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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나의 첫 여자 친구, 그리고 나의 첫 이별

- 무엇이든 처음은 어렵다. 어렸을 적에도 그러했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by 여행사 작가 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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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느끼는 내 감정과 마주하는 것은 늘 새롭고도 힘들다. 나도 잘 모르는 내 감정들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것인지 나 조차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생소한 느낌의 내면의 감정을 조우하노라면 이 감정을 과연 숨겨야 하는 것이 좋을지, 혹은 드러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그 감정을 너무 드러내다가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또 꽁꽁 숨겨 놓다가 속이 다 타들어 갔던 적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느끼는 감정 앞에서는 늘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숨겨낼 것인가 혹은 드러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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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느낀 감정을 가장 극적으로 만나게 해주는 것이 나의 작은 애정, 멀리 보아 사랑이 아닐까. 물론 내 사랑 역시도 나를 하늘 높은 곳을 인도하면서 한 편으로 심연의 구렁텅이로 처넣어 버리기도 한다.
어린 시절 나를 사랑 비슷한 감정을 처음 느끼게 된 그런 나날들이 있었다.

나는 남자치고 꽤나 빠른 시기에 성애(性愛)에 눈을 떴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애인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가족에게서 받는 애정이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색다른 얼굴의 애정은 과연 어떤 것일지 참 궁금하기만 했다. 하지만 사랑을 찾아 나설 용기는 없었기에 그저 누군가가 갑작스레 내게 다가와 무한한 애정을 쏟아주기를 맹목적으로 바라기만 했다.
빨리 성애에 눈을 떴다는 것이 사실 무척 부끄럽게만 느껴졌었다. 나의 야릇한 생각이 혹여 친구들한테 들켜 버릴까 봐 무척이나 두려웠고, 또 같은 학급에 좋아하는 여자 아이에게 다가갈 용기도 더더욱 없었다. 나의 이 발칙한 욕망은 가슴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놓았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 중학생 정도가 되니 또래 친구들도 조금씩 성애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쓸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자기의 첫 여자친구에 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안에 느껴진 모종의 결핍과 질투심이 일어 오르는 듯했다. 나도 친구들처럼 나의 숨겨진 욕망을 이루어보고 싶긴 했지만 누군가에게 다가갈 용기는 죽어도 없었기에 늘 호기심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인생 첫 여자 친구는 정말 바람과도 같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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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절친했던 친구 A가 자기와 함께 공부하고 있다는 J양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 모르는 수학 문제를 같이 풀어본다는 핑계를 대면서 J양과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한 듯하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J양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J양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다녔나 보다. 어느 날 J양이 자기 친구 N양에게 내 이야기를 했었는지 별안간 N양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나 보다. 그래서 얼굴도 본 적 없는 N양이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살갑게 내게 연락을 물어오기 시작했고 나에 대해 이것저것을 캐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마 친구인 J양을 대신하여 J양이 궁금한 것들을 내게 물어봐 주는 듯 느껴졌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N양과 속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된 적이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우리는 무엇에 그리 확신이 있었는지 서로의 깊은 생각까지 꺼내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작게는 성적 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깊게는 가정 문제, 관계 문제 등에 대해서 속속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10대를 한참 지나고 있던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고 치열한 문제들이었다. 서로 어떤 가정환경에서 지내고 있는지, 부모님 혹은 친구와의 관계에서 가장 고민되는 지점이 무엇인지, 추후에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등 우리는 나름 열기 넘치는 대화를 자주 나누곤 했다. 나 역시도 또래의 이성 친구가 어떤 생각과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게 되어 좋았고, 그녀 역시도 나와의 대화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그러한 대화를 나눈 이후로 곧잘 속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어느샌가부터 얼굴도 잘 모르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도 나처럼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며 은근 본인의 마음을 내게 내비치더니 이내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이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채로 마음이 커져버렸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절을 할 줄 몰랐다. 당시에도 얼굴조차 모르는 이와 이렇게 얼렁뚱땅 관계를 시작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구심은 가득했지만, 나는 거절할 줄 몰랐기에 그 요청을 수락했다. 그렇게 그녀는 내가 ‘여자 친구’라고 불렀던 첫 번째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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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하고서 처음으로 대면했다. 내가 상상했던 이미자와는 꽤나 다른 인상이었지만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막연히 꿈꿔왔던 욕망이 현실로 실현되는 순간이었고, 그때의 내 속에는 환희가 넘쳐흐르는 듯했다.

이 넘치는 마음을 얼마나 상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지 결코 알 수 없었다. 그녀와 함께 산책이라도 할 때면 온몸이 울렁거리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아버지가 주신 용돈으로 그녀와 군것질거리를 사 먹을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바랄 게 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나는 그녀 역시도 꼭 내 마음과 같기를 바랐다. 혼자 시작한 사랑은 이렇게나 나 혼자서 서서히 키워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적어도 그땐 그녀가 당시 중간고사 성적이라도 잘 받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그녀가 온전히 학교 중간고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중간고사 준비 기간 동안 연락을 끊자고 제안했다. 그녀의 학업에 결코 방해가 되기 싫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위한다는 대의 아래 일방적으로 그녀에 대한 모든 연락을 끊어 내었다. 상대는 이런 내 모습에 당연히 서운했을 것이다. 시험이 끝나고 이내 연락을 다시 주고받게 되었을 때 그녀의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쌀쌀맞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내게 이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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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그녀가 좋았었고, 내 모든 마음은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녀를 향한 일방적인 나의 배려심은 오히려 비수가 되어 나에게로 다시 날아왔다. 나는 당장 그녀를 집 앞 놀이터로 불러 내었고, 그녀를 마주했을 때 넘쳐 오르는 설움을 주체 못 하고 그녀 앞에서 펑펑 울기만 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라며 무작정 그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말을 잠잠히 듣더니,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며 자리를 떴다. 나는 대화를 나누었던 미끄럼틀 위에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고, 그저 한참 동안 씩씩대며 울고만 있었다.

인생에서 첫 헤어짐을 겪고 난 뒤 나는 한동안 이불 밖을 헤어 나오지 못했었다.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 그러했다.
그녀는 곧이어 내 친구 중 한 명과 교제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어깨너머로 듣게 되었고, 한참이나 혼이 나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서투르기만 했던 나의 첫 이별은 이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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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얼마동안 만났겠냐마는, 나는 당시 그 안에서 내 안의 수많은 감정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 별안간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게 될 때면 문득 15살의 내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마음속에서 사랑이 피어 오름을 느낄 때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책갈피처럼 표시한 곳을 다시 조심스레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사실 그때의 사랑이나 지금의 사랑이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을 것 같다. 나의 첫 여자 친구와의 첫 헤어짐은 이렇게나 어설펐고, 사실 지금까지도 별 다른 것 없이 사랑에 어설프기만 하다.

내 사랑과 내 마음은 여전히 15살의 소년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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