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구조의 언어, 증명의 시간

흐름을 설계하려면, 지식이 먼저였다

by 김선철

한기준이
잔금이 찍힌 통장을

오래 눌러 보았다.

숫자의 온도를 재듯,
입가에 웃음이 스쳤다.


“형님, 이제 다음 판을 짜야죠.”


“그래...

더 큰 흐름을 설계해야겠지...”


김서준의 대답 뒤엔

발걸음을 붙잡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하연이를 만나던

교문 앞 손짓,

마주 앉아 나누던 떡볶이,

그 순간이 숫자를 앞질러

가슴에 닿았다.


다시 만난 딸의 웃음이

아직 가슴 속에 뜨겁다.


그 웃음을 지키려면,

흐름은

더 깊고 단단해야 한다


그때, 한기준의 말이

그 결심 위에 내려앉았다.


“형님,

이제는 물건이 아니라

흐름입니다."


"그 흐름을 타려면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전문성이,

실패를 막는 구조입니다.”


김서준이 고개를 들어

한기준을 바라봤다.


“지금도 감으로 움직이시잖아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마곡에서 겪으셨잖아요.”


그는 말없이

커피잔을 들었다.


몇 권의 책,

수십 개의 영상.


정보는 있었지만,

구조로 엮은 적은 없었다.


무의식처럼 믿었던 감각은

이제, 부끄러움이 되었다.


“혼자선… 안 되겠더라.”


그 말은 낮았고,

그 안엔 고집을 내려놓는

결심이 담겨 있었다.


***


며칠 후,

한기준은 김서준을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김 교수에게 데려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연구실 문을 열자,

서가 위에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창가의 오래된 커튼은

햇빛을 더디게 걸러냈다.


김 교수는

고개를 들어,

안경 너머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한기준이 먼저 말했다.


“김 교수님,

우리 형님이 지금은

경험으로는 꽤 단단해졌는데요...”


잠깐 말을 멈췄다.


눈치를 봤고,

김서준은 고개를 숙였다.


한기준이 말을 이었다.


“이제는

감이 아니라

구조로 가야 할 것 같아서요."


"투자를 업으로 하려면,

학문적 토대가 필요하다는 걸

형님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설명이라기보다

추천서 같은 울림이었다.


김 교수는

잠시 김서준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김서준 선생님은,

학위가 필요해서 오신 건 아니시죠?.”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엔 방향을 묻는

무게가 있었다.


김서준은

시선을 잠시 떨구고

낮게 말했다.


“네, 교수님.

작은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투자를

업으로 삼고 나니,

이젠 방향과 흐름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넓게 보고,

깊게 이해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김 교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다면,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배우는 과정이 있긴 합니다.”


김 교수는 서랍에서

팸플릿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년 1학기부터 시작되는

전문가 석사과정입니다.”


“오프라인 3학기 수강,

현장 실무로 1학기 대체.

총 3학기 안에 졸업이 가능합니다.”


한기준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교수님, 석사과정은 4학기 아닌가요?

그것도 5학기에서 줄인 지

얼마 안 된 걸로 아는데요.”


김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기존 학문 중심 석사과정과는 다릅니다.

공인중개사 자격을 보유한 분들에 한해,

입학자격이 주어지는 과정입니다.”


김 교수는 말을 멈췄다가

천천히 덧붙였다.


"공인중개사의 경험과 자격에

전문성을 더하는 순간,

업역은 확장될겁니다.”


한기준은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빛은 아쉬웠다.


“아... 교수님,

제게 딱 맞는 과정 같은데,

저는 이제 졸업이라 해당이 안 되겠네요.”


김 교수는 웃었다.

그 웃음 안엔

축하와 위로가 섞여 있었다.


“한 선생님은 이미

충분히 열심히 했습니다.

이제는,

그 배움을 밖에서 보여줄 차례죠.”


김 교수가 한기준에게 덕담을 이어가는 동안,

김서준은 테이블 위 팸플릿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안에,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그려져 있었다.


3학기, 단기간, 현장 대체.

그리고 흐림과 구조.


‘가장 빠른 길이

가장 단단한 길일 수도 있겠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질문했다.


“공인중개사 자격이 없으면...

입학이 안되나요?.”


말끝은 낮았지만,

그의 마음은 선명했다.


김 교수는 웃지 않았다.

이번엔,

정확한 어조로 말했다.


“자격증을 따셔야죠.

10월 말 시험이니…

지금부터라면

3개월 조금 더 남았습니다.”


말은 짧았지만,

길 위에 깃발 하나가

꽂히는 듯했다.


남은 시간 3개월.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이제는,

구조를 따라야 했다.


“합격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김서준이 고개를 숙였다.

김 교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날 오후,

김서준은 노량진역 근처의

한 공인중개사 학원에 들렀다.


여름비가 창문을 두드렸고,

벽면엔 두꺼운 문제집과

빛 바랜 팸플릿이

겹겹이 걸려 있었다.


“1차는 부동산학개론과 민법,

2차는 공법, 중개사법, 공시법, 세법입니다.”


“총 6과목,

평균 60점 이상,

과락이 없으면 합격입니다.”


상담사의 말은 평평했지만,

김서준의 머릿속은

날카롭게 계산하고 있었다.


‘20년간 실무로 다져진

민법, 공법은 자신 있다...

그럼 남은 건 암기 과목들....’


“3개월이면 가능할까요?”


그는 물었고,

삼당사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하루 8시간 이상,

공부할 수 있다면,

합격 가능합니다.”


“문제는 시간보다…

버티는 힘이에요.”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버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날 저녁,

기출문제집 두 권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유튜브를 열었다.


공인중개사 공부법,

100일 합격 전략,

기출문제 분석법.


십여 편의 영상을 보고 난 뒤,

머릿속에 남은 건 한 문장이었다.


'국가시험은,

기출문제에서 70%가 나온다.'


메모장에

그 문장을 적었다.


1차, 2차 평균 60점 목표


자신 없는 과목은 50점을 목표하고,

자신 있는 과목은 70점을 넘긴다.


전체를 기억할 수 없다면,

구조를 외워야 했다.


목차를 먼저 외우고,

각 목차에 들어갈 키워드를

로직트리로 분해했다.


20년을 건설회사에서

법규 검토로 버텨온 몸이었다.


민법은 낯설지 않았다.

공법도, 문장은 길지만

그 구조는 알고 있었다.


김서준은 학습전략을 정리했다.


'부동산학개론은 50점,

민법은 70점.

1차 평균을 넘긴다.'


'공법은 80점,

중개사법은 60점,

공시법과 세법은 50점으로

2차를 통과한다.'


그는 전략을 중얼거리며,

첫 번째 민법 인강을 열었다.


강사의 내용은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다.


그날,

민법 기출문제집 첫 문제는 틀렸다.


하지만,

문제의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


공부를 시작한 뒤,

밤이 깊어질수록

눈은 더 자주 흐려졌다.


민법 조문은 익숙해질 만하면

숫자가 섞였고,

공법 조항은

페이지마다 모양을 바꿔

기억에서 지워졌다.


열 번 읽은 문장은

열한 번째에도 낮설었다.


지식은 천천히 들어왔고,

망각은 한꺼번에 쏟아졌다.


김서준은 나이를 탓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기억은 하루만 지나도 지워졌고,

몸은 오래 앉아 있지 못했다.


어깨는 뻐근했고,

허리는 저렸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국가자격시험이었다.


책장을 넘겼고,

다시 기출문제를 펼쳤다.


늦은 공부엔

젊은 날의 열정이 없었다.


그 대신

시간이 없다는 절박함만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공부는

밤에 더 잘 됐다.


오후부터 새벽까지

문장과 숫자가

책상 위에 겹겹이 쌓였다.


자정 무렵,

민법 조항은

외우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이 되었다.


새벽 두 시.


책을 덮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잤다.


아침 6시,

알람이 울렸고,

정신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반쯤 잠든 몸을

억지로 욕조에 담갔다.


물은 미지근했고,

곧 차가워졌다.


십여 분이 지나자,

피부 끝에서부터

서늘한 감각이 올라왔다.


그때,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는 물 밖으로 나왔다.

타월로 몸을 감싸고,

식탁 의자에 앉아

강의 영상을 1.5배속으로 틀었다.


식은 물로 정신을 깨웠고,

그 정신으로

또 하루를 버텼다.


저녁 9시,

저녁을 먹고 학원에 들어가니

스터디룸 책상 위 문제집은

반쯤 덮인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중개사법 3회독.

그래도, 낯설었다.


그때 문득,

옆자리의 공백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째,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처음엔,

그저 피곤한 날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일주일을 넘겼고,

오늘도 오지 않았다.


‘이민우’였다.


서른셋.

조용한 성격에,

혼잣말로 '이번만 붙자'

하던 사람이었다.


기출 문제를 풀고,

오답노트를 쓸 때마다

그는 늘 고개를 흔들었다.


“형님, 전 안 되나 봐요.

풀었던 것도 자꾸 틀리네요.”


지난달 말엔,

모의고사 점수를 보여주며

웃지도 못했다.


“48점 나왔습니다.

그래도 50은 넘길 줄 알았는데요.”


그 말 뒤,

그는 커피를 사 왔다.

두 잔 중 하나는

늘 김서준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는 오지 않았다.


책상엔 낡은 형광펜 하나가

엎드려 있었다.


김서준은 가만히

그 자리를 바라봤다.


공부는,

시험에 붙는 사람보다,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적었다.


민우의 빈자리가
마음 한쪽을 붙잡았다.


하지만 책상 위의 시계는
남은 시간을 세고 있었다.


김서준은
다시 책장을 넘겼다.


***


시험 전날,

책상 앞엔

여섯 과목의 요약노트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김서준은

그 문장들 위에서

마지막 집중을 걸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하연이]

“아빠, 내일 공연 있잖아.

그날 오기로 했잖아.”


그는 침을 삼켰다.

한 달 전 약속했던,

딸아이의 학예회 발표.


김서준은

날짜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연아… 미안하다.

아빠, 내일 시험이 있어.

공인중개사 시험이야.”


휴대폰 너머,

잠시 정적.


그리고,


“...아빠는, 늘 그래.”


짧은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오래 묻어둔 기억들이
전화기 너머에서 밀려왔다.


전화가 끊기자
책상 위 요약노트가
힘없이 넘어갔다.


그날 오후,
그는 문제집을 덮고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왜 이 시험을 준비했는지,

마음이 흐려졌다.


'하연이한테

떳떳하려고 한 건데...

그 아이가 날 그렇게 봤다면,

이 시험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녁 9시.

알람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엔

하연이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아빠, 미안해요...

시험 잘 보세요.

공연은...영상 찍어서 보내줄게요.]


짧은 문장들이

가슴을 데웠다.

손끝에 힘이 돌아왔다.


그 순간, 알았다.


지식은

살아남기 위한 게 아니라,

다시 품기 위한 자격이었다.


그는 폰을 내려놓고

다시 책을 폈다.


오늘은 버텨서 간다.
합격으로 끝낸다.


***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

공인중개사 시험 날이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김서준은 오전 7시 30분에

시험장인 인근 중학교에 도착했다.


운동장엔

낙엽이 깔려 있었고,

교문 앞엔

덜 깨어난 얼굴들이

줄을 서 있었다.


8시 정각.

입실이 시작됐다.


그는 신분증을 찾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이 없었다.


정확히는
사라져 있었다.


가방을 열어
안주머니까지 뒤졌다.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갑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8시 15분.

줄은 길어졌고,

시간은 급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신분증 분실입니다.”


그가 말했다.


감독관이 길 건너를 가르켰다.


“주민센터는 아직 닫혔고,

지구대 확인서뿐입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학교 길 건너 지구대,

그는 헐떡이며 문을 열었다.


형광등 아래,

경찰 하나가

컵라면을 들고 있었다.


“공인중개사 시험 봐야 하는데,

지갑을 두고 왔습니다.

실명확인서 좀 부탁드립니다.”


경찰은

주민번호와 주소를 확인했다.

프린터는 느리게 움직였다.


A4 한 장.

‘주민등록증 확인서’


그것이 오늘 하루를 결정할 전부였다.


그는 인사를 생략했다.

시간은 이미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시험장으로 뛰었다.


8시 55분.

입실까지, 5분.

감독관은 서류를 확인했다.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그는 책상으로 걸었다.


그날의 끝이,

그곳에 있었다.


책상 위엔

수험번호와,

검은 볼펜.


그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첫 번째 시험지가

사뿐히 내려졌다.


그 순간,

펜을 쥔 손끝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첫 문제를 바라봤다.


숫자가 있었고,

지문이 있었고,

그 사이에

시간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 순간,

기억이 파고들었다.


회의실 복도 끝.

희망퇴직 통보서 위,

낯선 글씨체로 쓰인 자신의 이름.


그날 밤,

식지 않은 국 옆에 말없이 놓인

협의이혼 신청서.


딸아이 방 문에 붙은

‘아빠 출입금지’ 포스트잇.


그때,

그는 작게 중얼거렸었다.


“왜, 나야…”


그 말은,

이젠 들리지 않았다.


시험은,

다만 시작일 뿐이었다.


그는 종이 위에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김서준은

문제지를 다시 바라봤다.


지문 안에서 문장이 움직였고,

그 문장 너머로

다시 걸어야 할 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모든 문제가 숫자였지만,

그날만큼은,

내 삶의 문장 같았다.


1차, 2차.

총 6과목을 넘겼고,

그는 책상에 엎드린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오후 5시.

시험은 끝났고,

교문 밖으론 가을빛이

운동장을 길게 가르고 있었다.


문제는 끝났고,

정답은 아직 모르지만,

이 길만은

그가 선택한 방향이었다.


그날,

정답보다 먼저

다시 걷는 법을 기억해냈다.


저녁 6시.


학원에선

온라인 정답 풀이가 시작됐다.


집에 도착하니

창밖은 어스름했고,

스탠드 불빛 아래

시험지가 다시 펼쳐졌다.


영상 속에서

정답 해설이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이 동그라미 친 번호 위로

하나씩,

체크를 해나갔다.


한 과목,

두 과목.

숫자가 쌓였고,

점수는 정확히

커트라인 위였다.


1차 62점.

2차 60점.


합격이었다.


수많은 새벽들,

수십 번의 포기,

식은 물이 담긴 욕조,

흐려진 눈과 저린 허리.


그 모든 무게가

점수 두 줄로 바뀌었다.


핸드폰을 켰다.

하연이의 영상이 도착해 있었다.


작은 무대 위,

딸아이는

작은 바이올린을 들고 있었다.


그날,

그는

정답보다 먼저

딸아이의 눈빛에서

자격을 보았다.



[다음화 예고]


지식은 무기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사람과 구조 사이,

그는 관계의 깊이 속에서

다음 판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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