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orean Dream은 실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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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사람들과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의 꿈을 들을 때면 그의 마음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고, 희망찬 미래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렴풋이 그 의지와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군가의 꿈을 듣던지 항상 멋있고, 그 꿈을 응원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어떤 꿈이던지, 그것을 향해 열정을 불사르는 모습은 멋있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나 역시도 내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때면 특히나 눈에 더욱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또렷해진다. 평생을 살면서 현재에 만족했던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다가오는 미래를 이야기해야 하는 날에는 늘 힘이 샘솟았다. 타인의 꿈을 듣는 것도 좋았지만 내 꿈을 이야기하는 것도 물론 좋았다. 때와 상황에 따라 달랐었겠지만, 누군가가 나의 꿈을 물으면 십중팔구 ‘작가가 되고 싶다.’라며 이야기했다.
나는 늘 미래의 작가를 꿈꾼다며 이야기했고, 그런 식으로 나를 소개하면서 다양한 꿈들을 만났다. 작게는 지방 공무원, 농부부터 시작해 크게는 국회의원, 성공한 사업가 등 크기부터 깊이까지 모든 것이 다른 다채로운 꿈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꿈을 듣게 되었든 간에 나는 그가 미래에 그 꿈을 이루는 상상을 하며 나의 축복도 늘 불어넣어 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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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수많은 꿈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결코 잊히지 않는 단 한 개의 꿈 이야기가 있다.
스리랑카 사무실로 처음 출근한 날의 이야기이다. 내가 오기 전부터 일하고 있던 직원들과 첫날 인사를 나누며 잠시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다. 사무실에는 나이가 지긋한 농촌 자문위원 한 분, 트럭 운전기사 한 분, 한국에서 약 10년간 거주했다는 외국인 노동자 출신 통역원 한 명, 그리고 사무실의 회계를 맡고 있는 여직원 한 명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차투리카’. 그녀는 출퇴근에 무려 3시간 이상이 걸렸지만, 회계 일을 배울 수 있고, 한국인과 일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기꺼이 그 먼 거리를 매일 오갔다.
그녀는 나를 만난 첫날 본인의 꿈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녀가 우리 사무실에서 꾸고 있던 원대한 꿈은 바로 ‘한국 공장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그 꿈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는 3D 직종이라며 모두가 기피하는 그곳을 그녀는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한국 공장에서 돈을 벌어와서 집안의 기둥을 다시 세우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코리안 드림(Korean dream)이 당차게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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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에 처음 갔을 때 정말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젊은 청년들이 정부를 상대로 엄청나게 시위를 많이 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명분은 다름 아닌 ‘양질의 일자리’였다. 스리랑카는 대학의 개수 자체가 적기 때문에 대학을 입학하기도, 졸업하기도 엄청나게 힘들다. 대입 성적이 상위 1~2% 안에 들어야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했다. 결국 사회의 엘리트라며 대학을 당차게 졸업하게 된다고 한들, 그들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 주 이유였다. 스리랑카는 정경유착이 심한 사회이기 때문에, 조국의 대기업 일자리와 정부 주요 요직에는 순수 실력이 아닌 정치인에게 줄을 잘 서는 사람들이 모두 차지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청년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매일같이 청년들이 거리에서 오물을 뒤집어쓰며 투쟁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국내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어쩔 수 없이 국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렇게나 스리랑카는 일자리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기에는 무척이나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차투리카는 집안의 기둥이 되겠다는 본인의 꿈과 열정을 불사르기 위해 매일 그 먼 거리를 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자리이기에 그녀는 우리 사무실에서 정말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했었고, 또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려 갖은 애를 썼다. 그녀는 마을 조합의 회계 업무를 전담할 뿐만 아니라 틈틈이 시간을 내어 마을 아이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미래에 공장에서 유용하게 쓰겠다며 종종 내게 Excel을 다루는 방법을 물어보곤 했다. 질문을 한 뒤에는 감사하다며 사례비로 한국 돈 7,000원 가량을 내민 적도 있었다. 당연히 나는 그 돈을 돌려주었는데, 그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나조차도 너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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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많은 힘을 써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 시장에서,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 여자아이가 설 자리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한국 이야기만 하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는 그녀의 눈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되,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가슴 아프지만, 나 역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살아가며 정말 많은 꿈들을 들어왔지만 내 시선에 가장 안타깝게 느껴지는 꿈이었으며, 그것마저 쉬이 이룰 수 없는 이 현실이 참 황망하게만 느껴졌다.
이름을 알린 작가가 되고 싶다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어눌한 한국어 발음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고, 공장에서 사용할 Excel의 기능을 익히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가슴속 그녀의 꿈의 온도가 툭하고 꺼져버릴지 몰라도, 그녀가 촉발한 그 마음은 현재의 나에게도 여전히 강한 울림을 주고 있다.
모두가 꺼려하는 공장으로 취직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해이해진 나를 언제나 다잡아주는 채찍질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