濟州) 등지로 나누어 귀양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교서(敎書)에 이미 ‘내가 오히려 이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했는데, 지금 또 여러 섬으로 나누어 귀양 보낸다면 이는 신(信)을 잃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이 없는 땅에 귀양 보낸다면 의복과 음식을 어찌 얻겠는가? 반드시 모두 기한(飢寒)으로 죽게 될 것이다. 이 무리들이 비록 기내(畿內)에 있더라도, 다시 어찌 모의(謀議)하겠는가?"

(중략)

교서(敎書)가 처음 내리매, 정도전(鄭道傳)이 이색(李穡)을 자연도(紫燕島)로 귀양 보내고자 하여 경기 계정사(京畿計程使) 허주(許周)로 하여금 잡아 보내게 하였다.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를 어렵게 여겨, 그 구처(區處)할 것을 물으니, 도전이 대답하였다.

"섬에 귀양 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 넣자는 것이다."

조금 뒤에 이색을 장흥(長興)으로 귀양 보내라는 명령이 나오게 되니, 도전의 계획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7월 30일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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