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특별한 날들의 특별한 기억들

by 여행사 작가 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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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하게도, 기념일은 매년 틀림없이 찾아온다. 매년 기념일에 대한 추억이 하나하나 쌓일수록, 그 기념일을 다시 맞이할 때마다 지나간 기억과 추억이 자연스럽게 방울방울 돋아난다. 그 기억들을 마음껏 추억하는 것도 나름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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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매번 기념일이 다가올 때면 어느샌가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가령, 평소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도 막상 밸런타인데이에 애인이 초콜릿 상자를 건네지 않았다든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일정이 생겼다며 만나고 싶은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얕은 마음에서 잔잔한 서운함이 올라올 때도 있다.


이전에는 특별한 날들을 그리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에 간혹 소풍을 앞두고 너무 기대되어 잠을 잘 못 잤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을 때면 사실 나는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다음 날 무슨 일이 있건, 어딜 가든 간에 나는 침대에 머리만 붙이는 순간 아주 단잠에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가 조금 굵어진 후 학우들과 함께 수학여행으로 상경하여 하루를 보내는 전날 밤에는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있을까?’를 밤새도록 상상하며 난생처음으로 두근대는 마음에 밤잠을 설쳐버린 적도 있었다. 말로만 듣던 수도권의 대형 놀이공원인 ‘에버랜드’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 끊임없이 상상했고, 그곳에서 타게 될 온갖 놀이기구들은 또 내 속을 얼마나 뒤집어 놓을지 기대하느라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나 기대했던 그곳, ‘에버랜드’는 나의 환상을 가득 채우기 충분한 공간이었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온갖 놀이기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곳의 모든 이가 내게 살갑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폐장시간에 보았던 행진과 불꽃놀이는 어린 마음의 나를 완전히 동심에 푹 빠지게 만들어 주었다. 생애 처음 겪은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그 경험을 한 날부터는, 내게 특별한 날이 다가올 때마다 더욱 마음 깊이 기다려지는 듯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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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때 서로 점점 호감을 가지고 좋아하고 있던 여자 아이와 크리스마스를 맞았던 일이 있었다. 청소년 활동을 하며 알게 된 한 친구에게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알아가던 중,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어 그 친구와 함께 그날을 보내기로 한 적이 있다. 내심 그 아이와의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서로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크리스마스 당일, 암 투병을 하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는 급격히 병세가 안 좋아지셨고, 우리의 약속은 말 한마디 없이 공중으로 증발하고 말았다. 그날은 그녀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게 된 날이 되었고, 서로에게 특별함을 기대했던 그날은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잊히지 않을 날로 남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러할 용기도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어린 시절 같이 성당을 다니던 교우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외치던 기억, 여행을 떠난 아이슬란드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에서는 민박집주인이 파티를 함께 하자며 여행자에게 잔뜩 유럽 가정식을 챙겨주신 기억, 스리랑카에서 크리스마스 당일 하루 종일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고는 밤에 한 호텔 카페에 앉아 쓸쓸한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던 기억, 일본인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선 한참이나 불빛 장식 속을 걸어 다녔던 기억, 회사의 일로 상해로 출장을 가서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같이 맥주를 들이켰던 기억… 당장 일 년에 단 하루만 있는 그날에 얽힌 기억들이 매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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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특별한 날이라고 한다면 생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까지 약 30번의 생일을 거쳐왔지만, 또 유독 기억이 나는 생일날이 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기념이라며 생일 파티를 열어 주었는데, 파티에 누구를 초대할지 누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조물조물 초대장을 만들었던 기억과 내 생일이라며 친구들이 우리 집에 가득 모여 ‘생일 축하해!’라고 외쳐주는 것을 들었던 기억, 그 모습을 보고 배시시 웃으시던 어머니의 표정까지 그날 하루만큼은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을 거느리는 황제가 된 듯이 행복한 마음을 가졌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일본 유학을 할 때에는 별로 친해지지도 못한 친구들이 내 생일을 축하해 준다며 선물을 잔뜩 챙겨 주었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큰 사랑에 말하지 못할 감명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생일날 절연(絶緣)을 맞이하고서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뚝뚝 흘렸던 기억 역시도 마음속 한 구석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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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특별한 날을 축하하고, 또 축하받는 날이 다가온다면 나의 마음속에서는 지나간 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그리고 또 앞으로 그 특별한 날을 더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속의 다짐을 이어간다. 그러므로, 내게 매년 찾아오는 기념일은 점점 더 크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 어쩌면, 성인이 될수록 마음은 점점 더 소년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다. 올해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념일의 전야가 되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이불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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