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그렇게나, 기다려졌던 운동회

by 여행사 작가 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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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엔 나도 동네에선 나름 날쌘돌이로 유명했다. 운동 신경이 특별히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지만, 달리기만큼은 자신 있었다. 동네에서 내 달리기를 따라갈 이는 없었다. 특별한 달리기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손발을 정신없이 움직이며 후닥닥 달리다 보면 어느새 다른 아이들은 저 뒤에 처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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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이어 달리기 선수는 꼭 내 차지였다. 운동회에서 이어 달리기는 배점이 가장 높았기에 우리 군이 이기려면 내 활약이 중요했다. 그만큼 운동회가 다가오면 학급 친구들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나는 늘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서는 이어 달리기를 할 때 한 구석에서 학생 풍물패가 사물놀이를 연주했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한창 굿거리장단을 연주하다가 두 팀이 경합 상태에 들거나, 한 주자가 다른 이를 역전하여 앞질러가기 시작할 때면 휘모리장단으로 신명나게 박자를 바꾸어 쳤다. 우리 군의 패색이 짙어질 때에는 전교생의 시선이 내 두 다리에 몰렸다. 그러면 이내 휘모리장단과 함께 내 발걸음에 맞춰 전교생의 환호와 탄식이 뒤섞였다. 이어 달리기에서 이기고서 학급에 들어갈 때면 마치 개선장군이 된 듯 위풍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실제로 그날만큼은 모두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면서 “오늘 잘했다.”라는 등 말을 건네주었고, 학부모님들께서는 내 식판에 급식을 잔뜩 담아 주시기도 했다. 나는 나보다 달리기가 조금 느렸다는 이유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동갑내기 경쟁 주자를 뒤로한 채 승리의 기쁨을 즐기기에만 바빴다.

일 년의 딱 하루, 그날만은 나의 세상이었고 예정된 행복이었다. 운동회 날에는 개인 달리기의 순서대로 학교에서 준비한 상품을 나누어 주었는데 매 해 나의 손등 위에는 커다란 보라색 글씨로 ‘1등’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달리기 성적에 따라 상품으로 공책을 차등해서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개인 달리기 상품과, 이어 달리기 상품 그리고 우리 군이 최종 점수에서 이기기라도 하면 공책을 한 두 권 더 얹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매년 운동회 날이면 공책을 두 손 가득 한아름 안고서 정말 기쁜 마음으로 귀가했던 기억이 난다.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공책이었음에도 방구석에 가득 쌓여진 상품들은 나에게 마치 훈장처럼 쌓여 나를 웃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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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침에 등교할 때면 늘 먼저 학교에 와서 체육복을 입은 채 운동장을 뛰고 있던 선배들이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들이 벌을 받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의 벌칙은 끝이 없는 듯 보였고, 같은 학교에 다녔던 친누나에게 그들의 존재를 물어보았다. 누나는 그들이 ‘육상부’라고 했다. 공부를 곧 잘했던 누나는 그 육상부라는 것에 들어가게 되면 공부할 시간이 줄어든다며, 나에겐 육상부에 들지 말 것을 일러 주었다.
하지만 어느 날 오전 등교 중에 체육 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시더니, 아침에 일찍 등교해 달리기 연습을 하자고 하셨다. 누나가 말렸던 육상부 가입 제의를 그렇게 갑작스레, 그리고 넌지시 제안하신 것이었다. 어른의 말에 거절하지 못했던 나는 한마디 반구도 없이 그렇게 육상부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가족에 알리니 단연 우리 누나는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벌칙을 받는 줄로 알았던 광경을 향해 제 발로 찾아가게 되었다. 육상부 훈련은 단순했다. 다른 학생들보다 30분 먼저 등교하여 끊임없이 운동장을 달리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인생 처음으로 ‘인생의 벽’이라는 존재를 몸소 느끼게 되었다.
무언가를 위해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난생 처음이었다. 사실 이전까지는 별다른 준비 없이 그저 타고난 대로 앞만 보고 달렸을 뿐이고, 아무런 노력 없이 달콤한 결과만을 쟁취했었다. 어떤 성과를 위해 오랫동안 시간과 힘을 투자한 경험 자체가 없었고, 또 오랜 시간 무언가를 준비한 이들의 저력을 그곳에서 처음 느끼기도 했었다. 그때까지 내 또래 친구들은 나보다 빠른 이는 없었지만, 적어도 일 년 이상 꾸준히 달렸던 선배들은 ‘과연 따라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빨랐다. 나는 그들을 보며 ‘꾸준한 연습과 노력으로 저들을 이겨야겠다.’라기보다, ‘당연히 나는 저들보다 느릴 거야.’라는 패배주의적 생각이 어린 내게 본능적으로 타고 들어왔었다.

육상부에게는 ‘스파이크화’라며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특수 신발을 주었다. 하지만 왜인지 나에게는 스파이크화를 주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가 사주신 운동화를 신고 매일을 달렸고, 곧이어 전국 체전에 출전하게 되었다. 지역 예선에서 단거리 달리기 선수로 나셨는데, 스파이크화가 아닌 일반 운동화를 신은 선수는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결과는 총 8명의 선수들 중 7등. 첫 대회는 다소 저조한 성적으로 끝났다.
그래도 대회가 끝나고 격려의 의미로 체육 선생님께서 삼겹살을 사주셨는데, 어디선가 올라오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보다 더 빠른 또래 친구는 없을 줄로 알았는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존재를 생애 처음으로 온몸에 직격 해서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예의와 겸손, 겸양을 강제로 주입받을 수밖에 없었던 커다란 충격이었다.
승부욕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나는 오기가 생겨 다른 이를 능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목표도 꿈도 없었던 그 활동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전국 체전을 끝으로 육상부 훈련에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 꾸준히 훈련에 매진한 아이들은 점점 빨라졌고, 중학생 무렵이 되었을 때에는 나만큼 뛰는 친구들이 흔해졌다.

그래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그날의 운동회는 여전히 생생히 기억한다. 비록 맞벌이하시던 부모님은 내 경주를 자주 보시지 못했지만, 환호 속에서 뛰던 내 모습을 어머니는 따뜻하게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그 어린 날 마냥 행복했었던 그날의 기억은 나를 여전히 미소 짓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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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내가 그때 승부욕이 생겨서 당시 끝까지 달리기 훈련에 매진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지금도 늘 끈기가 부족한 나 자신에게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어릴 적 싫고 귀찮아도, 혹은 두려워도 무언가에 꾸준히 몰두했더라면 삶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강한 체력과 성실함이 무기라는 것을 지금은 잘 알면서도 사실 행동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달리기 꿈나무가 성인이 된 이후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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