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대체 어디일까, 나의 정체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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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읍/면/리로 된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리 집은 통/반에 속해있었다. 맞다, 반상회(班常會)를 할 때 쓰는 그 반(班)이다. 집 근처에는 논과 밭이 있었고, 집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너른 과수원이 있었다. 자연스레 흙, 모래와 가까이 지냈고, 동네 놀이터에 가면 늘 또래 형 누나들이 자리 잡고 온갖 놀이를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우중충한 표정으로 시소에 앉아 있을 때면 어느새 모르는 누나가 내게 다가와 같이 흙공 놀이를 하자며 나를 무리에 끼워주었다.
모르는 형, 누나들과 엄청 어울려 다녔다. 우리는 무리 지어 동네에 피어 있는 아카시아 꽃대를 따먹기도 하고, 가끔은 형들이 서리해 온 사과를 받아먹기도 했다. 동네에서 가장 번화한 읍내를 나가도 별 대단한 것은 없었다. 읍내에는 햄버거 가게 하나와 돈가스 가게 하나, 몇 개의 옷 가게와 전통 시장이 있었다. 그마저도 읍내에 나갈 일이 잘 없으니, 돈가스는 생일 때나 먹는 음식이었다. 그럼에도 삶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다들 이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고, 실제로 다들 이렇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주 농촌 시골집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래도 나는 그 시골 마음에 몇 없는 아파트에 살았다. 아버지는 국가가 운영하는 방위산업체에 다니고 있었고, 집에는 나름 현대식 전축도 있었으며, 잘 시간이 되면 항상 그 전축으로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셨다.
나의 자장가는 매일 밤바다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비발디의 사계였다. 어머니께서 정서에 좋으라며 매일 밤 틀어주신 그 음악을 나는 매우 사랑했지만, 결코 봄의 1악장을 넘겨 들어본 기억은 없다. 시골의 환경에서 우리는 나름 현대적인 가풍을 유지했다.
이렇게 어린 나에게도 농촌과 도시 사이의 간극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정체성은 농촌과 도시 그 사이에서 점점 자라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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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는 대구광역시 근처의 위성 도시로 진학했다. 그곳 역시도 마찬가지로 시골이었으나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대도시로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 처음 도시에서 지하철에 올랐을 때 이렇게 쾌적하고 빠르게 어딘가로 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신기하기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겪은 많은 것은 내게 도시 생활이라는 환상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한 번은 친구가 대구에 있는 3D 놀이기구장에 데려다준 적이 있었는데, 나는 정말 문화 충격을 받았다. 3D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 순간이었고, 기구를 타는 내내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기구에 혼이 나가버릴 만큼 즐거웠다. 어쩌면 도시에 대해 처음 환상을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그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그때부터 집안의 형편이 어떠하던지 나는 맹목적인 도시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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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학은 광역시 수준의 도시로 가게 되었다. 확실히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온갖 유흥거리가 많았다. 도시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름 온갖 산해진미를 모두 맛보았다. 남미에서 먹는다는 아보카도 타코를 먹었고, 남인도에서 먹는다는 브리야니와 사모사를 먹었으며, 유럽 어딘가에서 먹는다는 토끼 고기를 먹었다. 그렇게나 환상적이었던 3D 놀이기구를 마음만 먹으면 매일이라도 탈 수 있었고, 전축이 아닌 실제 오케스트라로 비발디의 사계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온갖 유흥거리에 직간접적으로 세상 곳곳을 체험할 수 있었고, 그렇게 나는 점점 더 넓고, 넓은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목가적 생활에서 간헐적으로 겪은 도시의 경험이 도회지의 삶을 꿈꾸게 만들었고, 도시에서 맛본 세계의 경험이 점점 모국 밖의 생활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나의 모든 관심과 시선은 해외로 향했고, 별 준비도 못한 채 그냥 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늘 도시의 삶을 바랐던 내가 막상 외국에서 향한 곳은 또다시 산골 마을이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대학생에게 열려있었던 해외를 향하는 기회는 거의 전무했지만 그나마 시골 마을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몇 열려 있었다. 그렇게 나는 ‘국제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개발 도상국의 한 시골 마을로 떠났다. 그곳은 정말 개발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7080년대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고, 21세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러한 환경이 또한 적잖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곳에서 약 2년간 지내며 어제와 오늘과 또 내일이 다르지 않은 삶, 그리고 자신이 속한 환경과 주어진 환경에 불평 없이 만족하면서 살 줄 아는 농촌 사람들의 순수함을 목도했다. 적어도 그 사회에서는 취업이니, 뭐니 하며 평생 안고 살았던 고민들은 모두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줄 아는 부처님의 모습이 마을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도시를 맛보았던 나에게는 그 공간이 결핍의 바다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돈을 주고 남이 만든 음식을 먹고, 스마트 폰 하나로 세상의 모든 것을 검색하던 내가, 요리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고, 통신은 커녕 전기조차도 귀한 그러한 환경은 도저히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몸은 산골에 있었지만, 늘 마음만은 도회지에 가 있었고, 공휴일이나 주일이 되면 두 말할 것 없이 수도로 올라가 평소에 하지 못하던 나의 속된 욕구들을 배설하듯 소비해버리기도 했다.
약 2년간의 산골 생활은 나를 진정한 촌락인으로 만들어 놓지 못했다. 깊게 차오르는 도시에 대한 욕망 안에 더 이상 농촌의 삶을 유지하기 힘들었고 또 선진화된 도시를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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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선진국이라고 일컫는 일본을 거쳐, 조국의 수도인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막상 서울에 올라와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 입구 안으로 몸을 욱여놓고 있노라면, 농촌에서 생활하며 ‘오늘 밤에는 무엇을 먹어야 할까.’라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던 농촌 생활의 모습이 겹쳐져 보일 때가 있다. 막상 도회지에 둥지를 튼 나는 마음 한편에 ‘귀향’이라는 마음을 접어 놓는다. 나의 오랜 꿈들 중 하나는 노년이 되어 한적한 곳에 숙소를 하나 내어, 숙소로 찾아오는 방문객을 정성스레 대접하고, 도란도란 늙어가는 것이다. 아니, 지금부터 ‘청년마을’이라며 귀향에 대한 제의가 들어올 때는 가끔 또 혹하는 순간이 있다. 피곤한 도시의 삶을 온전히 놓을 수 있을만한 장소는 과연 내가 자라왔던 농촌이 맞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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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체성은 도시와 촌락 그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가 보다.
도시에 가도 도저히 충족되지 않고, 농촌에 살더라도 채워지지 않는 모습을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