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리랑카의 장례 문화, 한 번 들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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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생각보다 두 눈으로 시신을 마주한 일들이 많았다. 바로 스리랑카의 장례 문화 때문이다.
스리랑카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본다면 사시사철 고온 다습한 국가이지만 그 안에는 건기와 우기가 나뉘어 있어 나름의 계절감이 존재한다. 우기에는 건기보다 기온이 내려가 상대적으로 건기보다 우기에 사람들이 많이 돌아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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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리랑카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살을 부대끼며 살았기 때문에 알고 지내던 어르신이 하룻밤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나는 당시 마을의 유일한 외국인이었기에 마을에 행사가 있다 하면 주민들은 으레 먼저 나를 찾아주셨다. 또 그들이 나를 초대할 때는 정말 큰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나도 웬만하면 모두 참석했었다. 나도 마을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나를 불러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기꺼이 발걸음을 내밀었다.
하지만 우리 사무실 직원들은 내가 마을 행사에 초대될 때마다 정확히 어떤 행사에 초대되었는지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다. 사실 나도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행사라는 것이 나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일개 참가자일 뿐이기에, 늘 행사장 구석에 앉아 있다가 가끔씩 격려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사장에 도착해서야 어떤 행사가 열리는지 알게 되는 경우가 거의 대다수였다. 그렇게 마을 유치원 개소식에, 마을 우물 개소식에, 초등학교 개교기념일에, 마을 스님이 주관하는 집단 예불(禮佛) 행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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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내 코디네이터가 행사장에 가기 전에 과자를 하나 사가는 것이 어떻냐고 해서, 동네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하나 정성스럽게 포장해 행사장에 간 적이 있다. 뜬금없이 과자를 사기에 나는 당연히 아이들과 관련된 행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한 장소는 생각한 곳과 달라서 너무 놀랐다. 내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장례식장이었다.
그날은 처음 스리랑카의 장례 문화를 접하는 날이었다. 상주가 나를 맞이하더니 자기 집의 방 안으로 인도해 주었고, 대뜸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어르신께 인사를 시켰다. 나는 내가 마주하고 있는 분이 돌아가신 분의 육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때 코디네이터가 나에게 돌아가신 분을 위해 짧게 기도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놀란 가슴으로 돌아가신 어르신에게 짧게 묵념을 바쳤다.
스리랑카의 장례 문화는 당연히 우리나라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스리랑카에서는 집안에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망자의 옷을 새하얀 옷으로 갈아 입하고, 그를 깨끗이 정돈된 침대에 모신다. 침대에 전통 장식을 한 뒤, 부고 소식을 알리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조문객은 직접 망자(亡者)의 댁으로 찾아뵈어 마지막으로 죽은 이를 직접 접견하고, 명복을 빌어준다.
문상을 하고 나면 상주가 차와 과자를 꺼내와 조문객에게 대접한다. 우리나라와 같이 따로 식사를 대접하지는 않으며, 약식으로 다과를 내어주는 문화인 듯했다. 그제야 왜 과자를 사 왔는지 이해되었다. 문상객이 계속해서 찾아오므로, 다른 손님들을 대접할 과자를 준비한 것이다. 나는 이전에 조문 왔던 이의 과자를 받아먹었고, 또 내가 가져간 과자는 누군가를 대접할 일용할 다과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처럼 직접적으로 금전적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조문객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문화라 참 신기하면서도 또 그 안에 품고 있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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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마을 행사에 갈 때 내 코디네이터가 “과자를 사가자”라는 이야기를 할 때면 직관적으로 ‘오늘은 장례식 장에 가는구나’하고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비스킷을 사는 날이면 꼭 눈물 젖은 눈망울을 마주해야 했다.
물론 나도 사람이기에 처음 영혼이 떠난 육신을 마주했을 때에는 당연히 섬뜩했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절대 다수인 시골 산골 마을에서 생활했었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언젠가부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죽음에 익숙해지고서야 진정으로 고인을 기리는 명복을 빌어드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여러 번 시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몇 번의 시신을 바라보며 내 안에서 새로이 샘솟던 감정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이 있다. 적어도, 내가 보았던 모든 시신들은 인자로운 느낌으로 평화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 영혼이 세상을 떠난 뒤 뒷수습을 하는 유가족들이 망자의 표정을 인위로 바꾸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마주했던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생애가 어떠했는지는 크게 상관이 없는 듯했다. 살아 있을 적에 그가 부유했던지, 빈곤했던지, 삶의 풍파가 많았었는지, 늘 긍정적이었는지 혹은 부정적이었는지 관계없이 삶의 끝은 맞이한 이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결국 세상을 떠날 때는 저렇게 웃게 되는 걸, 우리는 삶 속에서 왜 이렇게 화를 많이 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누구를 미워하던, 누군가를 싫어하던, 모든 혐오의 감정은 모두 거품처럼 사라지고 결국 한 방울의 미소만이 남게 된다면, 현실 속 미움의 감정은 사실 모두 아무 의미가 없는 허상의 행위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죽은 이를 마주함으로써 비로소 살아남은 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배운 것이다. 떠나보내는 것은 단연 슬프겠지만, 또 이렇게 남는 이에게 남겨 주시는 것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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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현지 적응 교육을 받을 때 한 동료 직원은 현지인 집에서 정말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된 듯 잘 지내었다. 매일 출퇴근을 할 때 주인집 아주머니를 꼭 안아주는가 하면 매 끼니를 꼭 그 가족들과 함께하며 마치 정말 동양에서 온 맞아들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 역시도 정말 맞아들처럼 지냈다.
그 집의 주인아주머니는 왜인지 음식을 잘 삼키지 못하는 날이 많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후두암의 증상 중 하나였다. 아주머니가 후두암 말기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유명을 달리할 상황에 처하자 그 가족은 그 동료 및 우리 단체에게 수술비를 보전해 줄 수 있냐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고작 대학생 신분이었던 우리는 사실 큰 도움을 드릴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목숨을 오래 끌고 가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그 동료 직원은 끝끝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아쉬움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야 했다.
그녀를 조문하러 가는 길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사면서 얼마나 마음이 착잡하고 무거웠는지 모른다. 그 경험 역시도 내게 ‘억울함이 없이 살려면, 악착같이 살아라.’라는 큰 다짐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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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주하였던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은 꼭 내게 잊을 수 없는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 주었다. 나는 이를 가슴에 새기고선 잊지 않고, 두고두고 꺼내보며 살아갈 것이다. 죽은 이는, 산 이에게 많은 것들을 물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