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여자 / 버지니아 울프
"만약 셰익스피어에게 그만큼 재능이 있었던 누이가 있었더라면 무슨 일이 발생했을까?"
이 유명한 질문은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질문이다. 울프의 그 흥미로운 질문을 한번 따라가 보자. 셰익스피어에게 주디스라는 이름의 누이가 있었다고 가정해 본다. 주디스는 창의력이 번득이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빠와 마찬가지로 우주 전체를 생생한 인물들로 창조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디스는 학교에 가지 못한다. 윌리엄이 라틴어로 된 고전을 읽는 동안, 집에서는 주디스에게 구멍 난 양말을 손에 쥐어주며 "이것을 꿰매거라. 수프가 너무 끓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리고 제발 이런 쓸데없는 책 쓰레기들은 치워버려!"라고 말할 것이다.
열여섯 살의 그녀는 이웃에 사는 양모 상인에게 시집가길 강요받는다. 주디스가 그와 결혼하려 하지 않자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는다. 그날 밤에 그녀는 짐을 싸서 집을 도망쳐 나온다. 그리곤 런던으로 간다. 그곳에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녀를 비웃는다. "여자가 무대에 선다고? 그러면 우리들은 대체 어디로 가라는 거야!" 하며 극장의 배우와 관계자들은 욕을 한다. 사실 그들의 말이 옳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모든 배역을 남자들과 소년들이 연기했고, 여자 역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하나가 그녀를 겁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디스는 임신을 한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사람들은 그녀를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매장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유럽 문화에서 비범한 재능을 가진 여성에게 부여되었던 인생행로였을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러한 질문 이후, '셰익스피어의 누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겨났다. 유럽 문화권에서 ‘셰익스피어의 누이’라는 말은 바로 ‘실제로 등장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여자 천재’를 의미한다.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
버지니아 울프가 어떤 작가였는지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등등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버지니아 울프’라는 그 이름만큼은 익숙하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박인환의 그 유명한 시 <목마와 숙녀> 일 것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소녀의 옷자락을 생각한다”는 서두에서부터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중간 부분에 이르기까지.....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그 시속에서 어떤 모던함의 상징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서러움’과 동일시되는 뭔지 모르게 슬픈 그런 인물이 된다.
피천득의 유명한 수필 <인연>에서도 또한 저자가 유학 시절에 만난 아사코라는 일본인 소녀와 재회했을 때,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고 회고한 대목이 나온다. 뿐만 아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이름의 영화도 있다. 이 영화는 에드워드 올비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비록 버지니아 울프와는 관련이 없는 제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제목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저자인 올비가 원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아기 돼지 삼형제>에 나오는 ‘크고 못된 늑대가 와도 안 무섭거든? (Who's Afraid of Big Bad Wolf?)’이라는 노래를 작품 속에 사용하면서 아예 제목도 그렇게 지으려고 했는데, 디즈니 측의 반대에 부딪치자 ‘빅 배드 울프(크고 못된 늑대)’를 발음이 비슷한 ‘버지니아 울프’로 바꿔 버린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처럼 어떤 작가인지는 구체적으로 잘 몰라도, 그 독특한 이름만큼은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작가가 바로 버지니아 울프다. 사실 그녀는 대중들이 읽기에 비교적 난해한 그녀의 작품들보다는 충격적으로 마감한 그녀의 실제 삶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작가다. 그리고 자신의 드라마틱한 삶 속에 두 가지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의붓오빠들에게 당한 성추행
1941년 3월 28일, 오전 11시경, 남편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었고, 하녀는 한창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맨 끝에 V. 라고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적어 넣고는, 친언니에게 보내는 또 다른 편지와 함께 거실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모피 코트 차림에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선 그녀는 강둑에서 큼직한 돌멩이를 주워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로부터 20일 뒤인 4월 18일, 자전거 여행 중이던 다섯 명의 10대 소년 소녀가 우즈 강에 서 떠내려가는 사람 시체를 발견했다. 바로 20세기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모더니스트이자 선구적 페미니스트로 평가되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 그녀였다.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던 레너드. 그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마지막 남긴 유서에서 가까스로 털어놓은 비밀은 바로 어린 시절에 당한 성적 학대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저명한 학자이자 비평가였던 레슬리 스티븐과 아름답고 활동적인 어머니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재혼으로, 레슬리에게는 정신박약인 딸이, 줄리아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다. 결혼 후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2남 2녀가 태어났는데, 버지니아는 그중 셋째였다. 열한 명의 식구와 일곱 명의 하인들이 북적이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난 그녀에게 문제는 의붓오빠인 제럴드와 조지였다.
여섯 살 때, 큰 오빠인 제럴드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그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또 작은 오빠인 조지로부터 ‘갖은 못된 짓을 당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고 털어놓은 그녀는 당시의 상태를 ‘마치 야수와 함께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과도 같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가지게 되었고, 성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배격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서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묻고 있다. 남자아이들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가서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여자아이들은 집에서 부모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아버지의 손님들인 당대 일류 문사들의 대화에서 지적인 자극을 받아 일찍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할 수가 있었다.
또 독서를 통해서 그 지독한 짐승의 시간들을 견뎌나갈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당했던 성적 학대 때문에 그녀는 평생 동안 정상적인 성생활을 혐오하고, 심각한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가 하면 여러 번에 걸쳐 자살 시도를 하는 등...... 여러 가지 정신적인 문제들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까다롭기 짝이 없는 두 가지 결혼 조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버지니아의 언니 바네사는 버지니아를 데리고 의붓오빠들을 떠나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많이 살던 동네인 블룸즈버리로 이사를 해버린다. 이곳에서 울프의 언니 바네사와 오빠 토비를 비롯해 E.M. 포스터, 로저 프라이, 클라이브 벨 등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 참여한 그 유명한 ‘블룸즈버리 그룹’이 만들어지게 된다. 경제학자 존 케인즈와 <황무지>의 시인 T. S. 엘리어트도 참여하게 된 이 블룸즈버리 그룹은 화단과 문단 등에서 형식주의를 타파한 개성 있는 모더니스트들이 모인 그룹으로,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20세기의 새로운 문화의 개척자가 되었다.
버지니아는 이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활발한 지적 교류를 하면서 작가가 되기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이렇게 탄식하게 된다.
“스물아홉 살이 되고 결혼하지 않았다니, 실패야. 아이도 없고, 미치기도 했고, 작가도 아니잖아"
오빠 토비가 그리스 여행에서 걸린 장티푸스로 죽고, 언니가 서둘러 클라이브 벨과 결혼해 버리자 그녀는 혼자 남은 듯한 외로움에 더욱 시달리게 된다.
바로 이즈음, 오빠 토비의 케임브리지 친구들 중 하나인 레오나드 울프가 버지니아에게 청혼한다. 그러자 그녀는 그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이라고 해도 까다롭기 짝이 없는 결혼 조건을 내걸게 된다. 그녀의 결혼 조건은 두 가지였는데, 첫째, 평생 부부생활을 않겠다는 것과 둘째, 남편이 현재 공무원인 직업을 버리고 글을 쓰는 자신을 지원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결혼 조건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던 레오나드는 그 조건들을 모두 수락하고 1912년 버지니아와 결혼한다.
울프의 전기 작가, 퀜틴 벨(언니 바넷사의 아들)은 이모가 레너드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 그녀 인생에서 내린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버지니아는 그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으면서부터 창작에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이 결혼으로 남편과 간호부를 함께 얻은 셈이 되었다.
그는 버지니아의 생리 주기와 몸무게를 일일이 기록했고, 교제와 집필 활동까지 적절히 통제했다. 그가 전적으로 아내의 간호를 맡은 후 25년간, 이전과 같은 극심한 신경증의 발작은 나타나지 않았고, 버지니아는 일생에서 가장 안정된 환경과 건강 속에서 집필에 몰두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들의 결혼은 아내가 '아내 노릇'을 하지 않고 남편도 아내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관계라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반 인습적이고 현대적인 결혼 형태였다.
1917년에는 레오나드가 직접 아내의 책을 발간해 주기 위해서, 인쇄기를 사서 출판사를 시작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 출판사를 가짐으로써 그 누구의 눈치나 간섭도 필요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쓸 수 있는 작가로서의 독립성을 갖게 된다. ‘호가스’라고 이름 붙인 이 출판사는 울프의 책은 물론, 캐더린 맨스필드, T. S. 엘리어트의 시 등등을 출간해서 현재 저명한 영국의 출판사로 성장했다고 한다.
현대 소설의 나침판 역할을 하다
울프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문학사에 ‘인간의 내면’이라는 가장 매혹적이고 방대한 자료를 기증한 점이다. 인간의 내면을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울프는 소위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은 내면의 의식 속에서 동시적으로 마구 일어나는 생각이나 냄새, 소리, 촉감 등의 감각과 감정을 작가의 손길로 교통정리하지 않은 채, 경험되는 순간의 모습 그대로 물 흐르듯 기록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보자.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 순간, ‘나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고 머릿속에서 생각은 늙어서 양로원에 혼자 들어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과거에 결혼할 뻔한 남자 얼굴이 떠올라 생각은 과거의 그 순간으로 흘러간다. 다음 순간에 시계를 보고 생각은 다시 출근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실제 삶의 모습이 이렇기 때문에 리얼리즘 작가들처럼 외부 묘사에만 치중하는 방식은 도리어 비사실적이고 거짓된 방식일 수가 있다는 것이 울프의 생각이었다. 울프에게 있어서 진정한 실재는 '내부에서 본 삶'에 있었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이 인물의 머릿속,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그 유명한 작품 <율리시즈>와 함께, 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와 <댈러웨이 부인>이다. 이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인해 입담 좋은 이야기꾼처럼 여러 가지 사건들을 엮어나갔던 19세기 소설과, 인물의 내면묘사에 주력하는 20세기 현대 소설이 분명하게 구별되기 시작한 것도 또한 사실이다.
만일 작가가 자유민이고 노예가 아니라면, 자기가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다면, 자기 작품을 전통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기초할 수 있다면, 플롯이니 희극이니 비극이니 하는 것, 상식적인 연애담이니 파국이니 하는 것은 없어질 것입니다.
1919년 울프가 발표한 '현대 소설론'은 사실상 울프 자신의 창작론이면서, 20세기 문학의 항로를 알리는 나침반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류작가, 비타 색빌 웨스트와의 사랑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면서도 또 남편의 세심한 보호아래 있으면서도 울프의 심리적인 병인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어릴 적 경험으로 인한 남성에 대한 혐오감 때문인지, 사실상 그녀가 강렬한 정서적 유대감을 느낀 대상은 늘 여성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두 번째 비밀이다.
그녀의 인생에는 수많은 중요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첫째는 '상상 속의 근친상간'이라 할 정도로 사랑한 그녀의 언니 바네사였고, 그 뒤로 마쥐 번, 바이올렛 디킨슨, 에델 스미스 등에게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진짜로 남녀관계처럼 사랑에 빠진 것은 1922년에 알게 된 작가 비타 색빌 웨스트였다,
영국 귀족 출신으로 당대에는 D. H. 로렌스보다 더 많이 팔린 소설을 쓰기도 했던 작가인 비타 색빌 웨스트는 울프보다 10살 아래였다. 그들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렸다. ‘누군가에 의해서 내 마음이 이렇게 이끌렸던 적은 그리 없다. 나는 정말로 그녀(버지니아 울프)에게 매료되었다’라고 비타가 고백하고 있고, 울프는 ‘지금 그녀(비타)자체의 존재와 아름다움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녀에게 반한 것일까?’라고 쓰고 있다. 그들은 그 후 10여 년이 넘게 가까운 관계를 지속하는데, 그들의 관계는 서로의 남편들도 모두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었다.
나중에 울프는 300년을 경유하는 허구적인 인물을 전기 소설화하여 <올란도>라는 소설을 쓰게 되는데, 이 작품은 비타의 양성적 성격, 그리고 귀부인의 품격과 집시 같은 자유분방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의 매력에 대해 바친 일종의 애정고백서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울프는 그녀에 대해 ‘Love of Life’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첫 만남에서의 비타의 인상에 대해 울프의 남편인 레너드조차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으니, 그녀가 정말로 매력 있는 여성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녀는 인생의 절정기에 있었고, 능력의 최고봉에 달한 짐승이자 만개한 아름다운 꽃이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멋지고 귀족적이고 당당하며, 오만하리만큼 위엄이 있었다.
울프는 비타와의 만남을 통해서 훨씬 더 생동감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는데, 어쨌든 그들의 관계는 1935년, 울프의 표현에 따르자면 ‘무르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그냥 끝나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울프가 자살하자 비타는 격심한 충격을 받고, ‘만일 내가 계속 그녀와 가까이 있어서 그녀의 정신 상태를 알았더라면 그녀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으로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울프의 자살에 대해서는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정신병적인 증상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2차 대전 중에 유태인인 남편의 처형을 두려워했다는 분석도 있다. 울프의 유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자는 거리에 나가 산책만 해도 창녀로 오인을 받기 때문에 맘대로 산책하기도 힘들고, 대학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려고 해도 남자와 함께 동행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시대에 버지니아 울프는 글로써, 또 자신의 혁신적인 삶으로써 시대에 저항했다. 그녀는 1929년에 쓴 <자기만의 방>에서 ‘우리가 모두 일 년에 500파운드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이라는 말로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자기만의 방>은 발표된 당시에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60년대 이후에는 더욱더 확고하게 페미니즘의 지침서로 불리고 있다.
백년 전부터 <자기만의 방>을 꿈꾸다
허마이오니 리라는 비평가는 울프에 대한 평가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녀는 누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읽는가에 따라서, 형식의 문제에 사로잡힌 난해한 모더니스트의 모습, 일종의 익살꾼, 신경증에 걸린 지식인 심미가, 창의력이 풍부한 환상적인 작가, 심각한 속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삶의 역사가, 성적 학대의 희생자, 레즈비언 여주인공, 또는 문화분석가의 모습을 띤다’.
그러나 그 여러 가지 버지니아 울프의 얼굴들 중에서도 가장 한결같은 얼굴은 서평, 에세이, 일기, 편지, 강연 등의 엄청난 작업량을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계속했던 완벽주의자, 프로의 모습이다. 그녀의 남편도 ‘나는 다른 어떤 사람도 버지니아보다 더 집중해서 이렇게 끈질기게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증언한 적이 있듯이, 그 고통스럽고 변화무쌍했던 삶 속에서 그녀가 남긴 작품들의 양을 보면 정말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기도 할 정도이다.
생전에 남긴 작품들의 양도 많았지만, 사후 끊임없이 새로 발견되는 에세이와 논평과 자서전과 편지, 일기 등으로 인해, 그녀의 작품 규모는 더욱 엄청나게 커졌다. 심지어 1925년처럼 병으로 드러누운 해에도 소설 한 편과 에세이집을 수정해 출간했고, 여덟 편 정도의 단편을 썼으며, 다른 소설에 착수하고 평론 37편을 발표했고 꾸준히 일기를 썼으며,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고, 편지도 수없이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병약했을지 모르나 진정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고, 끈질긴 프로 의식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에 대한 20세기의 인식도 약간의 실험적 작품을 남긴 연약한 이미지의 여류작가에서 가장 전문적이고, 완벽주의적이며, 열성적인.... 언어에 순교한 작가 중 의 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다.
더욱이 앞으로 백 년이 지나면, 집 문 앞에 이르러 생각하건대,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둘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한때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모든 활동과 힘든 작업에 참여할 것입니다. 아이 보는 여자는 석탄을 운반할 것이고, 가게 주인 여자는 기관차를 운전할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예견한 지 정말로 이제 백 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21세기의 우리들은 ‘한때 여성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모든 활동과 힘든 작업’에 남성들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쉽게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자유가 100년 전에 버지니아와 같은 그녀들에게는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 꿈이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한 번쯤 자신에게 되물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나는 과연 내 인생에서 진정한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는가?