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그날로부터 10년이라는 세월이 더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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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성인이 될 때까지 돈을 받아 쓸 줄만 알았지, 당연히 한 번도 내 손으로 돈을 벌어 볼 일은 없었다.
이후, 대학에 입학하고 ‘독립’을 천명했을 때는 부모님이 두 손 들고 반기며 이제부터 생활비는 직접 벌어보라며 말씀하셨다. 확실히 대학생이 되니 돈이 나갈 일이 많아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학업과 병행할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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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막 대학에 입학했던 2014년 신입생 때는 당시 최저시급이 5,210원이었다. 두 시간 노동하면 겨우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쥘 수 있었는데, 당시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이 4,100원이었으니 두 시간 노동 후 밥 한 끼를 먹고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면 내게 쥐어진 지폐는 이미 다른 이에게 넘어가고 없었다.
사실 그 최저시급의 일자리를 구하는 것 마저도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노동 문화라면 지금도 여전하겠지만, 막 성인이 된 20살 애송이에게는 감히 노동의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막 성인이 되어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또 곧 어디론가 떠나갈지 모른다는 이유로, 아직 의지가 약하다는 이유로 웬만한 사업장에서는 노동자로 받아 주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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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내가 구한 첫 일자리는 대학교 내 학생 식당이었다. 가장 붐비는 점심시간 때에 바짝 일손을 도우면 되었는데, 아침에 출근하여 식자재를 옮기고, 청소를 한 뒤, 담당 요리사님이 만들어 주신 음식을 손님들에게 차려드리고서 뒷정리까지 마무리하면 되었다. 업무 공간은 매일 달랐지만, 주로 내가 배치되었던 곳은 학생 식당 내 동남아시아 음식점이었다.
그 식당에선 당시에 나는 알지 못했던 온갖 요리들을 팔고 있었다. 나시고랭이니, 미고랭이니, 팟타이니 하는 음식들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나는 주방에서 만든 요리 위에 고명을 얹어 국물과 함께 고객님들에게 전달하면 되었다. 간혹 주문이 다량 들어오면 주방에다가 “팟타이 2인분이요!”라던가 “볶음밥 4인분 볶아주세요!”라고 외치면 되었다. 그러면 주방에서는 커다란 프라이팬에 음식을 가득 담아 내게 건네주었는데, 그것을 내 재량껏 나눠 담아 고명을 올리고 배분하면 되었다.
다 만들어 주는 음식에 그저 고명만 올려서 다시 건네어 주는 간단한 일이었는데,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나 힘들었었다. 첫 업무를 마치고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내 손으로 돈 벌어보니, 돈 소중한 것을 알겠다.”라며 이야기했고, 어머니는 배시시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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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이라는 그 작은 사회 안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또 그 안에서 나름의 내분과 파열음은 존재했다. 내 생애 처음 경험하는 파벌과 암투였다. 중식집에서 일손을 돕던 30대 후반의 누나들은 식당의 그릇을 정리하는 이모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매일 아침 핸드폰으로 오락을 한 시간씩이나 하시던 중식당 요리사님은 또 양식당 요리사님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는 처음 만난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라 구성원들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렸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색안경을 썼다가 벗기를 반복했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었지만, 당연히 나 역시도 뒤에서 말이 나오는 존재 중 하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토로 내용은 ‘본인의 일을 다른 이에게 떠 넘긴다’라는 것이 주제였다. 그 집단의 모든 이가 왜 본인에게 일을 더 많이 시키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매일 들리는 이야기가 ‘어제는 누가 이런 일을 시키더라’, ‘오늘은 누가 저런 일을 시키더라’라는 등의 이야기였고,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나도 누군가가 내게 일을 더 많이 시키는 것이 점점 부당하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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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신입생 때는 당연히 술자리가 많았다. 낮에 일을 하고, 수업을 듣고, 밤에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노라면 다음 날 오전에는 진이 쭉 빠져 가끔씩 일터에서 꾸벅꾸벅 졸곤 했다. 처음에는 ‘술이 그렇게 좋냐’라며 나한테 말을 걸던 요리사님이, 내가 너무 힘이 빠진 모습이 자주 보이자 따로 옥상으로 불러 크게 한 번 질책을 하신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바짝 정신 차린 척을 했다.
또, 하루는 중식당 요리사님이 별도의 동의 없이 내게 추가 근무를 명령하신 날이 있다. 나는 근무 이후에 약속이 있어서 처음에는 요청을 거절했지만, 끝까지 근무를 강요하시기에 결국 약속을 취소하고 식당에 남아 접시를 닦았던 적이 있다. 무척이나 어렸었던 나는 속상한 마음에 퇴근 시 따로 보고를 드리지 않고 귀가했었는데, 중식당 사장님은 근무를 마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짜장면을 하나 만들어 놓았었나 보다. 하지만 내가 그냥 집에 가는 바람에 그 음식은 누구의 입으로도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 쓰레기통에 버려져야 했다. 그날 이후로,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뺀질거리는 인상으로 남았을 수도 있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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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짧은 기간 동안 그 작은 공간에서 다양한 모습의 사회를 경험할 수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기간 동안 파벌 싸움에도 휘말려 보았고, 관리자와의 갈등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돈을 벌어본 공간에서 만 100일을 넘기지 못하고 권고사직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렇게도 좋아서 약 60만 원의 월급을 받노라면 곧잘 모두 지인들과의 유흥비로 탕진해 버렸다. 100일도 안 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정승처럼 벌어서 개처럼 돈을 써 보았던 경험, 그리고 돈과 노동의 소중함을 알게 된 소중한 시간으로 내게는 남아 있다. 확실히 내 손으로 돈을 벌어 본 이후에는 확실히 ‘경제관념’이라는 것이 내게 생기기도 했다. 하다못해 물건을 사기 전에 ‘이 물건을 사려면, 몇 시간의 노동을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갈 때가 많다. 그래서 한 물건을 살 때도 충분히 고민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돈을 벌었던 날부터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돈벌이는 힘들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지날수록 돈 벌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지는 않을까 생각이 든다.
매월 시간을 팔아 따박따박 월급을 받는 날이 오면, 문득 20살 그 시절 긴장되는 가슴을 안고 처음 일터로 나서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