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 70년의 그림자—보유세·가치 환수·공공 활용 방안은?
1945년 해방 직후, 남한 농지의 65%는 소작지였다. 6년 뒤, 소작지는 8% 남짓으로 쪼그라들었다.
숱한 통계가 증언하듯, 농지개혁은 지주-소작 구조를 뿌리째 흔들었다.
그러나 개혁의 자취는 들녘 너머에서 갈라졌다.
법이 겨눈 대상은 ‘3정보(3 ha) 초과 논·밭’뿐이었다. 산줄기에 걸친 임야, 간척지 염전, 읍내의 금싸라기 땅은 “농지”가 아니었으므로 그대로 지주 손에 남았다.
지주들은 초조하지 않았다. 수십만 정보(町步)의 임야를 ‘학원재단’ 명의로 돌리고, 장터 한복판 대지를 상업용 건물로 바꾸었다. ‘농지’만 뺏기면 될 일이라는 계산이었다.
법 시행이 미뤄지는 1년여 동안, 일부는 가족·하인 이름으로 농지를 쪼개 파고들었다.
결국 농민은 논밭의 주인이 되었지만, 지주는 도시 부동산과 산업자본의 주주로 변신했다.
전쟁과 인플레이션 속에서 지가(地價) 보상증권은 휴지조각이 됐지만, 이를 증권회사나 방직공장 자본금으로 전환한 이들도 있었다.
일제가 남긴 ‘귀속농지’는 비교적 신속히 분배됐지만, 무력·회유로 탈취된 친일 지주의 도시·임야는 대부분 사법부도, 행정부도 건드리지 못했다.
2005년 특별법 이후 약 1,300만 ㎡의 토지를 환수했으나, 환수 토지 일부가 다시 후손에게 수의계약으로 돌아가는 일도 확인됐다. 여전히 ‘주인을 바꾸지 못한 땅’이 전국 곳곳에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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