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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경 Apr 08. 2024

보들레르의 검은 비너스

책 속의 여자 2


네가 천국에서 오건 지옥에서 오건 어떻단 말인가

오 미녀여! 거대하고, 무섭고, 순진스런 괴물 안에 눈, 미소, 발이 

내가 좋아하고 일찍이 알지 못할 

무한의 문을 열어준다면야 어떻단 말인가?     

악령에게서건 신에서건 어떻단 말이냐?

천사건 인어건 - 부드러운 눈의 요정아,

리듬, 향기, 빛, 오, 내 유일한 여왕이여!

네가 세계를 덜 징글맞게, 시간을 덜 무겁게 해 준다면?     

-----악의 꽃 중 미녀에의 찬가     


 대개 팜므파탈이라고 하면 삼손과 데릴라에서의 데릴라나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한 손에 가지고 놀았던 클레오파트라처럼 완벽한 미모의 여성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보들레르의 일생의 사랑, 그야말로 그의 입장에서는 팜므파탈 그 자체인 잔느 뒤발은 사실 그렇게 아름다운 용모가 아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누렇고 윤기 없는 안색에 입술은 붉고 곱슬머리의 끝까지 물결치는 풍성한 머리      

그다지 검지 않고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흑색혼혈녀, 그다지 곱슬거리지 않은 검은 머리, 가슴은 꽤 평평하고 꽤 큰 키에 걸음을 잘 걷지 못했다  

    

 잔느 뒤발에 대한 보들레르의 친구들의 평이다. 그나마 친구의 여인에 대해서는 항상 후한 점수를 줬던 방빌이라는 친구만이 아래와 같이 약간 후한 점수를 줬을 뿐이다.       

매우 키가 큰 유색의 아가씨로 천진스럽고 희한한 갈색의 얼굴이 몸집에 잘 어울렸으며 그 위에 얹힌 머리는 맹렬하게 곱슬머리였고, 야성의 미로 가득 찬 그녀의 여왕 같은 거동, 어쩐지 고상하고도 동시에 동물적인 데가 있었다.   

   

 샤를 보들레르는 <악의 꽃>으로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랭보, 말라르메로 이어지는 ‘상징주의’라는 문예사조의 문을 연 위대한 시인이다. 비록 생전에는 역시 수많은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무명과 가난에 시달렸지만 사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보들레르 하면 누군지는 자세히 모르나 그 이름만은 어디서 들어본 적 있다고는 할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그의 시는 정말 인상적이고 위대하지만, 사실 그의 사랑은 ‘어리석고 가혹하다’는 말이 어울릴만한 그런 사랑이었다.      


 보들레르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재혼 등으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지 모성에 대한 갈망이 큰 사람이었다.  사실 보들레르에게도 여러 여인들이 있었지만 그가 평생을 사랑하며 가족처럼 돌본 사람은 잔느 뒤발뿐이었다.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일컬어지던 사바티에 부인에게 구애의 편지를 계속 보내다가 부인이 감동하여 사랑에 응하자 그 시점에서 절교해 버린 보들레르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사실 깊이 들여다보자면 실제로 만나면서 교제할 자신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 한 여배우를 마음에 두기도 했으나 연인관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보들레르가 평생을 지속한 사랑은 오로지 그에게 요구만 해대는 잔느 뒤발뿐이었다. 보들레르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검은 비너스’라고 애칭까지 지어준 뒤발에 대한 사랑만이 헌신적이었고 전폭적이었으며 끝까지 지속되는 것이었다.    

  

 의붓아버지 밑에서 문제아로 자라나다가 성인이 된 보들레르는 극단에서 단역을 맡고 있는 잔느 뒤발이라는 여인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 여성으로, 알고 보니 3대째 이어지는 밤거리 여인이었다. 보들레르는 육감적인 이 여인에게 완전히 반해 구애를 하지만 뒤발은 역시 선수답게 사랑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한 것은 보들레르의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기 때문이다. 교묘한 방법으로 보들레르의 구애를 거절하면서 보들레르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주로 집안 얘기를 하면서 누가 아프다 누가 학교도 못 가고 있다 하는 식으로  눈물로 호소하는 식이었다. 뒤발의 말은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사랑에 빠져 버린 보들레르는 확인도 해보지 않고 큰돈을 건네곤 했다.  

   

 이런 까닭에  보들레르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10만 프랑 가운데 4만 4,500프랑을 2년 사이에 탕진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보들레르 자신이 사치하면서 흥청망청 쓴 탓도  있었지만 뒤발에게도 상당액을 갖다 바친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보들레르는 의붓아버지와 엄마에 의해 금치산자 선고를 받게 되었다. 

금치산자가 된 보들레르는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녀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못했고, 그녀를 돌보고 돈을 보내는 일도 또한 멈추지 못했다. 


 잔느 뒤발은 보들레르를 만난 후로는 동거와 별거를 되풀이하면서 몇 차례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고, 심지어는 그가 브뤼셀에서 졸도하여 사경에 이르렀을 때도 돈을 요구하는 편지를 잇달아 보낼 정도로 철면피였다. 

심지어 그녀는 동생인지 내연남인지를 집에 끌어들여서 생활비를 요구하기도 했고, 보들레르가 잔느의 품행을 의심했고 괴로워했으며 심지어 그 현장을 목도했다는 실토까지 들었다는 친한 친구의 증언도 남아있다.      

 오죽하면 보들레르의 어머니가 그녀에 대해서 ‘모든 방법으로 고문하는’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을까.      

그러나 보들레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미루어 집작이 간다.      


이 여인은 나의 유일한 위안이며 쾌락이고 친구입니다. 갖가지 파란을 겪으면서도 이별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물건이나 경치를 보면 그 여인을 연상하게 되어 제 스스로 놀라는 것입니다. 나는 왜 그녀와 함께 이 물건을 사지 못하고 저 경치를 그녀와 함께 보지 못하는가 한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1845년 6월 30일 친밀한 친구에게 자살의 결심을 밝히고 유언한 편지 중에      

그녀에게 나의 이 가공한 본보기를 보여주고 정신과 생활의 무질서가 어떻게 어두운 절망과 완전한 파멸로 이끌어 가는지를 보여주시오     

라고 썼을 정도였다. 


 1845년 유언에서 그녀를 자기 상속자로 지정하고, 1858년 이젠 ‘가엾은 불구자’가 된 그녀와 다시 동거를 하다가 1859년에 뒤발은 중풍에 걸리고 말았다. 

이처럼 30대 말에 중풍이 올 만큼 방탕한 생활을 하는 뒤발을 보들레르는 광적으로 사랑하며 구애의 시를 연이어 바친다. 40대에 들어 뒤발이 입원하게 되자 보들레르는 입원비를 대고 그녀를 돌볼 간병인까지 구해준다.


 그녀의 행실과 노쇠함, 불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가 끝내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질투까지 느끼게 한 유일한 정부이며, 죽는 날까지 돌보고 근심한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보들레르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제게는 한 가족이 필요해요


 뒤발은 보들레르로부터 어떻게 해서든 돈을 빼낼 궁리만 했기 때문에 보들레르는 예술가로서 마음의 안정을 누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뒤발이 보들레르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자, 그녀가 중풍으로 고생하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요양원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한동안 파리에 떠돌게 된다. 그리고 소문을 들은 바로 그 시점에서 보들레르의 시인으로서의 생명도 끝나버리고 만다. 


 사랑하고 증오할 대상을 잃어버린 시인은 산책길에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고 실어증까지 와서 병원에서 1년여를 고생하다 사망한다. 그때 보들레르의 나이, 겨우 마흔여섯 살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남이 보기엔 알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돈으로밖에 보지 않는 뒤발에 대한 보들레르의 사랑은 일견 어리석어 보이지만, 천재를 지닌 시인에게 일생동안 사랑과 증오의 대상이 되어 줌으로써 고통 속에 그 천재를 피를 쏟듯 쏟아내서 <악의 꽃>이라는 걸출한 유산을 인류에게 남겨준 것만은 사실이다.       

 사실 ‘네가 세계를 덜 징글맞게, 시간을 덜 무겁게 해 준다면?’ 보들레르의 말대로 그가 ‘천국에서 오건 지옥에서 오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잠들고 싶네! 사느니 차라리 잠들고 싶네! 

죽음처럼 아늑한 수면 속에서 

여한 없이 멈춤 없이 입 맞추리라

구리처럼 매끄럽고 아름다운 그대의 몸에     

삭아버린 나의 눈물 삼키려 하니, 

그대의 침대만 한 곳이 없구나 

그대 입 속에 강력한 망각이 살고, 

그대 입맞춤엔 망각의 강이 흐르니,     

이제야 환희에 찬 내 운명을 

나는 숙명처럼 받아들이리,  

 .

보들레르 <망각의 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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