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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여태 살아오면서 어떤 단체의 간부가 되거나 직책을 맡은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 지금도 아무리 작은 단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내게 어떤 직책을 맡아달라고 한다면 당장 그 무게감이나 부담감부터 느껴진다. 그래서 어떤 단체이든지 무거운 직책을 맡고, 책임감 있게 그 일을 척척 해나가는 이들을 볼 때는 가슴 깊은 곳에서 존경심이 인다. 이따금씩 그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막상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김없이 나는 부담감부터 몰려온다.
이러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내가 한 자리를 맡게 되었을 때 즐겁게 단체를 이끌었던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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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이들이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를 이끈 경험은 학급의 장을 맡아 무리의 선두에 서는 것이지 않을까. 나 역시도 아주 운이 좋게도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급 부급장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때 교장 선생님이 바뀌면서 새로운 교내 정책을 전교에 발표하셨는데, 그 내용으로는 학급의 임원이 되려면 성적이 상위 25% 이상이거나 교내에서 수여하는 봉사 상장인 ‘신라인의 미소상’을 수상한 인원만이 학급의 임원을 맡을 수 있다고 하셨다. 내가 부급장으로 당선이 된 이후에 해당 정책을 발표하셨는데, 성적이 25% 안에 들지도 않고, 봉사 상장도 받아본 적 없는 나는 부급장의 자리를 교장 선생님의 한 마디에 상실하고 말았다. 난생처음으로 친구들의 신임을 얻어 ‘리더’가 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 작은 기회조차 내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 부임한 교장 선생님의 첫 과제였기에 담임 선생님께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으로 얻은 리더의 자리를 공부 잘하는 누군가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어린 마음에 꽤나 큰 상처를 받았었다. 선생님께서는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며 내가 신라인의 미소상을 받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셨지만, 나는 출마하지 않겠다며 선생님께 말씀드린 기억이 있다.
그러다 첫 리더의 경험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초등학교 6학년 때 찾아왔다. 그때는 급장이 되었었는데, 아무래도 조직을 이끌어본 경험이 적어서일까, 생각보다 친구들은 내 지시에 잘 따라주지 않았고, 학우들의 마음을 사는 방법도 잘 몰랐다. 게다가 유별난 성격으로 인해 선생님께 혼나는 일이 많았었는데, 교우들 앞에서 선생님께 혼이 나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리더십 없는 리더가 되어 한 학기를 학우들을 이끌지 못하고, 거의 그 안에서 휩쓸리듯 보냈다. 학기 말에는 한 친구가 “이럴 거면 급장을 왜 했냐”라며 내게 따져 물은 적도 있었다. 처음으로 남들 앞에 섰고, 그곳에서 차가운 비바람을 맞고 돌아서니 나는 다시 리더가 될 자신감을 모두 잃어버렸다. 무리를 이끄는 것에 실패하듯 끝나다 보니 또다시 감투 쓰기는 무엇보다도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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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웬만하면 남들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 내게 자리를 맡길 때는 언제나 그때의 기억이 스치며, 사실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래서 그런 기회가 내게 생길 때마다 고사하고 또 고사하면서 언제나 늘 리더보다는 팔로워를 자처했다.
그러다 또 우연히, 한 약속을 기획해 볼 일이 있었다. 스리랑카에 있을 때는 한인이 별로 없었고, 그중에 젊은 사람들은 더욱이 적었다. 하지만 나는 스리랑카라는 땅에 온 젊은이들을 다 알고 있었다. 당시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일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꽤 많은 이들이 내게 먼저 말을 걸어 주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이들은 경상북도청에서, 농촌진흥청을 통해 온 이들, 한국 국제협력단에서, 수출입 은행에서, 그리고 기아대책 등의 NGO에서, 각자 다른 이유로 우리는 같은 땅에 모여 있었다. 그러다 그 이들이 나를 중심으로 스리랑카에 파견된 한인 청년들을 한 번 모아달라고 모두가 입맞춰 요구했었고,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내가 젊은 한인들의 모임을 한 번 주도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단체원의 일정과 여유 시간을 파악하고, 만나기로 한 시간과 공간을 조율했으며, 한 명 한 명 우리의 약속을 조율하고 또 그 약속의 승낙을 받아내었다. 이 모임은 단순히 사적인 모임이었으나, 그래도 나는 무려 5개가 넘는 단체에 있는 이들을 만나 우리가 만날 날짜를 겨우내 조율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약속한 당일, 내가 만나면서 조율한 그 모두가 하나같이 핑계 같은 변명을 내게 이야기하며 약속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모임은 내가 주도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그들이 내게 요청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하나가 된 것처럼 약속 불참을 선언했고, 심지어는 나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의 입을 통해서 불참 소식을 전달한 분도 있었다. 솔직히 그날을 준비했던 나는 많이 실망했었고, 속도 상했다. 오랜만에 내가 총대를 메고 시간과 힘을 들여서 겨우내 자리를 만들었는데, 내 노력은 가볍게 넘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이 많이 쓰렸고, 사실 나에게 부탁을 했었던 그들의 얼굴을 보기도 꺼려졌다. 누군가는 나에게 진심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한 이도 있었지만, 모르쇠로 일관한 이도 있었다. 이 일을 겪으며, 다시 한번 더 이러한 모임을 나 스스로 추진하지 않으리,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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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야 말았다. 스리랑카 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복학하니 어느새 학교에서는 내가 나이가 가장 많은 선배가 되어 있었다. 복학하고 난 직후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학교 생활은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수업들을 모두 비대면으로 전환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중에 한 재계 그룹이 후원하는 인문학 강의가 우리 학교에 개설되었는데, 그 강의는 기본 기조가 대면 강의였다. 그 수업은 무슨 이유인지 꼭 대면 수업만을 강조했는데, 이외 모든 강의를 비대면으로 들었었지만 그 수업만큼은 꼭 대면하여 듣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학교로 향했다.
첫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더니 나와 같이 수업을 듣는 이들은 대개 대학 1~2학년의 신입생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MT(membership Training)이니 LP(Leadership Program)이니 하는 학생 활동에 잔뜩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전국에 도는 역병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며 그들과 조금 친해지고 난 이후에는 그들이 먼저 가장 연장자인 나에게 MT를 한 번 추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후배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사실, 다시는 내 손으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용기를 낸 것이다.
날짜와 참가자, 장소와 시간, 금액과 콘텐츠를 오롯이 혼자 준비했다. 그리고 참가자들에게도 환불이나 취소가 어려우니 신중하게 MT에 준비할 것을 일러두었다. 그렇게 숙소를 섭외하고, 숙소와 함께 교통편에 대해서 숙소와 소통하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진자가 늘어나자 갑자기 참가자들이 MT에 참여해도 되는 것 맞냐며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작 모든 것을 준비한 나에게는 일절 상의 없이, MT에 가지 말자면서 그들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어 버렸다. 나는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시간에도 숙소와 교통편에 대해서 조용히 조율하고 있었다.
사실, 그 일도 또다시 마음을 다쳤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후배들이 원했고, 나는 그저 총대를 메고 열심히 준비하던 것들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경험을 다시 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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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는 내가 주도적으로 자리를 만드는 일은 잘 없게 되었다. 리더가 되기에는 나는 여전히 마음이 질기지 못하고 여리기만 하다. 준비한 노력들이 물거품처럼 없어지는, 상처받은 경험을 더 이상은 반복하기가 싫은 마음이 나에겐 여전히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