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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저빔 Jun 21. 2023

소시지 반찬과 독서의 관계

아껴두고 싶어서

  근범이는 급식을 먹을 때, 좋아하는 소시지 반찬을 끝까지 남겨두었다가 따로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런 근범이가 저에게 해주었던 말이 있어요.


  “소시지를 좋아한다면서 왜 안 먹고 남겨놔?”

  “제가요,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라서요. 아껴놨다가 마지막에 먹으려고요. 저는 그게 좋아서요. 선생님도 이렇게 한번 해 보세요. 그러면 더 맛있거든요”


  근범이는 소시지 반찬이 나오는 날은 밥을 먹는 내내 행복하다고 했어요. 물컹거리는 버섯이 나와도 얼마든지 참고 삼킬 수 있다면서요. 저는 근범이가 소시지 반찬을 아껴둘 때 느끼는 그 기대감이 책을 읽는 기쁨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책을 만나 그 안의 문장들을 사랑하게 되면 그 행복한 만남이 빨리 끝나는 것이 아쉬워 아껴두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독서 이야기를 하자면, 성원이라는 아이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책을 참 좋아해서 교실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보고 오후에도 교실에 혼자 남아서 독서를 하던 아이였어요. 친구들 사이에서도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유명했고 다른 선생님들도 그런 성원이를 볼 때마다 어쩜 그렇게 책을 좋아하냐며 기특하다고 한마디씩 거들곤 하셨어요. 심지어 장르에 상관없이 골고루 잘 보기까지 했으니 독서에 관해서라면 흠을 잡을 게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성원이가 얼마나 책을 사랑하는 아이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지요.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 덕분에 성원이는 상식이 풍부했고 생각도 깊었어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커서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았고요. 그렇게 장점이 많은 아이였지만 사실 성원이는 공부를 아주 잘하지는 못했어요. 책을 많이 읽으면 당연히 공부도 잘하겠거니 생각하겠지만 특별히 내세울 정도의 성적은 아니었거든요.


  대신 성원이는 요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직접 팬케이크를 구워 와 친구들에게 맛보여 주기도 했고 자신이 만든 간식거리를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일에 진심이었습니다.


  독서를 많이 하는 아이를 나무랄 어른들은 아마 없을 거예요.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희망 사항을 이야기할 때 ‘우리 아이가 책을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라고 흔히 말합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장난감이나 캐릭터용품이라면 고개를 내젓더라도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책이라면 해외에서라도 구해줄 의지를 불태우는 게 부모 마음이지요. 이런 어른들의 마음속에는 독서의 결과가 학습력으로 연결된다는 계산이 깔려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마다할 부모님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요.


  언젠가 성원이가 졸업한 지 한참이 지났을 때, 성원이와 여전히 연락이 닿고 있는 저를 보고 같은 학교에 근무했었던 선생님 한 분이 궁금해하셨어요.

  “그때, 책 많이 읽던 성원이 맞죠? 걔 어느 대학 갔어요?”


  성원이는 이름있는 대학은 아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인 요리로 특화된 학교에 진학해서 즐겁게 배움을 이어가고 있었고 저는 그 사실을 힘주어 전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들은 그 선생님은 (예상대로)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얘기하셨지요.

  “책을 그렇게 많이 읽더니, 대학교는 좋은 데 못 갔네.”


  그렇게 얘기하는 선생님에게서 저는 불편함을 느꼈지만 대꾸하지는 않았어요.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고 그저 책을 많이 읽으면 공부도 잘할 거라는 편견에서 온 가벼운 생각이었을 테니까요. 사실 이런 종류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과도 대체로 마찬가지였어요. 속으로는 약간 실망하더라도 예의를 차려 티 내지 않거나, 솔직하게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지요.


  다만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성원이가 즐기고 사랑했던 독서의 가치가 희석되는 것이 저는 영 못마땅했습니다. 이름있는 대학에 가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독서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조명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독서는 폄하되어 버리는 건 몹시 씁쓸한 일입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세상의 수많은 책은 모두 학습과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마니까요.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가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해서만은 아닌데. 더 나은 입시 결과와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만은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만약 성원이가 들었다면 얼마나 속상하고 언짢을까요.


  초등학교 시절 저는 독서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습니다. 집에 책이 많이 없어서 읽을 기회가 적기도 했지만, 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빌려다 볼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았어요. 그럼에도 아무런 불편함 없이 지내오다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언어 영역에서 늘 구멍 같은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단순히 문제집을 많이 푸는 것으로는 메울 수 없는 어떤 틈 같은 것이었습니다. 부족한 독서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 놓고 독서를 하기에는 입시라는 불이 발등에 떨어진 상태였지요. 수능을 코앞에 둔 고등학생이 시간 걱정 없이 원하는 만큼 독서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요.


  대학교에 가서 좋았던 점 중의 하나는 마음껏 독서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느꼈던 부족함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한 독서였지만 저는 이내 마음을 빼앗겼지요. 하루에 대여섯 시간쯤 있는 수업을 받고 나면 시간이 정말 많이 남았고 그 대부분의 시간 동안 책을 읽었습니다. 겉으로는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이었어도 안으로는 누구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정도로요. 마음이 살찐다는 말을 처음으로 경험하기도 했어요. 그때 읽었던 책들은 어른이 되는 문턱에 서 있던 저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자아는 더 탄탄해졌고 삶을 대하는 긍정적인 뿌리도 더 깊어졌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때를 제 인생에서 가장 값진 시간 중의 하나로 생각해요. 책을 펼치면 다른 이의 삶을 온전히 품을 수 있었고 가만히 앉아서도 우주를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느꼈던 독서의 즐거움과 희열을 성원이는 분명히 알 거예요. 책과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책 속의 세계에 마음이 홀려 그 여행을 끝내는 아쉬운 경험을 이해할 수 있지요. 


  처음에는 책이 너무 두꺼워서 ‘언제 다 읽지’ 하다가도 나중에는 점점 빨리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쉬워 일부러 느긋하게 읽기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페이지를 나중에 읽으려 아껴두고 싶어지는 순간을 만나게 되기도 해요. 근범이가 소시지 반찬을 눈앞에 두고도 바로 먹지 않는 것처럼요. 그렇게 책 속에서 만나는 세계에 대한 설렘과 재미, 감동은 몇 마디 문장으로는 표현하기 힘들 만큼 큰 것입니다.


  아이들도 그런 독서의 즐거움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책과 평생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습관을 어릴 때 잡을 수 있다면 제일 좋은 일일 테니까요.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권수를 기록하고 끝을 보기 위한 읽기가 아니라, 멈추고 되새길 곳을 찾는 읽기가 되는 순간에 비로소 즐거움이 시작됩니다.


  ‘선생님, 저 책 5권 읽었어요! 저는 10권 읽었어요!’ 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게 읽다가 언젠가는 더 많이 읽은 걸 자랑하지 않고 그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순간을 만났으면 좋겠다고요.


  성원이는 이야기 속 주인공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한 덕분인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잘 알아차렸고 공감하는 능력이 좋았어요. 그렇다고 남들에게 휘둘리거나 눈치를 보는 타입도 아니었지요. 타인을 적절히 배려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아이였습니다. 저는 그런 성원이의 장점이 독서의 힘이라고 굳게 믿어요.


  아이든 어른이든 책을 읽으면 삶은 더 풍성해지고 더 나은 내일을 그리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에 책을 가까이하는 일은 더 멋지고 근사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즐거운 여정이어야 해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도구로 인식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겉보기에 똑같아 보여도, 속이 텅 빈 열매와 알맹이로 꽉 채워져 영글어있는 열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거예요. 꽉 찬 열매를 얻기 위한 수많은 노력 중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살면서 직접 경험하기 힘든 다양한 장면들을 소파에 편히 앉아서 마주할 수 있고, 혹은 침대에서 뒹굴면서도 함부로 상상하기 힘들었던 많은 감정을 전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친절하게 안내해 놓은 인생 지도가 바로 책이니까요.


  더 나은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 오늘도 책을 펼치는 아이들 사이에서 저도 함께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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